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오라버니는 도대체 저런 계집이 뭐가 좋다는 거야?!”
새치름한 표정의 여인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무리, 정확히는 제갈현지를 바라보며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사천당가의 대공자인 독룡 당천수의 여동생 당령이었다.
당천수가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제갈현지는 지봉이고 자신은 독화(毒花)라고 불리는 것이 제일 못마땅했다.
그녀는 자신이 제갈현지보다 못한 점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대세가의 하나이자 사천의 패주인 사천당가의 여식인 그녀의 콧대가 높은 것은 당연했다.
“그러게 말이야. 그리고 할 줄 아는 게 잔머리 굴리는 것밖에 없는 것이 어찌 지봉이라고 불리는지 모르겠어. 네가 독봉(毒鳳)이라고 불리면 몰라도 말이야.”
“됐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당령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런 그녀의 곁에 있는 여인은 천북운가의 여식, 운채린이었다.
사천당가에 가려졌을 뿐, 사천무림에서 손꼽히는 명문세가였다.
허나 아무리 천북운가가 대단해도 사천의 패주인 사천당가에게 밉보일 수는 없는 법.
그것을 알려주듯 그녀들의 관계 역시 결코 평등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매사에 당령의 비위를 맞추려고 했다.
“그런데 저 계집은 뭐야?”
“글쎄… 나도 처음 보는데?”
당령은 제갈현지 무리 중에서 낯선 여인을 보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외모가 제법 반반한 것이 거슬렸기 때문이다.
그보다 봉황지회에 참석할 정도라면 얼굴이 알려졌을 텐데 낯설어서 이상했다.
“무가 출신은 아닌 것 같지?”
“상가 출신인가??”
무공을 익힌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겉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저들 사이에 있는 여인은 누가 봐도 무가 출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봉황지회가 무림 여협들의 모임이지만 전원이 무공을 익힌 것은 아니었다.
상가 출신도 있고, 무가 출신이라도 여인이라는 이유로 무공을 전수하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인지 당령이 제갈현지의 무리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 그녀의 돌발행동에 운채린은 당황해하며 뒤를 따라갔다.
“…호호호. 그렇군요. 음? 당 동생? 무슨 일이야?”
“못 보던 분들이 계셔서 인사나 할까 하고요. 저는 사천당가에서 온 당령이라고 해요.”
당령의 등장에 팽유화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불편한 기색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사천당가와 하북팽가의 사이가 특별히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좋은 편도 아니었다.
그저 같은 오대세가로서 교분을 유지할 뿐이었다.
사천당가는 하북팽가를 무식하게 힘만 세다고 생각하고, 하북팽가는 사천당가의 오만함을 불쾌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북궁가의 연이라고 해요.”
“…무, 문교교예요.”
문교교는 본능적으로 당령과 엮여서 좋을 것이 없다고 느꼈는지,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허나 그런 모습이 당령에게 확신을 주었다.
그녀가 별 볼일 없는 가문의 여식이라는 확신을.
이를 본 당령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녀의 성격을 아는 팽유화가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말을 꺼내려고 했으나 안타깝게도 당령이 조금 더 빨랐다.
“문 소저는…….”
“문씨 성을 가진 가문을 알아? 처음 들어보는데?”
“글쎄…….”
당령은 흡사 아랫것을 바라보듯 오만한 시선으로 문교교를 내려다봤다.
눈빛뿐만 아니라 말투 역시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문교교를 깎아내림으로써 함께 있는 팽유화와 제갈현지 역시 깎아내리려는 의도였다.
과연 지봉이라 불리는 제갈현지였다.
그녀는 당령의 의도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팽유화에게 전음을 보내 문교교에 대해서 설명하지 못하게 했다.
―언니. 그냥 지켜봐요.
―왜? 저것의 못된 성격을 몰라? 괜히 문 소저가 상처 입으면 어쩌려고?
