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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살수-55화 (55/314)

55화.

웬만한 낭인은 가볍게 제압한다는 북방의 군사들이 강한 것은 뛰어난 무공을 전수받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혹독하게 훈련해왔고, 처절한 실전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매일 세 시진의 훈련은 흑룡방이 강해질 기본토대가 되어줄 것이다.

이조차 버텨내지 못하면 아무리 사혼팔도를 전수받는다고 해도 벽을 넘지 못한다.

즉, 강해지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명문이 강한 이유는 뛰어난 무공 때문만이 아니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더욱 혹독하게 훈련하기 때문이지. 한번 지켜보지… 얼마나 이겨낼 수 있는지를…….’

이현성은 알고 있었다.

수백에 달하는 흑룡방도 중 끝까지 버텨낼 자가 많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럼에도 조금은 기대했다.

그 수가 적기는 해도 분명 기대하지 않았던 또 다른 원석들이 발견될 테니까.

봉황지회

“어찌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제갈세가주 제갈인섭의 주도 하에 제갈세가의 중추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가당치도 않은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고작 언유광 따위에게 본가의 금지옥엽을 내어줄 순 없습니다.”

“맞습니다. 구룡(九龍)도 아니고… 어찌…….”

신임 진주언가주인 언중경에게서 한 통의 서신이 날아왔다.

진주언가의 대공자인 언유광과 제갈세가주의 여식, 제갈현지의 혼약에 관해서였다.

전대 가주의 죽음으로 잠잠하던 진주언가였다.

그렇기에 제갈세가 입장에서는 모른 척하고 있었다.

원치 않는 혼약이기 때문이다.

권군(拳君)이 살아 있었다고 해도 내키지 않는데, 하물며 그가 죽은 이상 제갈세가는 진주언가와의 혼약으로 인한 이득이 별로 없었다.

“정식으로 예물이 오간 것도 아니고, 설사 그렇다 해도 상황에 따라서 파혼한다는 것이 꼭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걸리는 것이 있었다.

제갈세가의 장로이자, 가주의 친형. 그리고 제갈세가를 대표하는 고수인 천지신검(天地神劍) 제갈인겸이 진주언가의 전대 가주인 권군 언규철에게 보검을 선물받은 점이었다.

말이 선물이지, 혼약을 위한 뇌물이었다.

이제라도 돌려주면 어떻게든 무마시키겠으나, 하필이면 진주언가의 고희연에서 습격당해 그만 빼앗기고 말았다.

제갈세가로서는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깟 보검… 본가의 힘으로 구하지 못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 구해서 돌려보내는 것은 어떻습니까?”

“상대는 진주언가이네. 자칫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네.”

보검이 흔하다면 어찌 보검이라고 칭하겠는가.

허나 오대세가의 하나인 제갈세가였다.

특히 당대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제갈세가의 힘이라면 보검을 구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다만 다른 보검을 구한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그 일로 진주언가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결국 적을 만드는 꼴이 된다.

“본가는 제갈세가입니다! 어찌 그들의 눈치를 본단 말입니까!”

“누가 그들의 눈치를 본단 말인가! 허나 적을 늘려서 본가에 득이 될 것이 뭐 있겠는가!”

“그렇다고 어찌 공녀(公女)를 보낸단 말입니까.”

장로, 호법들의 설전이 오고 갔다.

혼약을 반대하는 측이 더 많았으나 혼약을 진행해야 한다는 이들도 의외로 적지 않았다.

이 일이 제갈세가의 명예를 더럽힐 수도 있고, 진주언가도 사돈으로서 그리 처지는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양측 모두 제갈세가를 위한 마음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제갈인섭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장로님께선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가주. 본인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소.”

제갈인겸은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제갈인섭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사적으로는 자신의 친형, 공적으로는 가문의 종통이었다. 게다가 가문의 검을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고개를 들지 못하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태상가주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맞습니다. 그분이라면…….”

