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그 선택… 후회하지 않겠느냐?”
“가주님 아니, 아버님. 저… 지봉(智鳳)이에요.”
제갈현지는 지금 이현성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부친에게 시인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에게 시집을 가겠단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긴장했다. 솔직히 부친이 허락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무림세가의 여식으로서, 정략결혼의 의무가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현성은 결격사유가 있었다. 이렇다 할 배경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냐. 북경에 사람을 보내마.”
“가, 감사해요. 아빠!”
제갈현지는 자신도 모르게 예전처럼 아빠라고 불렀다. 그만큼 기뻤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신을 아낀다고 해도 혼사는 두 사람만의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부친이 정말 들어줄 줄은 몰랐다. 허나 그건 짧은 생각이었다.
이현성은 약관의 나이로 사천당가의 호법을 제압한 괴물이었다.
한명의 고수라도 더 원하는 제갈세가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환영할 일이었다.
다만 이현성을 낚는 미끼가 금지옥엽인 제갈현지라는 점이 조금 아쉬웠다.
‘녀석. 그렇게 좋을까.’
그러나 그들 부녀가 놓친 것이 있었다.
이현성을 원하는 곳은 그들만이 아니며, 그를 찾는 이들 역시 그만한 조건을 제시하려 한다는 사실을 아직은 모르고 있었다.
* * *
“이렇게 이현성 대협을 뵙길 청한 것은…….”
누가 봐도 무림고수임을 알려주는 듯한 중년 사내가 문가장의 문을 두들겼다.
그가 청한 자는 내각대학사가 아닌 빈객인 이현성이었다.
“죄송합니다만, 거절하겠습니다.”
“예? 아직 아무런 말씀도 드리지 않았소만…….”
이현성은 중년 사내의 용무도 듣지 않은 채, 거절의사를 밝혔다. 중년 사내는 그의 대답에 당황하는 동시에 불쾌했다.
무림에서도 명숙 대우를 받는 자신이 조카뻘인 청년에게 이런 대우를 받으니 기분 좋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현성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나직하게 말했다.
“대협. 낙양검문에서 오셨다 하셨습니까?”
“그렇소.”
이현성의 말에 중년 사내는 자부심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 만했다.
아홉 왕조가 도읍으로 삼은 하남성의 낙양.
그런 낙양을 대표하는 대문파가 바로 낙양검문이었다.
무림 백대고수인 낙양비검(洛陽飛劍)의 사문이기도 하였다.
그의 전언을 가지고 온 중년인 역시 낙양검문의 장로이자, 절정검객이니 자부심을 갖는 것도 당연했다. 허나 그는 몰랐다. 이곳의 현실을.
“부문주 자리라도 제시하실 생각입니까?”
“부, 부문주 말이오? 본문의 호법이라면 충분히…….”
어이없다는 그를 보며 이현성은 나직하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문주 자리를 주신다고 해도 거절입니다.”
“이보시오! 아무리 실력이 있다고 해도 너무한 거 아니요! 감히 어디서!!”
중년인의 분노는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이현성의 입장에서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제의는 그가 처음이 아니며 낙양검문의 제의보다 못한 곳 역시 없었기 때문이다.
“산동악가에서는 호법의 자리와 가전비전을, 천하상단에선 총위장(總衛將)의 자리와 남미(南美)를, 뇌전궁에선 부궁주까지 제의했습니다. 이래도 제 말이 과합니까?”
“…….”
이현성의 말에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오대세가에는 속하지 못하지만 열 개의 가문을 꼽는다면 항상 들어가는 산동악가(山東岳家).
석가장의 중원상단과 함께 천하 사대상단 중 하나인 천하상단(天下商團).
사파사세를 제외하고 사파무림에서 첫손꼽히는 뇌전궁(雷電宮).
어디 한곳 낙양검문보다 못한 곳이 없었다. 게다가 그들이 내놓은 조건 역시 파격적이었다.
그러니 거절은 당연했다.
“돌아가십시오. 본인은 귀문을 하찮게 본 것이 아닙니다. 제 입장이 그렇지 못한 것뿐입니다.”
“…이해합니다. 이 대협.”
그는 그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본 이현성의 가치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거부하기 쉽지 않은 제안들이었다. 하나같이 대단한 세력들이었으니까.
허나 거부했다. 한 곳을 선택하면 다른 곳들과 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 들어왔다.
* * *
“묵 당주. 흑룡당원들에게 가르쳐두게나.”
늦은 밤. 이현성은 문가장을 빠져나와 흑룡방으로 왔다. 그리곤 두 권의 서책을 내놓았다.
흑룡당주인 묵장진은 그가 건넨 두 권의 서책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향해 이현성이 나직하게 말했다.
“보면 알겠지만, 보법과 심법이다. 그리 대단한 건 아니지만 익혀두면 도움은 되겠지.”
“감사합니다. 주군! 최선을 다해 가르치겠습니다.”
빠름이나 현란함은 부족하지만 진중하고 묵직함으로 도법의 힘을 한층 끌어올리는 진천보법(振天步法)과 도가(道家)의 무극일원신공에서 파생된 일원심법(一元心法).
대단한 절학은 아니지만, 흑룡당원들에게는 최소한 꿈을 꿀 수 있게 만들 수준은 된다.
특히 사혼팔도(死魂八刀)와 접목이 가능한 무공들이었다.
북경에서 떠나는 날, 흑룡당만은 데려갈 결심이 선 것이다.
“이제 돌아갈… 음…….”