하지만 제갈현지는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팽유화는 당혹스럽기는 했지만, 그녀의 뜻대로 해주었다. 지봉이라 불리는 그녀라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당령은 더욱 비아냥거리며 문교교를 깎아내렸다.
“봉황지회도 다 되었군. 개나 소나… 아, 실례. 아무나 들이고 말이지.”
“려, 령아…….”
당령의 비아냥거림에 몹시도 당황했는지 운채린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천북운가가 사천의 명가라고 하지만 눈앞의 여인들은 하북팽가, 제갈세가를 대표하는 여인들이었다. 괜히 시비가 붙으면 당령 대신 자신에게 불똥이 튈지도 모른다.
그녀로서는 감당하기 어렵기에 안절부절못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제갈현지와 팽유화가 반응하지 않았다.
이때까지도 당령은 이상한 점을 깨닫지 못했다.
“저, 저는… 이, 이만 돌아가 볼게요.”
“문 소저. 소저께서 그러실 필요 없으세요. 당 소저. 당신 참 무례하시군요.”
당령의 차갑고 오만한 눈빛은 물론, 강압적인 말투에 기가 죽은 문교교가 울먹거렸다.
이를 본 팽유화가 발끈했으나 그녀의 손을 잡아끈 제갈현지 때문에 무산되었다.
대신 문교교와 동행한 북궁연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런 북궁연을 보며 당령은 어이가 없었다.
무림에서 도망쳐 황실에 붙은 북궁세가 따윈 안중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가문인 사천당가가 최고이며, 나머지는 모두 아래라고 보고 있었다.
그런 편협함이 결국 문제를 만들고 말았다.
“무례? 지금 본녀에게 한 말이야?”
“당가가 명문정파라고 들었는데… 제가 잘못 안 건가요?”
당령은 급기야 말까지 내렸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북궁연은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정치를 아는 북궁연이었지만 이런 대우는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녀의 말이 당령의 심기를 긁었다는 것이다.
“네년이 감히 본가를 모욕해?! 황실의 개 따위가!!”
“뭐, 뭐라고?”
결국 당령은 선을 넘어섰다.
그녀가 누구인가. 삼봉오화사미 중 독화였다.
삼봉에 오르지 못한 것이 불쾌하지만, 그녀가 독화라고 불린 것은 사천당가라는 배경 때문만이 아니었다.
가장 까다롭다는 사천당가에서도 인정받은 독의 고수였다.
그런 그녀의 분노에 분위기가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이제 무림을 떠난 가문인 터라 정확한 평가를 받지 못했을 뿐, 북궁연 역시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보다 못한 팽유화가 나섰다.
제갈현지의 말이 있었으나, 봉황지회가 하북팽가에서 개최된 만큼 문제가 생기면 자신의 가문의 이름에 먹칠하게 되기 때문이다.
“당 동생 그만해. 연아. 너도…….”
“언니… 하지만…….”
“팽 언니. 물러나요. 아니면 하북팽가가 본가를 무시하는 것으로 여기겠어요.”
“당령… 너어…….”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가문의 이름까지 거론된 이상 쉽게 풀릴 수가 없었다.
특히 당령의 행동은 하북팽가까지 아래로 보는 듯해서 팽유화까지 자존심 싸움에 끼어들 판이었다.
하북팽가 대 사천당가.
도화 대 독화.
분위기는 점점 가라앉았다.
그때였다.
“무슨 일이더냐! 왜 이리 소란스러워?!”
“아… 숙부님, 시숙. 오셨어요? 그게…….”
그때 몇몇 중년인들이 봉황지회가 열린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하북팽가의 총관은 물론 북궁세가의 장로 등 십대세가 급의 대표들이었다.
봉황지회는 여협들의 모임이었지만, 그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동행한 명숙들끼리도 그들만의 연회가 진행되었다.