결국 최후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태상가주 신산(神算) 제갈윤호에게 도움을 청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지자의 가문인 제갈세가의 중추들답지 않은 의견이지만 어쩌겠는가.

그만큼 쉽게 결정지을 수 없는 심각한 문제인 것을.

결국 제갈인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상황입니다. 어찌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버님.”

정중하게 자리에 앉은 제갈인섭이 눈앞의 노인에게 현재의 상황을 상세히 고했다.

노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허허. 가주. 본가의 수장은 내가 아닌 자넬세. 그런데 어찌 나에게 묻는가?”

“가르침을 주십시오. 소자, 가주란 자리가 이리도 무거웠던 날이 없었습니다.”

제갈인섭의 입에서 소자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자 노인 아니, 제갈세가의 태상가주이자 제갈인섭의 부친인 제갈윤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제갈인섭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역시 무림에서 알아주는 지자였지만, 신산이라고 불리는 부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힘이 우선시되는 무림에서 제갈세가가 지금까지 오대세가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판세를 잘 살폈기 때문이다.

물론 드러나지 않은 제갈세가의 힘도 한몫했지만.

“가주. 아니, 섭아.”

“예. 아버님.”

“피할 수 없다면 최상의 타협을 해야 한다. 그것이 본가인 제갈세가 다운 판단이다.”

최상의 타협.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최대한 취하라는 뜻이었다.

제갈현지는 사적으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여식이지만, 공적으로는 세가의 자랑인 천재였다. 비록 여식인 만큼 가문을 이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런 제갈현지를 격 떨어지는 자에게 보내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자신은 물론 가문의 중론이기도 하였다.

“지아를 보내거라.”

“……!!”

제갈윤호의 말에 제갈인섭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어쩔 수 없었지만, 여식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아들을 보며 제갈윤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혼약을 진행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 말씀은…….”

“허허. 그 총명하던 우리 가주가 어디 갔는지 모르겠군. 지아는 슬기로운 아이지. 알아서 잘 처신할 게다.”

“아… 감사합니다. 아버님. 정말 감사합니다!”

제갈윤호는 제갈현지를 진주언가로 보내라고 했다.

그러나 혼약을 치르라는 말은 아니었다.

제 남편 될 자격이 되는지, 그녀 스스로 판단할 기회를 주어서 아니라면 스스로 물러나게 만들라는 말이었다.

부친의 말뜻을 깨달은 제갈인섭은 그제야 고민이 풀렸는지 안도할 수 있었다.

“그보다, 지아가 지금 팽가에 있던가?”

“예. 봉황지회(鳳凰之會) 때문에 팽가로 향했으니 며칠 안에 도착할 겁니다.”

예로부터 오대세가의 유대감은 끈끈하기로 유명했다.

기득권을 고수하기 위함이기도 했으나, 다섯 가문의 영역이 다르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교류를 통해 친분을 쌓았다.

특히 여인들은 특별한 이유 없이 가문을 벗어날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교류의 날은 그녀들에게 매우 중요한 시간이었다.

그런 교류가 커지면서 오대세가 외 여협들까지 참여했고, 봉황지회라는 교류회가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중심은 오대세가이기에 매년 다섯 가문이 돌아가면서 봉황지회를 개최했다.

올해는 하북팽가에서 열렸다.

“지아는 누구랑 같이 갔느냐?”

“인성 아우와 규 숙부께서 동행하셨습니다.”

제갈인섭의 대답에 제갈윤호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규염 그 친구도 말인가? 어허. 어째 요즘 안 보이기에 장강으로 돌아갔나 했더니… 그랬군. 그럼 따로 사람을 보낼 필요가 없겠어.”

“예. 인성 아우도 있고, 규 숙부님께서도 계시니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요.”

