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그렇기에 그나마 나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팽군악 소협과 친우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팽천악 소협은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야호!”
“쩝…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요.”
팽천악은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이현성은 사천당가라는 악연과 하북팽가라는 선연을 맺게 되었다.
그 시각, 또 다른 친우인 유백은 곤란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 * *
“그놈과는 무슨 관계지? 유 호위?”
하북팽가에서 서둘러 떠난 사천당가의 무리는 본가로 돌아가는 내내 분위기가 좋지 못했다.
무리의 책임자인 갈엽 호법은 부상당했고, 직계인 당령은 아직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대공자인 당천수의 심기가 불편했다.
그것도 상당히.
그러다 보니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던 중 대공자인 당천수가 당령의 호위무사인 유백을 불러냈다.
“…친우입니다. 대공자님.”
“친. 우.”
유백은 바보가 아니었다.
자신이 사실을 밝혀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안다. 아니, 그저 좋을 게 없으면 다행이지, 지금 상황이라면 상당히 피곤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속일 수는 없었다. 그와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오히려 이현성에게 실례이자, 자신을 친우로 받아준 그에 대한 배신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되묻는 당천수의 목소리에서 미세한 살기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친우라… 북경에서 왔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친우가 된 거지?”
“팽가에서 처음 봤습니다.”
“자세히 말해봐.”
“그러니까…….”
유백은 수련하다가 우연히 만났고, 대화를 나누다가 마음이 맞아 친우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까지는 말할 수 없었다.
당천수의 눈에서 광기를 읽었기 때문에 서둘러 설명을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었다.
“고작 그런 일로 친우가 되었다고? 겨우 그런 인연 때문에 검을 거두었다? 유 호위. 내게 하지 않은 말은 없나?”
“정말 그게 전부입니다. 대공자님.”
당천수는 유백을 미심쩍은 표정으로 바라봤다.
호법인 갈엽까지 검에 찔렀다. 그리고 유백이 막지 않았다면 동생인 당령까지 찔렀을 상황이었다.
겁대가리(?)를 상실한 이현성이, 유백 때문에 분노를 누르고 물러났다.
그 이유가 고작 반시진(1시간)의 짧은 인연 때문이라니,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단 말이지? 그만 돌아가 봐도 좋다.”
“예. 대공자님.”
제 위치로 복귀하는 유백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당천수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서 유백은 이미 가문의 가솔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치욕을 안겨준 개자식의 동료일 뿐이었다.
하지만 드러내놓고 화풀이할 수는 없었다.
몰락하긴 했어도 신룡유가의 후예라며 조부가 신경 쓰고 있는 놈이기 때문이다.
유백의 잠재력을 인지하고 있는 독종(毒宗) 당철영과 달리, 당자성과 당천수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한끝 차이였지만 그 결과는 너무도 다르다.
‘네놈들 모두 처리해주마. 기대해도 좋다.’
도왕
“뭘 그리 놀라는가? 자네가 원한다고 들었는데. 노부가 잘못 들었는가?”
이현성은 눈앞의 노인을 보며 당황했다.
왜냐하면 그는 무림의 전설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저, 정말… 도왕 어르신께서 제게 가르침을 주시겠단 말씀이십니까!”
“허허. 아무래도 가주는 너무 바쁘니, 한가한 노부가 왔는데… 나로서는 부족한가?”
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그가 누군가.
하북팽가의 태상가주이자, 십정(十正)의 한 명인 도왕(刀王)이었다.
부족한 것이 아니라 과해도 너무 과했다.
이현성은 팽천악, 군악 형제의 청을 들어준 대가로 가주인 벽력도군의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
물론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가(一家)의 주인, 그것도 오대세가인 하북팽가의 주인이 함부로 움직일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벽력십팔도주(霹靂十八刀主)를 기대했다.
벽력십팔도는 남궁세가의 제왕검대와 비견되는 하북팽가의 호법들이었다.
구성원 전원이 절정고수이며, 수장인 도주(刀主)는 초절정고수로 추정된다. 고작 열여덟 명에 불과하지만 하북팽가의 2할에 가까운 전력이기도 했다.
그런 벽력십팔도주의 가르침이라면 그들 형제와의 비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벽력십팔도주는 물론 벽력도군도 아니고, 도왕이라니.
이현성으로서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어르신!”
도왕 팽진천의 눈이 웃고 있었다.
고작 손자뻘인 이현성의 눈에서 패기와 투기를 엿봤기 때문이다.
‘재밌는 녀석이군. 감히 나를 상대로 호승심을 느낀다?’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림에 재미있는 녀석이 나타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듣기로는 그 실력이 후기지수의 수준이 아니라고 했다.
결정적으로 사천당가에 한 방 먹였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기에 천하의 도왕이 직접 움직인 것이다.
소가주인 팽천악조차 그의 가르침을 받을 기회가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럼 준비하거라.”
“…예?”
“말뿐인 가르침을 원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감사합니다!”
고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금과옥조(金科玉條) 같다.
그렇기에 실력 차이가 많이 나는 경우는 화두 몇 마디 던져주는 것으로 가르침을 끝낸다.
그것만으로도 무척이나 귀하기에 감히 불만을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도왕은 화끈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직접 몸으로 가르침을 주려는 것이다.
‘기대되는군.’
* * *
“웬일이더냐? 그것도 둘이 한 번에?”
반 시진 전, 팽씨 형제는 가주이자 부친은 벽력도군(霹靂刀君) 팽홍원을 만나러 갔다.
소가주인 팽천악은 간혹 찾아오는 일은 있었으나 형제가 이렇게 같이 오는 경우는 없었다.
자신이 불러서 왔던 것을 제외하면 그랬다.
그러다 보니 팽홍원 가주는 의아했다.
