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살수-67화 (67/314)

67화.

“흐흐흐. 서방에게 못 하는 소리가 없군. 그리고 어차피 저항할 힘도 없잖아?”

“당신… 무슨 짓을 했군요?!”

“그걸 이제야 깨달았어? 천하의 지봉이… 크크크.”

제갈현지는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춘약인가? 섭혼술? 아니야. 머리가 아픈데… 서, 설마……!!’

“고독?!”

“오호? 역시 지봉이군. 알았으면 이제 쓸데없는 저항은 그만두라고.”

그제야 제갈현지는 자신의 상태를 완전히 인지할 수 있었다.

고독.

그중에서도 성욕을 자극하는 종류의 고독인 듯했다.

이 상태라면 고독이 이 이상 침범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렇기에 언유광의 마수에까지 저항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무, 물러서요! 제발……!”

“시끄러!”

흥분한 언유광은 힘으로 그녀를 억누른 채 강간하려고 했다.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무력감이었다.

제갈현지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싫어… 싫어… 구해줘요… 규 할아버지…….’

애타게 규염을 찾았으나, 천일취에 만취된 그는 제갈현지의 바람을 들어줄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언유광이 그녀의 육체를 농락했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소름이 돋고 혐오스러웠다.

결국 그녀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렸다.

혀를 깨물고 죽기로 한 것이다.

‘그래.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자. 내 원수는 분명 갚아주실…….’

허나 죽음조차 그녀의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었다.

“이 빌어먹을 년! 그렇게 죽고 싶단 말이지! 오냐! 죽여주마!”

혀를 깨물려는 그녀의 생각을 눈치챈 언유광이 제갈현지의 마혈(痲穴)을 눌러버렸다.

자결조차 수포로 돌아간 그녀는 절망감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언유광은 제 분신을 드러냈다.

“흐흐흐…….”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정신적인 고통에 심마(心魔)가 찾아왔다.

정신이 망가지려는 순간이었다.

“그럼… 으으음…….”

음흉하고 비열한 미소를 짓던 언유광의 몸이 제갈현지의 위로 떨어졌다.

결국 제갈현지는 심마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를 덮친(?) 언유광은 미동도 없었다. 왜냐하면 의식을 잃었기 때문이다.

“짐승만도 못한 놈.”

누군가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언유광을 발로 찼다.

그가 벽쪽으로 밀려가면서 가려졌던 제갈현지의 처참한 모습이 드러났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상의를 벗어서 그녀를 덮어주었다.

“하… 곤란하네, 할아버지께서 부탁하셨어도 거절했어야 했나? 아니야. 그랬다면 제갈 소저의 일생을 망쳤겠지.”

놀랍게도 제갈현지를 구한 인물은 바로 이현성이었다.

하북팽가에 있어야 할 그가, 북경으로 돌아갔어야 할 그가 왜 진주언가에 있는 것일까?

은원

“오랜만에 뵙습니다. 가주님.”

“하하. 오랜만이네. 팽 공자. 본가에는 어인 일인가?”

진주언가. 특히 언중경은 갑작스러운 불청객을 맞이했다.

아니, 다른 때라면 환영할 만한 귀빈이었다. 하북팽가의 직계이자 벽력도군의 차남인 팽군악이었으니까.

하지만 은밀한 거사가 진행되는 지금은 그저 불청객일 뿐이었다.

“자세한 것은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제갈인성 대협을 뵙고 오라는 아버님 아니, 가주님의 명령이 있으셔서요.”

“그…렇군. 미안해서 어쩌나. 지금은 만나뵐 수 없네.”

언중경은 내색하지 않았을 뿐, 낭패감을 느꼈다.

천일취로 만취된 제갈인성을 만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금 전에 과음으로 곯아떨어지셨네.”

“그러십니까? 그럼 제갈 소저라도.”

“이 시각에 젊은 처자를 찾아가는 것은 예의가 아닐세.”

