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검을 쓰는데 가차 없는 이현성의 솜씨는 아무리 좋게 봐도 정파의 무학으로 보긴 어려웠다.
실제로 이현성이 익힌 무학의 대부분이 사마(邪魔) 계열이었다.
모산파의 상청도량심결 정도만 정파의 무학이고, 정파무림의 시선에선 삼라만상조차 사술로 볼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감당 못하면 무조건 사술로 보는 경향이 있으니까.
“호법의 직위와 태아(太阿)라면 거절하지 못하겠지.”
“태, 태아를 말씀이십니까. 방주님!”
중년인이 기겁하는 것도 당연했다. 태아검이라면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수개월 전, 진주언가를 떠들썩하게 만든 구야자의 승사검.
승사검이 월왕(越王) 구천의 명으로 구야자가 제련한 다섯 검 중 하나라면, 태아검은 초나라 소왕의 초청으로 구야자가 오의 명장 간장과 함께 제련한 세 자루의 검 중 하나였다.
우열을 가릴 수 없으나 사람들은 태아를 승사 위에 두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태아검을 내놓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검은 관심도 없고, 검객이라면 태아를 거절할 수가 없겠지.”
“그야… 알겠습니다. 방주님의 뜻대로 그를 기필코 본방의 사람으로 만들겠습니다.”
“기대하지.”
도대체 누구기에 태아검을 스스럼없이 내놓을 수 있을까?
사파의 일곱 절대자, 칠사 중 창사(槍邪)라 불리는 천웅창제(天雄槍帝) 담중.
사파 사대세력 중 하나인 천웅방주인 그였기에 가능한 결단이었다.
즉, 정파만 아니라 사파 역시 이현성을 탐내기 시작했단 뜻이었다.
허나 이현성을 탐낸 사파세력은 천웅방만 아니었다.
그를 탐내는 세력의 사절들이 북경으로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 * *
“현성. 나왔어.”
“군악. 또 왔어?”
도왕의 부탁을 완수한 이현성은 그가 붙잡기 전에 잽싸게 북경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도왕도 보통이 아니었다. 팽군악에게 진주언가를 다녀온 후 이현성과 함께 북경에 가 있으란 지시가 있던 것이다.
졸지에 하북팽가 도객들의 호위를 받으며 북경에 입성하게 되었다.
“나 서운하려고 해.”
“하… 아니다. 잘 왔어.”
하북팽가는 무림세가였지만 장수들 역시 여럿 배출한 가문이었다. 북경 내에도 팽가장이라는 분가(分家)가 있었다.
팽군악과 동행한 하북팽가의 도객들은 팽가장에 지내면서 매일같이 문가장에 방문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벌써 5일 내내 방문하니 당황스러웠다.
자신 역시 문가장의 객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곤란할 따름이었다.
“지난번에 지적해준 부분을 많이 고쳤는데 좀 봐줘.”
“좋아. 얼마나 늘었는지 봐주지.”
도법을 좀 봐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잠깐만 어울려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팽군악과 동행한 도객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대협. 가능하면 저희도…….”
“하, 하하… 그러시죠.”
이현성의 허락에 도객들은 무척 기뻐했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후 팽군악이 일취월장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 역시 무인인 만큼 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그런 그들을 본 이현성은 자신이 잊고 있던 무언가가 떠올랐다.
‘참, 얼마나 버티고 있으려나?’
두 달 전쯤 적룡당주인 단벽호의 청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이현성은 매일 세 시진씩 기초훈련을 요구했다. 자신이 그만두라고 허락하기 전까지.
흑도 근성을 버리지 못한다면 끝까지 해낼 수 없는 요구임을 모르지 않았다.
‘어차피 그것도 해내지 못한다면 뭘 가르쳐도 쓸 만해질 수는 없으니까.’
아무리 대단한 무공을 가르쳐도 기초가 부실하면 제대로 익힐 수 없고, 그 정도 끈기가 없다면 결국 중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자신의 요구를 완수한다면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줄 생각이었다.