그런 그를 보며 팽천악이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소자… 아버님께 청이 있어서 바쁘신 줄 알면서도 찾아왔습니다.”
“청(請)? 그래. 말해보거라.”
팽홍원 가주는 ‘청’이라는 말에 궁금증이 일었다.
아들들이 자신에게 쉽게 청을 하는 성격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이다.
팽천악과 팽군악이 부친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현성이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현성이? 본가에 그런 아이가 있었던가?”
현재 하북팽가에는 성자 돌림이 없었다.
그 말은 본가의 혈족은 아닌, 일반 제자란 뜻이었다.
무림세가는 혈족을 중심으로 세워진 세력이었다.
허나 하북팽가쯤 되는 거대세가라면 혈족 외에도 일반 제자를 받아들인다.
혈족이기에 끈끈한 정이 있으나 동시에 한계가 존재한다.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일반 제자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하급 무사로 그치지만 간혹 당주 혹은 호법까지 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일반 제자의 수도 적지 않은 만큼 가주가 모두의 이름을 알 수는 없었다.
허나 소가주인 팽천악이 언급할 만한 이름이라면 가주인 자신도 들어봤어야 한다.
“본가의 가솔이 아닙니다.”
“그럼?”
“문교교 소저와 함께 온 이현성 대협 아니, 현성이를 말하는 겁니다.”
팽홍원은 당황스러웠다.
내각대학사의 여식과 함께 온 청년은 바로 사천당가의 호법을 쓰러트린 신성이었다.
그런 그를 이름으로 부른다?
외부에서는 하북팽가를 무식하게 힘만 센 투사의 가문이라고 생각한다.
허나 명문은 괜히 명문이 아니었다.
가문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게 부단히 노력한다.
특히 팽천악은 소가주로서, 차기 가주로 유력하였다.
그만큼 다른 가문에 얕보이지 않게 예법을 철저히 가르쳤다.
그런 자신의 장남이 이현성 대협을 이름만으로 부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설명이 좀 부족한 것 같구나.”
“예. 그러니까…….”
부친의 목소리가 가라앉자 팽천악이 조심스럽게 설명을 이었다.
자신들이 그에게 가르침을 청했고, 그는 대신 부친의 가르침을 받고 싶어 한다고.
그제야 팽홍원 가주는 대충이나마 상황을 이해했다.
“그게 전부더냐?”
“그리고… 군악이와 친우지간이 되었습니다.”
“혀, 형님도…….”
거칠 것 없는 두 형제도 부친 앞에서는 어린 자식들일 뿐이었다.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러워했다.
그들의 말에 팽홍원 가주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내각대학사인 문종학 대인과 연을 맺을 수 있는 기회였지만, 동시에 사천당가와 더욱 불편해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두 아들이 이현성과 친우지간, 호형호제한다니…….
허나 이미 저질러버린 상황이었다.
“너무 성급한 행동을 했구나.”
“…죄송합니다. 아버님. 허나 그는 그만한 가치가 아니, 충분히 사귀어볼 만한 사내입니다.”
“…알았다. 생각해보마. 돌아가 보거라.”
부친에게 확답을 받지 못했으나, 축객령이 내려졌기에 더 이상 버틸 수도 없었다.
그렇게 두 형제가 나가자 팽홍원 가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녀석들… 다 컸구나. 그보다 이를 어쩐담?”
자신은 아직 어린 아들들과는 다르다.
자신의 결정이 가문에 어떤 식이든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섣불리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고작 가르침을 주는 것조차도 그랬다.
하물며 이현성은 사천당가와 은원을 맺었다.
자신의 결정에 따라, 앞으로 그들과 더욱 소원해질 수도 있었다.
그에 반해 이현성은 내각대학사와 이어질 좋은 연결고리가 되어줄 수 있었다.
이런 장단점 때문에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팽홍원 가주는 또 다른 손님을 맞이했다.
“가주. 안에 있는가?”
“아버님? 예. 안에 있습니다.”
가주 자리를 물려준 뒤 웬만해서는 거처 밖을 나서지 않는 부친이었다.
후임 가주가 된 자신에게 영향을 주지 않으려는 부친의 배려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런 부친께서 정말 오랜만에 방문하셨기에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팽홍원 가주는 안으로 들어온 부친에게 상석을 내어주었다.
허나 도왕 팽진천은 손을 내저었다.
두 사람은 단순히 부자지간이 아니었다.
하북팽가의 전대 가주와 당대 가주였다.
아무리 부친이라도 가주의 자리를 침범해선 아니 된다.
“바로 갈 것이니 개의치 말게. 가주.”
“예. 아버님. 그런데 어쩐 일이십니까? 부르셨으면 제가 찾아뵈었을 텐데요.”
“아니네. 한가한 내가 오면 그만이지, 바쁜 가주를 왜… 허허. 그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네.”
무림의 거인, 위엄 있는 태상가주 그리고 근엄한 부친.
허나 지금 팽진천의 눈에는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가주의 자리에 오르기 전, 거칠 것 없던 젊은 시절의 그처럼…….
“이현성이란 아이와…….”
* * *
“컥!!”
“그게 단가?”
이현성은 일도(一刀)에 나가떨어졌다.
대단한 도법도 아니고 그냥 단순한 베기였을 뿐이었다.
허나 그 단순한 베기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신공절학보다 강력할 수 있었다.
이현성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
팽진천을 왜 도왕(刀王)이라고 부르는지를.
“끄응…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르신.”
“허허. 역시 젊은이라 좋군. 오게나.”
아무리 이현성이 초절정지경에 한발 걸치고 있다고 한들, 초절정고수보단 못하다.
하물며 화경고수인 도왕을 상대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것은 가르침을 받는 비무이지, 실전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발악할 생각이었다.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서.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