그러던 중 하북팽가와 북궁세가의 경사에 대해 언급되었고, 이를 축하해주기 위해 명숙들이 봉황지회의 연회장으로 왔다.
구문제독의 가문과 무림 거대세가의 혼사였으니 좋은 인상을 심어줘서 나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삭막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자 명숙들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묻지 않더냐?”
“그게…….”
“당 소저가 본가를 모욕했습니다. 당숙.”
“뭐라고?!”
북궁세가의 장로이자, 북궁연의 당숙인 북궁성운이 당령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무림을 떠났으나 다시 영광을 되찾은 북궁세가였다.
그런 가문이 모욕당했으니 참을 수가 없었다.
이에 사천당가 대표로 방문한 갈엽 호법이 당령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보시오. 북궁 장로. 애들 싸움에 어른이 끼자는 거요?”
“지금 뭐라고 했소!”
명숙들이 합류하며 상황은 더욱 최악으로 흘러갔다.
그럼에도 당령은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는 당황하긴 했으나, 자신의 가문과 감히 척을 지려는 자는 없을 것이라는 자부심 때문이다.
자칫 피라도 보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진다.
두 가문은 물론 이 자리에 있는 명숙들 그리고 그들의 가문 입장에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잘못 끼어들다가는 일이 꼬일 수도 있기에 적극적으로 관여할 수도 없었다.
“두 분. 왜 이러십니까? 분명 오해가 있을 겁니다. 대화로 푸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마, 맞습니다. 두 분. 진정하십시오.”
하북팽가의 총관이 나서자, 명숙들은 이때다 싶어서 그들을 만류했다.
그들의 만류 때문이 아니더라도 북궁성운 장로와 갈엽 호법은 서로를 노려보기만 할 뿐, 출수(出手)는 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이쯤에서 정리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좋은 자리인 만큼 이만하겠소만… 본가가 어딘지 잊지 마셨으면 좋겠소.”
“이하동문이오.”
이쯤에서 상황이 해결되는가 싶었으나 생각처럼 쉽게 풀릴 수 없었다. 아니, 쉽게 풀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제갈현지가 문교교의 곁으로 다가가서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며 속삭였다.
“문 소저… 괜찮으세요?”
“죄,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니에요. 어찌 이게 문 소저의 잘못인가요? 다만 이 일로 문 대인께서 언짢아하시지 않을까 걱정이에요.”
두 사람은 작게 속삭였으나 이 자리에 있는 자들 중 고수 아닌 자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녀들의 속삭임 역시 다 들을 수 있었다.
특히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는 북궁성운 장로의 얼굴이 굳어져 갔다.
“연아. 문 소저께 무슨 일이 있더냐?”
“그게…….”
당숙의 물음에도 북궁연은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간신히 상황이 진정되어가는데, 이를 설명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녀가 주저하고 있을 때 제갈현지가 나직하게 설명했다.
“무가 출신이 아닌 문 소저께서 이곳에 오신 것이 불편하셨나 봐요. …당 소저께서 말이에요.”
“미친!!”
북궁성운은 자신도 모르게 거친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문교교의 정체를 모르는 사천당가의 갈엽 호법이 북궁세가의 장로인 북궁성운을 매섭게 노려봤다.
고작 정체 모를 계집 때문에 가문의 금지옥엽에게 거친 말을 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북궁 장로!”
“입 다물어! 그리고 당장 문 소저께 사죄드려라!”
“당신 미쳤어?! 어디서 감히……!!”
북궁성운의 거친 언사에 얼굴이 시뻘게진 갈엽 호법이 목소리를 높였다.
허나 북궁성운은 그의 호통 따위,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만큼 당황했기 때문이다.
당연했다. 문교교가 누군가.
황실의 실세 중 실세라는 내각대학사의 여식이었다.
이 일이 그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저 웃고 넘어갈 리가 없었다.
사천당가가 곤란해지는 것 따위는 상관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가문이 곤란해지는 것은 결코 묵과할 수 없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