74화.
허나 그건 당주일 때 혹은 중, 소형급 흑도방파일 때의 이야기다. 북경 흑도를 장악한 대방파인 흑룡방을 유지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나마 다섯 당주들이 힘을 합친다면 유지 정도는 불가능하지 않았다. 허나 자신이 사라진 후에도 그들이 서로의 위치에 만족할 리가 없었다.
흑룡방을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 싸울 테고, 그 과정에서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럴 바에는 나눠주는 것이 낫다. 쓸데없이 피만 흘릴 바에는.
“그리고 쾌활림은 되돌려주는 것이 낫겠다.”
쾌활림은 아직 귀림이령에게 맡겨둔 상황이다.
맡길 인재를 찾지 못한 상황에서 이현성이 자꾸 외부에 나갈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잘 되었단 생각이 들었다.
쾌활림을 귀림에서 그대로 품는 것이 좋을 것이다.
흑룡방과 쾌활림에는 미련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마지막 발목을 잡는 것이 있으니, 바로 문씨 남매였다.
“그 아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어.”
이용하기 위해서 접근했던 문씨 일가이건만 이제는 너무 정이 들어버렸다. 그렇기에 쉽게 정을 끊기가 어렵다.
동시에 오히려 잘 되었다. 북경을 떠나는 것이.
다시 차갑고 단단한 심장을 되찾을 수 있으니까.
그때 누군가의 기척을 감지했다.
“음? 쾌활림에서 오셨소?”
“예. 귀인. 림주께서 뵙기를 청합니다.”
“…좋소. 안 그래도 림주께 볼일이 있었는데…….”
“어? 야 소저… 무사히 돌아오셨구려.”
쾌활림주의 연락을 받고 그녀를 찾아갔다. 허나 귀림이령의 자리에서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를 반겼다.
이현성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귀인, 그간 잘 지내셨나요?”
“잘 지냈소. 안 그래도 원하시는 것을 이루셨는지 궁금했는데…….”
이현성의 물음에 그녀는 미소로 화답했다.
그것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애초 그녀가 이곳에 있는 것은 귀왕인을 조종할 수 있게 되었단 뜻이다.
어찌 보면 어리석은 질문이었던 것이다. 그녀 아니, 야래향은 이현성을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부족하지만…….”
“경하드리오.”
“감사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 형식적인 대화가 오갔으나 야래향의 입술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러던 중 이현성이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따로 할 말이 있으셔서 부르신 거요? 야 소저 아니, 귀왕.”
“그건 아니지만… 죄송합니다. 제가 귀인의 시간을 너무 빼앗았군요.”
“아니외다. 안 그래도 본인 역시 할 말이 있어서 찾아뵐 생각이었소.”
귀왕인이 귀림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는 이현성은 그녀를 더 이상 ‘소저’란 호칭으로 부를 수 없었다.
그랬기에 귀왕이란 호칭을 사용했다.
그것이 그녀는 물론 귀림에 대한 예의였기 때문이다.
“말씀하세요.”
“쾌활림을 귀림에 돌려드릴 생각이외다.”
“예? 그게 무슨…….”
귀왕인을 그녀에게 돌려주는 조건으로 대신 북경 흑도를 받기로 했다. 귀림은 흑룡방을 세울 수 있게 뒤에서 지원했고, 쾌활림 역시 넘겨주었다.
비록 아직 귀림에서 쾌활림을 맡아주고 있었지만.
당황하는 그녀를 보며 이현성이 나직하게 말했다.
“북경을 떠날 생각이오.”
“……!!”
그의 말에 야래향의 눈이 커졌다. 설마 이현성의 입에서 북경을 떠난다는 말이 나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
비역에서 단련된 것은 무위만 아니라 그릇 역시 커졌다는 증거였다.
“실례가 아니라면 연유를 물어도 될까요.”
“실례랄 것이 있겠소. …그간 여러 일들이 있었소. 그로 인해 본인에게 관심이 있는 자들이 많아졌소.”
이미 보고를 받았기에 야래향 역시 그간 이현성에게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여러 무림세가, 거대상단 등에서 좋은 조건을 내놓은 것 역시 알고 있었다.
허나 이미 거절했다는 것 역시 보고 받았다.
“그렇다면 어느 방파로 가실 생각이신가요?”
“어느 방파에도 들어갈 생각은 없소.”
“예? 그럼 북경은 왜…….”
그에게 제안한 세력 중 어느 하나 대단치 않은 곳이 없었다. 이현성이라도 혹할 만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북경을 떠난다는 말을 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어느 방파에도 들어갈 생각이 없다고 하니 그녀로서는 어리둥절한 것이 당연했다.
“본인이 북경에 온 것은 무림세력의 방해 없이 힘을 키우기 위함이었소. 흑도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고… 그런데 흑룡방으로 찾아온 자들이 있었소. 본인이 흑룡방주란 사실까지 이미 알려진 것이오.”
“그게 누군가요?”
“환야와 사자도패요.”
“……!!”
야래향의 눈이 커졌다. 무림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당황했는지 그녀는 말을 더듬거렸다.
“천사교의 환야와 천웅방의 사자도패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정말 그들인가요?”
“그들 말고 환야와 사자도패란 별호를 쓸 수 있는 자가 또 있겠소? 게다가 그런 기세라면…….”
천사교의 오대교령과 천웅방의 팔패는 사파무림에서 서른 손가락에 꼽히는 초절정고수들이었다.
감히 그들을 사칭하고 살아 있을 자는 없었다.
그러니 그들 본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천하의 천사교와 천웅방이 그를 원한다.