‘오늘 밤, 다녀와야겠어.’
* * *
“…오랜만이군.”
오랜만에 방주의 호출에 당주들이 본방에 모여들었다.
고작 두 달 밖에 지나지 않았으나 더욱 위엄 있는 흑룡방주를 보며 두려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당주들을 스윽 훑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모 당주에게 미리 보고를 받았네. 95명이라… 생각보다 많이 남았군.”
움찔.
이현성의 말에 당주들은 움찔했다. 그는 진심으로 한 말이었지만, 당주들에게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말이 95명이지 그중 33명은 흑룡당원들이었다. 즉, 사대당에서 62명만 버텨냈다는 뜻이다.
당주들로서는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약속대로 그들은 내가 직접 가르치지. 그리고 그들 외에도 수고의 의미로 사혼팔도를 전수하지.”
“가, 감사합니다.”
예상치 못한 제안에 당주들은 놀랐다. 하지만 이현성이 이런 떡밥을 던진 이유가 있었다.
“약속을 지킨 95명은 흑룡당으로 옮기게.”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주들은 당황했다. 흑룡방도들 모두가 이현성의 부하였지만, 당주들이 맡고 있는 부하이기도 했다. 부하들의 수와 실력은 상관인 자신들의 힘의 척도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알짜배기들만 빼내겠다고 하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이현성이 차갑게 말했다.
“그럼 내가 그놈들을 찾아가며 가르치란 말인가. 단벽호.”
“그, 그건 아니지만… 죄, 죄송합니다.”
단벽호는 아차 했다. 아무리 자신들에게 권력을 나누어주었다고 해도 그는 흑룡방주.
북경 흑도를 평정한 강자였다. 자신이 감히 거역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의 차가운 눈빛에 단벽호는 물론 당주들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요, 용서… 으윽…….”
“사, 살려…….”
순간 그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감당할 수 없는 기운이 압박했기 때문이다.
절정고수일 때도 강했던 그였다. 그런데 초절정고수가 된 지금은 살기와 위엄의 격이 아예 달라졌다.
당주들이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을 죽일 생각은 아니었기에 살기를 거둔 이현성이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자꾸 잊으면 곤란해…….”
“컥, 컥… 무, 물론입니다.”
이현성의 차가운 시선이 흑룡당주인 묵장진에게 향했다.
“조만간 흑룡당은 내가 가르칠 테니, 그전까지 방도들에게 사혼팔도를 가르쳐놔.”
“존명!”
두말은 필요 없었다. 그런 묵장진을 보며 이현성은 나름의 위안을 삼았다.
언젠가 흑룡방을 해체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건질 것이 있었으니까.
‘쉽지 않구나. 세력을 일군다는 것이…….’
* * *
쾅!
“그놈이 감히!!”
군자 중의 군자라 불리는 제갈인섭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탁자를 부수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돌아온 여식, 제갈현지에게 진주언가의 파렴치한 짓을 모두 들었기 때문이다.
“진정하세요. 아버님.”
우드득…….
“후…….”
험한 꼴을 당할 뻔한 여식을 둔 아비가 어찌 분노를 참을 수 있겠는가. 허나 그렇다고 해도 당사자만은 못할 수밖에 없었다.
냉철함을 잃지 않는 여식을 보며 제갈인섭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분노를 완전히 해소하진 못했으나 이성을 되찾은 제갈인섭이 나직하게 말했다.
“네 생각은 어떠냐?”
“마음 같아서 싸우고 싶지만, 그건 하책일 뿐이죠.”
못마땅하였지만 진주언가는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거대세가였다. 그런 그들을 부수겠다고 싸운다면 제갈세가 역시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
그건 지략의 가문인 제갈세가답지 않은 방식이었다.
“이독제독(以毒制毒), 호가호위(狐假虎威).”
“독으로 독을 상대하고, 호랑이의 위세를 이용하자?”
제갈세가가 제일 좋아하는 계책이었다. 피해 없이 적을 상대할 수 있는 계책이기 때문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를 위해선 사전준비가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 가주님.”
