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네놈! 감히……!!”
“애송아. 구룡이라고 치켜세워주니 자신이 대단한 것 같나? 그래봤자 애송이들 중에서 조금 나을 뿐이다. 그리고 죽고 싶다면 덤벼라. 단칼에 죽여주마.”
분노를 주체할 수 없음에도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
가문의 호법인 절강수 갈엽조차 손도 쓰지 못하고 당했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아직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
이현성은 문교교를 부축한 채 밖으로 향했다. 어차피 당천수는 자신에게 덤비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후우. 젠장. 참았어야 했는데… 나답지 않았어.’
얼음보다 차갑고, 쇠보다 단단한 심장을 가진 자가 바로 이현성이었다.
그런 자신답지 않은 행동을 하고 말았다.
가뜩이나 북경에 자신의 이름이 조금씩 퍼지고 있어서 신경 쓰였는데, 무림의 명숙들이 있는 자리에서 자신을 내보였으니… 매우 곤란했다.
그것을 알면서도 참을 수가 없었다.
‘후우. 나는 동생들에게 해주지 못한 것들을 이들 남매에게 대신 보상하려는 걸까?’
회귀 전에는 감정에 휘둘리는 법이 없었다.
딱 한 번.
자유를 얻기 위한 마지막 임무 때를 제외하고는.
지금도 냉철하다.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하고, 버릴 것은 얼마든지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답지 않은 실수를 몇 번이나 저지르고 말았다. 지금처럼 말이다.
회귀 전과 이번 생까지 두 번이나 지켜주지 못한 못난 형이자 오빠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 잠시만 멈춰주십시오. 이 대협.”
“본인에게 책임을 묻고 싶다면 언제든 상대해드리겠소. 허나 지금은 동생이 힘들어하니…….”
“본인은 팽가의 총관인 팽호원이라고 하외다. 이대로 가시면 본인이 가주님께 혼납니다. 부디 화를 푸시고, 본가가 대접할 기회를 주실 수 없겠소?”
“…알겠습니다.”
하북팽가로서는 사천당가도 곤란하지만 내각대학사는 더욱 곤란했다. 그렇기에 총관인 팽호원이 다급히 이현성을 붙잡은 것이다.
이현성의 입장에서는 불편하지만, 더 이상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어서 좋을 것도 없었다.
사천당가에 이어 하북팽가와도 악연을 맺을 순 없었다.
그렇기에 그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폭풍이 가신 후 다들 놀라워했다.
여태껏 알려지지 않았던 신성(新星)의 존재를.
그리고 궁금해졌다.
치욕을 맛본 사천당가의 다음 행보가.
“본…가는 이만 돌아가겠소.”
사천당가 역시 돌아갔다.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기에는 자존심이 너무나 상했기 때문이다.
당천수의 가슴에 한 사람의 이름이 깊이 각인되었다.
우드득.
“이현성… 본가를 그리고 나를 건드린 것을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 * *
“이 대협. 소문 들었습니다. 제게도 가르침을 주십시오.”
하북팽가의 과한 대접에 이현성은 난감하기만 했다.
물론 내각대학사의 귀빈이라는 신분과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무위를 생각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천당가와 악연을 맺은 지금, 모든 것이 다 불편했다.
그때 아주 결정적인 일이 벌어졌다.
“팽 소협.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금의위 분들은 물론, 매형도 이 대협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저 역시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매형이시라면…….”
“북궁세가의 무한 형님이 저희 누이와 혼례를 치를 사이입니다. 대협.”
이현성을 난감하게 한 청년은 바로 팽군악이었다.
하북팽가주인 벽력도군(霹靂刀君)의 셋째로, 무림에선 도협(刀俠)이라 불리는 후기지수였다. 제 형과 누나에게 가려졌으나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인재이기도 했다.
올해 19살인 그는 이현성과 동갑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을 마치 높은 고인(高人) 대하듯 하니 당혹스러웠다.
이현성은 자신을 바라보는 팽군악의 초롱초롱한 눈빛 때문에 쉽게 거절할 수 없었다.
그때 문 밖에서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협. 실례합니다. 저는 팽천악이라고 합니다. 혹시… 제 아우가 이곳에 있습니까?”
“팽군악 소협이라면 이곳에 계십니다.”
문이 열리며 팽군악과 매우 닮은 장한이 들어왔다.
아니, 그가 수 년 후에는 이렇게 성장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팽군악의 형인 도룡(刀龍) 팽천악이었기 때문이다.
“형님… 이곳에는 왜…….”
“이놈아. 대협을 귀찮게 하게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
팽천악의 꾸짖음에 이현성은 내심 안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팽군악의 말에 또다시 당황했다.
“흥. 형님이야말로 저와 같은 생각이시지 않으십니까.”
“뭐, 그야… 이 대협께 가르침을 청하고 싶습니다.”
두 형제의 대화에 이현성은 순간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팽군악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팽천악까지 자신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너무나도 닮았다.
외모뿐만 아니라 호통한 성격까지 꼭 닮아 있었다.
거절하기는 쉽지 않은 청이었다.
다음 대 하북팽가를 이끌 형제였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하는 법.
“…좋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말씀입니까?”
“저 역시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예?”
예상치 못한 조건에 팽가의 두 형제는 어리둥절해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이현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벽력도군 팽 대협의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 * *
“크윽…….”
거구의 청년이 나가떨어졌다.
그는 바로 팽군악이었다.
호기롭게 달려들었다가 십여 합 만에 나가떨어졌다.
그것도 이현성이 봐주었기 때문이지, 아니었다면 일 합에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팽군악의 실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오히려 뛰어나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이현성이 괴물일 뿐이었다.
“강하기만 해선 안 됩니다. 부드러움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만 몸에 익히면 최소 두 배는 강해질 겁니다.”
