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설사 이현성의 정체를 알게 된다고 해도 구웅방이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
그때는 몰랐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사실을.
더불어 걱정할 것은 구웅방이 아니라는 것을.
사내의 질투는 여인의 질투보다 지저분하다는 사실을.
그렇게 이현성은 회귀 전에도 인연이 없던 하북팽가로 향하게 되었다.
* * *
“하아. 언 소저가 왜 이렇게 친한 척하나 했더니…….”
제갈현지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지급(至急)으로 날아온 가문의 서신이 그 이유였다.
봉황지회가 마무리되면 진주언가에 다녀오라는 말과 함께 간단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짧은 내용이지만 오성이 뛰어난 그녀가 이해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제야 진주언가의 직계이자, 가주의 조카인 언유진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인데 한숨이더냐?”
“규 할아버지. 봉황지회를 마치면 가문으로 곧장 오지 말고, 진주언가에 들렸다가 오라고 하시네요.”
“가주가 말이더냐? 언가에는 무슨 일로?”
봉황지회의 목적은 젊은 여협들의 교류였지만 그녀들을 호위하기 위해 명숙들이 동행한다. 그러다 보니 봉황지회 기간 동안 명숙들 간의 교류도 이루어졌다.
장강어옹 규염은 배분 상 방문한 명숙들 중에서도 제일 높은 편이었다.
그렇기에 하북팽가의 태상가주를 포함한 몇몇 전대 고수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런 그가 제갈세가에게 내어준 별채로 돌아왔다가 한숨을 쉬는 제갈현지를 발견했다.
규염은 제갈현지의 말을 듣고서 펄쩍 뛰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더냐! 어찌 널 그런 팔푼이에게 시집보낸단 말이더냐!!”
“팔푼이라니요. 언 공자가 팔푼이는 아니에요. 그리고 아직 혼약이 확정된 것도 아니고요.”
이러다가는 일이 커질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제갈현지가 언유광을 두둔하며 흥분한 규염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겸이 녀석은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야?”
“그 일로 백부님도 마음고생이 많으실 테니, 백부님께 엄한 말씀하시면 안 돼요.”
“에잉!”
평소에는 사람 좋다는 소리를 듣는 장강어옹이었지만 한번 화가 나면 무척 무서웠다.
그런 그가 화나 있을 때, 그의 마음을 돌리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제갈현지였다.
다른 때 같았으면 당장 언유광의 멱살을 잡으러 갔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만 지을 뿐,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어찌할 생각이더냐? 설마 그 팔푼이… 아니, 그 녀석에게 시집갈 생각은 아니겠지?”
“우선 아버님의 분부도 있으니 만나는 봐야겠지요. 어쨌든 결정은 제 몫이라고 하셨으니까요.”
혼사는 당사자는 물론 가문에도 매우 큰일이었다.
제갈세가 정도 되는 거대세가라면 본인의 의사는 거의 반영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혼사는 애정이 아닌 이득이 우선시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당사자에게 재량권을 준다는 것은 무척이나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들도 아닌 딸에게 그 정도 권리를 주는 것은 그만큼 믿는다는 의미였다.
“에잉! 마음에 안 들어! 그래도 너라면 알아서 잘하겠지.”
“걱정 마세요. 할아버지. 생각보다 괜찮은 분일지도 모르잖아요.”
사실 언유광의 평판은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나름 괜찮은 편이었다. 구룡에는 들지 못하지만 후기지수 중 한 명이며, 성격이 모나다는 말도 없었다.
게다가 시댁으로서 진주언가는 빠지는 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제갈세가의 금지옥엽이자 지봉이라서 문제인 것이다.
사내로 태어났다면 천하를 호령했을지도 모른다는 평을 받는 제갈현지의 부군으로 그가 적합할지 가늠되지 않았다.
‘날 담을 그릇이 된다면 언 공자의 여인이 되어드리겠어요. 허나 그렇지 않다면…….’
지봉 제갈현지.
그녀는 결코 호락호락한 여인이 아니었다.
허나 부친에게 들은 말이 있는지, 언유광은 한껏 들떠 있었다.
* * *
“그래. 제갈 소저의 반응은 좀 어떻더냐?”
상기된 얼굴의 언유광이 사촌동생 언유진에게 물었다.
사적으로는 사촌지간이지만 공적으로는 가문의 대공자인 언유광이었다.
그런 그가 들뜬 표정으로 묻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친절하게 대해주긴 하지만… 별다른 반응은 없으셔요. 오라버니.”
언유광은 다음 대 가주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만약 지봉 제갈현지가 그의 처가 된다면 거의 확정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녀와 친하게 지내면 분명 자신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언유진은 언유광의 부탁대로 제갈현지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제갈현지는 친절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자신이 미래의 시누이가 될 텐데도 별 반응이 없었다.
“으음… 그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언유진의 대답에 언유광은 매우 실망하는 눈치였다.
언유광은 잔뜩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듣지 못했나? 그래. 그래서일 거야. 그녀만 내 것이 되면… 네놈들이 좌절하는 꼴을 빨리 보고 싶구나.’
비록 권(拳)보다 검(劍)에 흥미를 가졌으나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렇기에 진주언가의 대공자이자, 차기 소가주로 유력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허나 천하는 넓고, 인재는 많았다.
구룡(九龍).
무림 최고의 후기지수들답게 그들은 대단했다.
그들이라면 자신과 교분을 나눌 자격이 있을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만의 생각이었다.
먼저 호감을 표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냉대였다.
그 냉대를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당천수, 양위성… 마지막에 웃는 자는 바로 나 언유광이 될 거라고.’
특히 자신을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비웃은 자들이 있었다.
독룡(毒龍) 당천수, 창룡(槍龍) 양위성.