“아…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제갈인성보다 제갈현지를 만나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지금쯤이면 한창 거사(?)가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팽군악으로 인해 판을 깰 수 없었다.

곤란하긴 하지만 오늘만 잘 넘기면 어떻게든 상황이 정리될 것이니 언중경은 지금만 모면할 생각이었다.

하북팽가의 소가주는 아니지만, 가주의 차남인 만큼 다음 대 장로가 될 팽군악을 이유없이 내쫓을 순 없었다.

“별채를 내어줄 테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쉬게나.”

“가주님의 배려에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럼 저는 이만…….”

팽군악은 언중경에게 정중히 인사를 한 후 가주전에서 나왔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언중경은 이를 갈았다.

“하필이면 오늘 오다니… 어쩔 수 없지. 본가를 오대세가에 올리기 위해선 제갈세가만 아니라 하북팽가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니 신경을 써줄 수밖에…….”

진주언가의 숙원이자, 언중경의 꿈이 바로 가문을 오대세가에 올리는 것이다.

나아가서 천하제일가로 만드는 거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였으니 팽군악은 불청객인 동시에 귀빈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만 잘 넘기면 돼… 오늘만…….”

“오늘은 너무 늦어서 내일이나 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숙.”

팽군악은 홀로 진주언가로 온 것이 아니었다. 하북팽가의 직계가 수행원 하나 없이 가문의 영역 밖에 나갈 리가 없었다.

그를 호위하기 위해서 벽력십팔도 중 셋과 일류도객 이십여 명이 동행했다.

“늦은 시각이니 그렇겠지. 이 대협. 문 소저. 번거롭게 해드려 미안하외다.”

“아닙니다.”

벽력십팔도는 방계 혈족과 제자들 중 가장 뛰어난 열여덟이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동행한 벽력십팔도의 세 명은 항렬 상은 가주와 같았다. 물론 방계인 만큼 직계만큼의 대우는 받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곳의 책임자는 직계인 팽군악이 맡은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일행에 하북팽가의 도객이 아닌 남녀도 껴 있었다.

‘하… 저분들이 계시면 나까지 올 필요는 없을 텐데… 도왕 할아버님의 의도는 알지만…….’

하북팽가의 도객이 아닌 남녀는 바로 이현성과 문교교였다.

하북팽가에서 용무를 마친 이현성은 북경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 부탁을 했다. 팽군악을 진주언가로 보낼 예정인데, 동행해줄 수 있냐는 부탁이었다.

다른 사람의 청이었다면 거절했겠지만,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부탁한 사람이 바로 도왕 팽진천이었기 때문이다.

제갈세가로부터 보검 한 자루만 양도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하북팽가는 그들에게 빚을 지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기에 창고에서 잠자고 있는 보검 한 자루를 꺼냈다.

원래라면 제갈인성이나 제갈현지에게 직접 전해줘야 하는데, 갑작스러운 상황에 봉황지회가 급히 마무리되면서 때를 놓치고 말았다.

팽홍원은 그 일을 차남인 팽군악에게 맡겼다. 언젠가 소가주인 형을 보좌할 팽군악에게 미리미리 인맥을 쌓게 하기 위함이었다.

‘교교에게 미안해서 어쩌나.’

도왕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이현성은 결국 팽군악과 함께 진주언가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문교교를 동행시킬 순 없었다. 천진에서 안평까지 보름 이상 걸리는 고된 일정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북궁세가의 무리와 함께 먼저 북경으로 보내려고 했다. 홀로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보다 가족들의 품에 돌아가는 것이 그녀에게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교교는 결사반대를 했다. 이현성을 두고 혼자 갈 수 없다고 버텼다.

평소와 다른 그녀의 완강한 거부에 이현성은 억지로 보낼 수도 없었다. 결국 몸이 고될 순 있지만 동행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고된 일정임을 증명하듯 문교교는 지쳐 보였다.