“가, 감사합니다.”
사실 이런 말을 처음 듣는 것이 아니었다.
가문의 어른들에게도 들은 적이 있었으나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동갑임에도 명숙들과 비견되는 이현성이기에 그 조언이 더욱 와닿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쉽군. 그를 흑룡당 녀석들에게 보여주고 싶을 정도다.’
팽군악은 도법도 도법이지만 기초가 탄탄했다.
무식하다고 할 정도로 훌륭했다.
흑룡당 아니, 흑룡방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이었다.
물론 부족함도 있었다.
강(强)력함과 무거움(重)만 치중하다 보니 도법을 포함해 전반적으로 부드러움이 부족했다.
이 부분만 개선하면 지금과는 다른 도법을 구사하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번에는 제 차례군요.”
조금 전 동생이 나가떨어진 모습을 봤음에도 팽천악은 흥분했다. 정확히는 호승심을 불태웠다.
투사의 가문이라는 하북팽가의 혈족다웠다.
양손에 칼을 쥔 팽천악이 달려들었다.
“하합!!”
팽군악의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도 훌륭했지만 팽천악이 익힌 철혈적성도(鐵血摘星刀) 역시 대단했다.
하북팽가가 자랑하는 도법들다웠다.
“우우. 과연 묵직하군요. 허나…….”
“큭!”
팽천악의 칼을 피할 수 있었으나 이현성은 일부러 받아냈다. 그에게 가르침을 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형만 한 아우 없다고, 그의 도법은 팽군악보다 더 강력했다.
이현성은 그의 칼을 받아낸 뒤 자연스럽게 반격했다.
아무리 팽천악이 구룡에 올랐다고 해도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이현성의 상대는 아니었다.
이현성은 냉철하게 그의 도법을 평가했다.
“동생분의 도법보다 더 부드러움이 필요한 도법인 것 같습니다.”
팽군악에게 부드러움이 부족한 것은 오호단문도 자체가 아닌 본인에게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팽천악은 반대였다. 그가 익힌 철혈적성도는 강력함 속에 부드러움이 담겨야 하는 도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팽군악보다 더 강력함만 담았다.
겉보기에는 아니, 실제로 팽군악보다 더 위력적인 도법을 구사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부드러움을 담지 못하면 철혈적성도를 완성하지 못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로 주저앉을 팽천악이 아니었다.
그의 칼이 다시 허공을 베었다.
칼에서 풍기는 기세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이현성은 조금 전과 달리 이번에는 막아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피하지도 않았다.
유(柔)의 무리를 이용해 팽천악의 칼을 옆으로 흘려버렸다.
무당파의 이유제강(以柔制剛)을 보는 듯할 정도였다.
혈영살객 시절, 신공절학은 익혀보지 못했으나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무학을 접했다.
그 덕분에 혈살공을 혈영공으로 성장시킨 것이기도 했다.
비록 무당파의 태극무학만은 못하지만, 이현성은 나름 유의 무리도 깨달을 수 있었다.
“아직… 끝나지… 헉!”
“이런…….”
구룡(九龍).
괜히 무림 최고의 후기지수라고 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팽천악의 칼은 이현성에 의해 목표를 잃고 옆으로 빠졌다. 허나 그는 힘으로 칼의 움직임(刀路)을 바뀌었다.
신력을 타고난 팽가, 그중에서도 투지와 근성이 남다른 팽천악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이현성은 손을 과하게 쓰고 말았다.
뒤늦게 검로를 비틀었으나 완전히 바꾸지는 못했다.
“팽천악 소협. 괜찮습니까? 미안합니다. 나도 모르게…….”
“으윽… 아닙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이게 대협의 진짜 실력이군요.”
팽천악의 가슴을 베긴 했으나 순간적으로 검로를 비튼 덕분에 살갗만 살짝 베었을 뿐, 생명에는 아무런 지장도 없었다.
그런데 우려한 것과 달리 팽천악 아니, 두 형제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 두 형제였다.
이현성이 강하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허나 방금 전의 일검으로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나이와 상관없이, 그는 이미 대가(大家)의 반열에 올라 있음을…….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아닙니다. 이 정도 상처는 무인에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하하하.”
“그게 아닙니다. 팽천악 소협의 실력을 과소평가했습니다. 설마 흘려버린 칼을 억지로 되돌릴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방심한 점을 사과드린 겁니다.”
팽천악은 깜짝 놀랐다.
상처를 입힌 것이 아닌, 자신을 과소평가했다는 것을 사과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팽천악은 이현성을 진심으로 인정했다.
그는 단순히 무공만 뛰어난 고수가 아니라 무인으로서의 품격까지 갖춘 진정한 대협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마음에 들었다.
‘쩝… 무한 아우도 마음에는 들지만…….’
그는 여동생이 한 명밖에 없는 것이 아쉽기만 했다.
“으음. 그럼 그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대신 나와 친우가 되어주십시오.”
“…예?”
팽천악의 제안은 파격적이었다.
이현성이 대단한 무인인 것은 사실이지만 일개 개인이었다. 그에 반해 팽천악은 오대세가의 하나인 하북팽가의 소가주였다.
유백과 친우가 된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이현성이 섣불리 대답하지 못할 때 또 다른 제안이 들어왔다.
“아니, 나이도 많은 분이 이 대협 불편하게 왜 그러십니까? 아, 그러고 보니 저와 동갑이라고 들었는데… 저와 친우가 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
팽천악에 이어서 팽군악까지 친우지간(親友之間)을 제안했다.
이현성은 두 형제를 번갈아 보며 난감함을 감출 수 없었다.
‘거절할 수도 없고… 그럼 차라리…….’
차라리 모난 자들이라면 모질게 거부하겠지만 마음에 드는 사내들이었기에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