제갈인성은 가주인 제갈인섭의 사촌동생인 절정고수로, 오대세가의 장로급에서는 하위에 속하지만 친화력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다 보니 외부 임무를 맡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보다는 규염이라는 노고수 때문에 제갈현지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장강어옹(長江漁翁) 규염.

장강에서 활동하는 전대 노고수로, 정사지간(正邪之間)에 속하지만 기본적으로 협을 아는 인물이었다.

그러다 보니 정파의 전대 고수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특히 제갈세가의 태상가주인 제갈윤호와 죽이 잘 맞는 편이었다.

그는 근래 제갈세가에서 빈객으로 지내고 있었다.

제갈윤호의 손녀인 제갈현지 때문이다.

그녀를 친손녀처럼 아끼는 규염이 함께라면 안위는 보장된 셈이었다.

“봉황지회를 마치면 진주언가에 다녀오라고 서신을 보내거라.”

“예. 아버님.”

고민거리를 해결한 제갈인섭은 마음 편히 돌아갈 수 있었다.

아들 제갈인섭이 물러난 뒤 제갈윤호는 생각에 잠겼다.

‘고얀놈… 감히 본가를 상대로 잔머리를 굴려? 왜 본가가 천하제일지(天下第一智)라고 불리는지 깨닫게 해주마!’

* * *

“하북…팽가 말입니까?”

당황한 이현성에게 문종학이 미안해하며 대답했다.

“일전에도 이런 청을 했기에 송구스럽소만… 달리 청할 분이 없어서… 어려우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아…닙니다. 다녀오지요. 교교의 안위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며칠 전까지 황도가 시끌시끌했다.

흑도방파 간의 분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다행히 일반백성들까지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었지만, 제법 큰 소란이 나서 금의위까지 출동할 정도였다.

이를 무마시키는 과정에서 흑룡방도 몇몇이 끌려 들어갔고, 적지 않은 뒷돈을 찔러줘야 했다.

그나마 평소 기름칠해둔 덕분에 그 정도로 그친 것이지, 아니었다면 당주급까지 잡혀갔을지도 모른다.

이제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일이 생겨버렸다.

“고맙소. 이 대협. 교아가 봉황지회에 꼭 참석하고 싶다 하는데 홀로 보낼 수가 없지 않소.”

“그렇지요. 아무리 북궁 소저가 함께 간다고 해도, 그녀만 믿고 맡길 순 없지요.”

이번 봉황지회의 개최가문인 하북팽가는 북경의 몇몇 가문에도 초청장을 보냈다. 그중에는 구문제독의 가문인 북궁세가와 내각대학사의 문가장도 있었다.

당연히 초청장의 주인공은 북궁연과 문교교였다.

북궁세가와 하북팽가는 오래전부터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북궁세가는 이제 무림이 아닌 무장의 가문이 되었지만, 그 인연은 끊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견고하게 연을 이어갔다.

북궁세가가 무장의 가문이 될 수 있게 다리를 놓아준 가문이 하북팽가였기 때문이다.

그런 북궁세가만 봉황지회에 초청하는 것은 모양새가 나지 않아서 다른 가문도 초청한 점이 없지 않았다.

“천진까지는 4일, 넉넉잡아도 5~6일 이내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이오. 지난번처럼 표국에 의뢰해뒀으니 교아를 부탁하오.”

문종학의 청이라서 수락하기는 했으나 이현성으로서는 난감할 따름이었다.

하북팽가의 본가가 있는 곳은 천진.

그렇다. 얼마 전 흑룡방과 싸운 구웅방의 권역이었다.

물론 구웅방은 흑룡방주의 정체가 이현성임을 모른다.

게다가 아무리 구웅방이 막강해도 오대세가의 하나인 하북팽가와 비교할 순 없었다.

그런 하북팽가에서 열린 봉황지회에는 수많은 무림세가나 대문파의 여협들이 모이고, 그녀들을 호위할 고수들이 득실거릴 것이다.

귀환살수

— 문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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