오대세가의 하나인 사천당가의 대공자와, 오대세가에 근접하는 십대세가 중 신창양가의 소가주였다.
오만하기로 유명한 당천수에게도 화가 나지만, 언유광을 더욱 화나게 만드는 사람은 바로 양위성이었다.
신창양가와 진주언가는 같은 십대세가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신창양가를 더 높이 평가했다.
조부인 권군 언규철의 죽음 때문도 있었으나 그보다 양위성은 구룡인데, 자신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네놈들이 목메는 그녀가 곧 나 언유광의 여인이 될 테니까 말이야! 하하하!’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었다.
많은 후기지수가 제갈현지를 사모하고 있으며, 특히 당천수와 양위성이 그녀를 두고 경쟁하고 있다는 사실이.
하지만 그들은 헛물을 켜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최후의 승자는 자신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네놈들의 일그러질 면상을 꼭 보고야 말겠어.’
* * *
“지아, 넌 어쩜 더 예뻐진 것 같다?”
봉황지회의 중심에는 제갈현지가 있었다.
아무래도 여류 후기지수 중 최고는 삼봉이며, 그녀들 중 유일하게 제갈현지만이 봉황지회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검에 미친 검봉 화소군은 웬만한 일이 아니면 화산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그저 수련만 할 뿐이었다.
의봉 백인혜 역시 다르지 않았다. 성수의가를 찾는 수많은 환자 때문에 외부에 나설 여력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봉황지회가 개최될 때마다 중심에 있는 것은 제갈현지, 그녀일 수밖에 없었다.
“유화 언니가 하실 말씀이 아닌 것 같은데요? 사랑받으신다고 얼굴이 활짝 피셨으면서요.”
“요게 언니를 놀려?”
제갈현지 다음으로 봉황지회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여인은 이번 봉황지회의 개최가문인 하북팽가의 꽃 도화(刀花) 팽유화였다.
오화의 한 명인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강력한 도법을 구사하는 여고수였다.
그러한 반전 매력이 많은 사내들의 마음을 훔쳤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마음을 훔친 자는 따로 있었다.
“형부께서 곧 임관하신다고 들었는데. 혼례는 어떻게 되나요?”
“시숙께서 오신다고 하니 곧 결정나겠지.”
그녀의 방심을 훔친 자는 바로 북궁무한.
북궁세가의 소가주였다.
북궁세가가 무림세가로 있을 때부터 가까웠고, 제독 가문이 된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비슷한 나이인 두 사람이 대면할 기회는 몇 번 있었다.
평소 사내에 관심이 없던 그녀였지만 과묵하고, 사내다운 북궁무한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연상인 그녀는 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북궁무한 역시 매력 넘치는 팽유화에게 빠질 수밖에 없었다.
양가의 입장에서도 두 사람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이번 봉황지회에 북궁세가를 초청한 이유 중 하나가 두 사람의 혼례를 확실하게 결정짓기 위함도 있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북궁연과 세가의 고수들이 하북팽가에 도착했다.
“연아.”
“언니. 오랜만이에요.”
기다렸던 북궁연이 도착했기 때문인지 팽유화의 얼굴이 한껏 밝아졌다.
그녀가 왔다는 것은 곧 혼례에 대한 결정이 난다는 뜻이기도 했다.
“오라버니는 오시지 못하셨어요.”
“알아. 임관준비로 바쁘실 테니까.”
비록 북궁무한이 구문제독의 손자라고는 하나, 얼렁뚱땅 임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은 없었지만, 구문제독은 물론 북궁무한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북궁무한은 정식으로 임관을 준비했다.
그런데 북궁연은 혼자가 아니었다. 이 자리가 봉황지회의 연회장인 만큼 호위병력은 출입할 수 없었다.
즉, 그녀 곁에 있는 인물은 북궁연의 호위를 위해 동행한 사람이 아니란 뜻이었다.
“그런데 이 소저는…….”
“문종학 내각대학사 어른의 따님인 문교교 아가씨예요.”
“문교교입니다. 초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문 아가씨셨군요. 팽가의 팽유화입니다. 잘 오셨어요.”
문신(文臣) 가문의 여식인 문교교로서는 모든 것이 생소하고, 어색할 수 있었다.
이에 이현성이 북궁연에게 그녀를 부탁했다.
북궁연 역시 문교교가 자신에게 의지해서 손해볼 것이 없기에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동행이 있던 것은 북궁연만이 아니었다.
“언니. 저분은…….”
“나와 친한 동생인…….”
“제갈현지라고 해요. 반가워요.”
제갈현지의 등장에 북궁연은 물론 문교교 역시 관심을 보였다.
북궁세가는 더 이상 무림세가가 아니지만 무림에 관심이 아예 없을 수는 없었다.
당연히 지봉 제갈현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허나 문교교는 다른 이유로 관심을 보였다.
“아, 지봉… 처음 뵙네요. 북궁연이라고 합니다.”
“문교교예요. 그런데… 혹시 제갈현도란 분이…….”
“저희 오라버니세요. 혹시 아시는 사이신가요?”
문교교의 입에서 제 오라버니의 이름이 언급되자 제갈현지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무림과 연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문교교가 자신의 오라버니를 알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문교교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으음… 제가 아니라 동생이 안평의 언가 어르신 댁에 갔다가 제갈현도란 분을 뵈었다고 들었어요.”
“…그러셨군요.”
권군 언규철의 고희연에서 제갈현도를 만났던 일이 인상적이었는지, 문태규가 누이인 문교교에게 그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것이다.
별거 아닌 대화였으나 공감대가 형성되자, 그녀들은 순간적으로 가까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그녀들은 대화가 잘 통했다.
그렇게 아름다운 네 여인들 사이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런 그녀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자들이 있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