“어떤 독을 사용할 생각이더냐?”
제갈현지는 호칭을 아버님에서 가주님으로 바꾸었다. 부녀지간이 아닌 가문의 일원으로서 가주에게 이성적인 판단을 요구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사천당가라면 그들을 더 압박할 수 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들을 이용하는 것은 위험하죠. …창룡과 신창양가라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하긴 그 개… 후… 그놈이 창룡에게 자격지심을 갖고 있으니까, 적당하겠구나.”
이현성에 의해 자존심을 구긴 사천당가였다. 그들을 이용하려다가는 자칫 일이 너무 커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대신 선택한 가문이 바로 신창양가였다.
진주언가와 함께 열 손가락에 꼽히는 거대세가이며, 특히 소가주인 창룡 양위성에게 언유광이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걸 건드려준다면 충분히 싸움을 붙일 수 있었다.
진주언가를 벌하기 위해서 아무 잘못도 없는 신창양가를 이용하려는 제갈현지.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독심을 품은 그녀는 너무도 무서웠다.
허나 아직 그녀의 계책은 끝나지 않았다.
“그럼 어떤 호랑이를 끌어들일 것이더냐?”
“남궁세가, 하북팽가, 황보세가입니다.”
사천당가와 제갈세가를 제외한 나머지 오대세가였다.
그녀의 말처럼 세 가문의 위세만 빌릴 수 있다면 진주언가를 압박하는 것이 더 수월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아무리 오대세가가 서로의 권력을 위해 협력하는 사이라고 해도 쉽게 도움을 줄 리가 없었다. 위세를 빌릴 때는 그만한 대가가 필요했다.
“검화(劍花) 정도면 오라버니의 짝으로 적합하지 않겠어요?”
“허… 네 오라비까지 이용할 생각이더냐?”
“이용이라니요. 어차피 아버님 역시 오라버니의 짝으로 그녀를 염두하고 계셨으면서. 시일을 조금 당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 걸요.”
제갈현지의 말대로였다.
제갈인섭 역시 제갈현도의 짝으로 삼봉은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오화사미 중에 며느리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래도 기왕이면 가문에 도움이 되는 오화를 원했다.
그중 표독스러운 사천당가의 독화나 차갑기로 유명한 모용세가의 빙화는 제갈현도와 어울리지 않았다.
북궁세가의 북궁무한과 혼례를 치를 도화(刀花)나 비구니인 아미파의 창화(槍花)는 당연히 제외였다.
그럼 결국 남은 것은 남궁세가의 검화(劍花) 남궁설지뿐이었다.
남궁세가 역시 사돈으로 제갈세가라면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큼… 남궁세가는 그렇다 치고, 하북팽가와 황보세가는 어쩔 생각이더냐? 도룡과 권룡 중 한 사람은 네가 혼약을…….”
“아니요. 황보세가는 산동악가 때문에 골치 아파하니 저희랑 연수할 거예요. 그리고 하북팽가는…….”
“하북팽가는?”
십대세가의 하나인 산동악가는 최근 성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덕분에 황보세가가 신경을 쓰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제갈세가가 손을 내민다면 덥석 잡을 것이다.
문제는 하북팽가였다.
그녀가 도룡(刀龍) 팽천악과 혼례를 하지 않는다면 끌어들이기가 쉽지 않다. 하북팽가에게는 이미 보검 한 자루의 빚까지 있으니 더욱 그러했다.
그때 제갈현지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그 모습을 부친인 제갈인섭은 놓치지 않았다.
“팽가주님의 자제인 팽천악, 팽군악 형제가 이현성 대협과 친분이 두터우십니다. 그리고 도왕 어르신께도 할아버지라고 부를 정도이니까요.”
“이…현성? 지금 왜 그를 갑자기 말하느냐……?”
지략의 가문인 제갈세가 가주인 제갈인섭이 그녀의 말을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설마라는 생각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더욱 붉어진 여식의 모습을 보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 딸이 이제 다 컸다는 것을.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