용무를 마친 이현성은 문가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그의 기감에 누군가가 잡혔다.
그것도 평범한 존재가 아니었다. 초절정지경에 오른 이현성조차 긴장하게 만들 정도의 고수였다.
그때 정체불명의 노고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본 순간 이현성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이미 노고수의 정체를 눈치챘기 때문이다.
“어이없군. 본좌의 기척을 알아차리다니… 듣던 것보다 제법이군.”
“…천사교의 환야 어르신께서 제게 무슨 볼일이 있으신 겁니까?”
“……!!”
이현성의 물음에 노인 아니, 환야는 경악했다.
설마 자신을 알아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사파무림의 일곱 절대자 칠사(七邪). 그중 천사(天邪)가 교주로 있는 집단이 바로 사파사세(邪派四勢) 중 천사교(天邪敎)였다.
그리고 이현성의 눈앞에 있는 노인은, 천사교주를 보좌하는 오대교령(五大敎領)의 한 명인 환야(幻夜)였다.
“나를 알다니 놀랍군. 날 어찌 아는 것이지?”
“그게 중하오? 용건이나 말하시오.”
이현성은 긴장되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딱히 천사교와 척을 진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는 오대교령이자, 천사교주는 아니었다.
버거운 상대였지만 일방적인 상대도 아니었다.
자신 역시 초절정고수인 만큼 절망적인 것도 아니었다.
“건방진 놈. 하지만 마음에 들어. 가식적인 정파놈들과는 달라 보이니. 교주님께서 너에게 하해와 같은 은혜를 내리셨다. 본교의 호교사자(護敎使者)가 될 영광을…….”
“고작 흑도방파나 이끄는 본인에게 뭘 보고 그런 기회를 주겠단 말이오?”
교령이 일반적인 문파에서 장로에 해당되는 직위라면 호교사자는 호법과 비슷한 직위였다.
흑룡방이 북경 흑도를 장악했으나 천사교에서 호교사자의 자리를 제안할 이유가 없었다.
허나 이어진 환야의 말에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난 고작 흑룡방주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사천당가를 망신 준 이현성 네놈에게 하는 말이지.”
“……!!!”
“뭘 그리 놀라나. 본교가 그런 것도 모를 거라 생각했나.”
흑룡방주가 이현성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없었다. 그러나 사파사세의 눈까지 속일 수는 없던 것이다.
즉,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게 되었단 뜻이었다.
“잘 생각하게. 이건 제안이 아닐세.”
“…….”
이현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 아니, 명령이었다.
눈앞의 환야만 해도 버거운 상대였다. 설사 그를 물리친다고 해도 이젠 천사교와 척을 지게 되는 것이다.
사파사세인 천사교.
북경에서 이룬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도망쳐야 한다.
흑룡방 따윈 천사교의 정예무력대 하나만 와도 쓸어버릴 수 있었다.
그게 흑도와 사파의 차이였으며, 흑룡방과 천사교의 격차였다.
‘어쩔 수 없는 건가…….’
입술을 깨문 이현성은 결국 결단을 내려야 했다.
“본인은…….”
“천사교 따윌 갈 필요 없다! 본방이 지켜주마!”
그 순간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낸 또 다른 고수가 나타났다.
사파사세의 천사교를 ‘따위’로 표현한 고수였다. 덕분에 상황은 더욱 복잡하게 변해가게 되었다.
그 시각, 모종의 장소에서 새로운 고수가 탄생하고 있었다.
* * *
“살(殺)!”
옥구슬과 같은 아름다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허나 그 속에 담긴 뜻은 너무도 살벌했다.
그 아니, 그녀의 외침과 동시에 한쪽 벽에 구멍이 생겨났다.
“회(回)!”
다시 울려 퍼진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한 것인지, 벽의 구멍에서 무언가 빠져나왔다. 그건 평범해 보이는 반지였다.
벽에 구멍이 난 것은 반지로 인해서였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 반지가 섬섬옥수(纖纖玉手)와 같은 손가락에 다시 돌아왔다는 점이었다.
“호호호! 드디어 성공했어!”
그녀의 정체는 야래향. 귀림의 소림주였던 아니, 이젠 신임 림주인 귀왕(鬼王)이 된 그녀였다.
비역에 들어온 지도 수개월이 지났다.
그녀는 쉬지 않고 귀왕진결과 귀왕살무를 익힌 결과, 드디어 귀왕의 신물인 귀왕인을 자유롭게 방출은 물론 회수까지 가능해졌다.
“할아버지께서 회령환(回靈丸)을 남겨주지 않으셨다면 불가능했을 거야.”
일천한 그녀의 내공으론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년 만에 해낼 수 있었던 까닭은 성수의가의 회령환 덕분이었다.
소림의 대환단과 비견되는 성수의가의 회령환.
전대 귀왕인 조부의 안배였다. 그리고 그의 안배대로 야래향은 드디어 새로운 귀왕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비록 귀왕인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되었으나 귀왕다운 무위를 갖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귀림과 함께 살종(殺宗)인 살막의 살왕과 유령곡의 유령왕에 비해 그녀는 한참 부족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본림이 그들의 위라는 것을 제 손으로 증명해 보일게요!”
그녀는 다짐했다. 귀림의 부활과 재림을.
강대한 포부를 선언한 야래향이 한순간 소녀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보다 그분은… 잘 계시려나?”
야래향. 그녀는 살종인 귀왕인 동시에 꽃다운 나이의 소녀이기도 했다.
그녀의 출역은 무림에 새로운 변화를 출사하는 것과 같았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