그것도 환야와 사자도패를 보낼 정도라니…….
야래향은 이현성을 다시 한번 보며 놀라워했다.
어쩌면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사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로서는 아직 이현성의 진면목을 다 알아볼 혜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떠나실 생각이세요?”
“다행히 이번에는 그냥 돌아갔지만, 그게 끝일 리 없으니 어쩔 수 없소.”
맞는 말이다. 다른 무림세가나 방파들도 대단하지만, 사파사세는 격이 다른 세력이다.
그런 천사교와 천웅방이 이현성을 원한다면 북경이라도 안전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그냥 돌아가지 않을 것이 뻔하다.
그걸 아는 야래향은 입술을 깨물었다.
“본림이… 보호해드릴게요.”
“…! 아니외다. 마음만 받겠소.”
그녀의 제안에 이현성은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결국은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귀림의 힘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삼대살종 중 하나인 유령곡은 혈천십삼세의 하나이고, 살막은 살문의 정점에 있었다. 그들과 비견되는 귀림이었다.
거대세가나 대문파도 상대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도 사파사세는 아니었다.
정파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파무림의 힘이 강성했다.
그런 그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사파인들이 모여 만들어진 세력이 바로 사파사세였다.
사파사세 중 한 세력이라도 단독으로 상대할 수 있는 세력은 정파무림의 정신적인 지주라는 소림 정도였다.
무당과 화산파조차 단독으로는 장담할 수 없는 사파사세의 마수로부터 이현성을 지키기에 귀림은 힘이 부족하였다.
“언제… 떠나실 생각이신가요.”
“조만간 떠날 생각이오.”
그녀는 이현성의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한쪽 면에는 귀(鬼)가, 다른 면에는 림(林)이라고 적혀 있는 동전이었다.
“본림을 상징하는 귀림전(鬼林錢)이에요. 필요하실 날이 있을 거예요. 부담 없이 사용하세요.”
“고맙소.”
보이는 것과 달리 그리 하찮은 동전이 아니었다.
귀림이 은혜를 입었을 때, 보은의 의미로 전달하는 신패였다. 사용할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지만, 그 어떤 상대라도 청부할 수 있는 만큼 그 가치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현성은 아무런 반응 없이 돌아갔다. 홀로 남은 야래향은 나직하게 말했다.
“살문을 일통한다면… 구전으로만 들었던 조사님의 경지에 오른다면, 사파사세도 두렵지 않겠지.”
향후 무림에 죽음의 여제가 탄생한 것은 어쩌면 이 순간의 결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 * *
“…본방을 해체한다.”
“……!!”
다음 날, 이현성은 오대당주를 모았다.
그리고 폭탄선언을 했다. 흑룡방의 해체.
당주들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선언이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방주님!”
“가, 갑자기 해체라니요!”
그들은 당황했는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그럼에도 이현성은 개의치 않았다.
놀랄 만한 일임을 충분히 인정하기 때문이다.
“난 북경을 떠날 것이다. 솔직히 흑룡방은 그냥 놔둬도 상관없고, 너희 중 아무나 방주가 되어도 된다.”
“…….”
이현성의 말에 다들 충격을 받은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일부는 탐욕의 빛이 눈에 번들거렸다.
그런 그들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이현성은 말을 이었다.
“허나 너희 중 흑룡방을 지켜낼 수 있는 자는 없다.”
“…….”
그제야 당주들의 눈에서 탐욕이 조금 사라지고 이성을 되찾은 듯싶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의 주제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현성이 선택한 인재들이다. 때문에 웬만한 수준의 흑도방파는 충분히 이끌 능력이 된다.
하지만 북경 흑도를 장악한 흑룡방이라면 말이 다르다.
다른 당주들을 밀어내고 한 명이 흑룡방을 독식하기도 어렵다.
“흑룡방을 쪼개줄 테니 그걸로 만족해라. 만족하지 못한다면 내가 떠난 후 전쟁을 해도 관여하지 않을 테니 알아서들 하고.”
“…….”
당주들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어찌 보면 바라 마지않던 상황이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벽과 같은 방주가 스스로 떠나주는 상황. 예전과 같은 권력 아니, 그 이상의 권력을 가질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기쁜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 이유를 그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주군. 북경을 떠나실 때 뒤따를 수 있게 허락해주십시오.”
“묵장진. 자네는 지켜야 할 것이 있지 않던가?”
묵장진은 몰락한 묵가장의 남은 식솔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전성기 시절과 달리 남은 식솔이 많지는 않지만, 그가 사라진다면 그들은 막막해질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묵장진이 자존심을 꺾고 흑도에 들어온 것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이현성은 차마 그에게 따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먹고살 여건을 만들어주면 됩니다. 주군.”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주군!!”
내색하지 않을 뿐 이현성은 솔직히 기뻤다.
자신이 북경에서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시 무관(武官)으로서, 장수로서 살고 싶지 않나. 원한다면 기회를 만들어주마.”
“…….”
예상치 못한 이현성의 제안에 묵장진은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서 시선을 뗀 이현성은 나직하게 말했다.
“나의 뜻은 여기까지다. 그만 모두 해산하라.”
* * *
“떠나신단 말이시오!”
“그렇게 되었습니다. 대인.”
흑룡방과 쾌활림 등 북경에서 벌여둔 일을 정리하던 이현성은 마침내 문종학 내각대학사를 만났다.
떠나기 전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함이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문종학은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 역시 이런 날이 언젠가는 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어디까지나 객(客)인 만큼 평생 이곳에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