‘혈천을 생각하면 하북팽가의 힘이 필요하니 나 역시 바라는 바지.’

팽진천의 의도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자신과 하북팽가의 연을 더 돈독하게 만들고 싶은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이제 약관을 바라보는 나이에 초절정지경에 오른 괴물을 제 편으로 만들고 싶을 테니까.

이러한 마음은 사실 이현성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혈천이 천하를 노리는 만큼 하북팽가와 충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기왕 충돌한다면 이현성의 힘이 되어줄 수 있다면 더 이상 좋을 것이 없었다.

그러니 그 역시 팽군악과 연을 쌓는 것이 나쁠 것은 없었다.

‘내일이면 끝나니까.’

그때는 몰랐다. 그리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 * *

‘뭐지. 감시하는 것 같은데…….’

하북팽가의 무리는 진주언가에서 내어준 별채에서 묵었다. 당연히 이현성과 문교교 역시 별채의 객실에서 쉬고 있었다.

많이 피곤한지 문교교는 침구에 몸을 맡긴 채 바로 잠이 들었다.

그러나 이현성은 쉴 수가 없었다. 그의 신경을 거슬리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누군가의 시선이었다.

물론 하북팽가는 진주언가로서도 중요한 귀빈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안위를 신경 쓰기 위해서 주변에 많은 병력을 배치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괜히 이곳에서 지내다가 그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진주언가로서는 낭패일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보호가 아닌 감시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확인을 좀 해볼까?’

초절정지경에 오르면서 기감과 육감이 더 예민해진 이현성이었다. 이 찝찝함을 무시할 순 없었다.

문교교가 신경 쓰였지만, 하북팽가의 무인들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산책을 할 겸 별채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답답해서 바람 좀 쐬려 합니다.”

이현성이 별채 밖으로 나오자 진주언가의 무인들이 그를 막았다. 예상대로 감시 중임을 알 수 있었다.

“죄송하지만 돌아가 주십시오. 이곳을 벗어나시는 것은 곤란합니다.”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들의 말에 이현성은 순순히 돌아갔다. 동시에 이곳에서 무언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객실로 돌아온 이현성은 삼라만상(森羅萬象)을 펼쳤다.

별채를 감시하는 자들 중에 삼라만상을 꿰뚫어 볼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에 이현성은 유유히 별채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음? 뭐지?’

그는 이상한 상황을 목도할 수 있었다.

번(番)을 서고 있던 무사들이 모두 잠든 것이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닌 수십여 명이나 그랬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까이 가보니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제갈세가?’

하북팽가에서 본 제갈세가의 무인들이었다.

순간 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진주언가의 감시는 이들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이현성은 삼라만상의 기운을 거두지 않은 채 전각 안으로 잠입했다. 그리곤 눈살을 찌푸렸다.

‘두 사람이 연인이었던가?’

그곳에는 한쌍의 남녀가 부대끼고 있었다. 제갈세가의 영애인 제갈현지와 진주언가의 언유광임을 알 수 있었다.

회귀 전의 기억 속에 두 사람은 연인이 아니었다. 물론 자신의 회귀로 이미 세상은 변화하고 있었다. 그러니 회귀 전과 달리 두 사람이 연인이 될 수도 있었다.

진주언가와 제갈세가 사이에 벌어진 상황을 모르는 이현성으로서는 그 어떤 추측도 단정 지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되돌아가려고 할 때 언유광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이 빌어먹을 년! 그렇게 죽고 싶단 말이지! 오냐. 죽여주마!”

정상적인 연인 관계라면 이런 대화가 오갈 리 없었다.

이현성의 입장에선 남의 일에 끼어들어서 귀찮은 일에 휘말릴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제갈세가의 영애라면 상황이 다르다.

제갈세가는 하북팽가와 함께 오대세가의 한 가문이었다. 비록 하북팽가와 같은 무력은 없으나 대신할 지략을 가지고 있는 가문이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