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흔들리는 흑룡방
“지금도 그놈만 생각하면 이가 갈립니다. 대방주님.”
황도인 북경, 하북의 성도인 석가장과 함께 하북성 3대 도시인 천진.
3대 황제 영락제가 연왕시절, 정변을 일으키기 위해 지나간 나루라고 해서 천진(天津)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런 천진은 이미 원 황실 때부터 무역과 상업이 성한 곳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권이 컸기에 노리는 자들 또한 많았다.
“대방주는 무슨… 대형이라고 부르게 아우. 그리고 걱정 말게. 아우의 빚은 이 대형이 대신 갚아줌세.”
“감사합니다! 대형!”
천진은 오대세가의 하나인 하북팽가의 본가가 있는 지역이다.
선천적으로 기골이 장대하고, 신력을 타고난 팽가의 자손들은 호협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하북팽가와 같은 거대한 가문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재정이 필요한 만큼 그들 역시 천진의 여러 이권에 관여했다.
하지만 협사의 가문답게 검은 돈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눈먼 돈을 차지한 곳은 따로 있었다.
오웅방(五雄幇) 아니, 이제는 구웅방(九雄幇)이라고 불리는 흑도방파였다.
과거에는 천진의 흑도를 지배하는 세력이 자주 바뀌었다. 허나 십수 년 전부터는 바뀌지 않았다.
바로 현(現) 구웅방주가 의제 몇을 이끌고 천진에 나타난 이후였다.
피비린내가 나는 긴 싸움 끝에 천진 흑도는 하나의 방파 아래 정리되었다.
다섯 영웅의 방파라고 해서 오웅방이라고 지었다.
그들은 천진 제일의 흑도방파가 되었음에도 하북팽가와 마찰을 피하는 현명함까지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 흑룡방주란 애송이가 그렇게 강하다고?”
“예. 그놈에게 당한 어깨가 아직도 쑤십니다. 무, 물론 대형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요.”
비록 오웅방은 흑도방파라고 하지만 이미 흑도 수준을 넘어서 웬만한 사파의 방파에 비견해도 될 정도로 커졌다.
오웅방의 대방주에게는 오랜 꿈이 있었다.
북경과 석가장의 흑도를 굴복시켜서 하북제일의 흑도방파를 세우는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북경과 석가장의 흑도방파들 역시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과의 싸움이 쉽지 않으며, 이긴다고 해도 상처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를 노린 승냥이들을 생각하면 간단히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러던 차에 예상치 못한 기회가 생겼다. 막강한 배경을 두고 있던 북경 흑도 사대세력이 몰락하고 말았다.
오웅방을 포함한 하북성의 몇몇 굵직한 흑도방파들이 서로 눈치를 보고 있을 때였다.
흑룡방이란 듣도 보도 못한 방파가 북경 흑도를 장악한 것이다.
‘북경을 장악한 놈이니 한 칼하는 것은 당연하겠지. 그런데 머저리 아니야?’
천진에 흐르는 검은 돈이 제법 되지만 황도인 북경만은 못하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북경을 장악한 흑룡방이 알짜배기 조직들을 북경 밖으로 퇴출시켜버렸다.
‘위선적인 새끼… 정파출신인가? 그런다고 달라지는 줄 알아? 그래봤자 흑도 바닥에 온 놈이.’
흑룡방주의 방침에 따라서 흑화회 등 여럿 흑도조직이 북경에서 쫓겨났다. 하나같이 돈은 되지만 그만큼 인륜에 저해되는 사업을 하는 흑도조직들이었다.
오웅방의 대방주는 그들을 손쉽게 집어삼켰다.
덕분에 오웅방은 더욱 규모가 커졌고, 구웅방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보다 어쩌나… 이 녀석들을 모두 끌고 북경에 들어갈 수는 없는데.’
다른 현이라면 관리들에게 뒷돈을 주고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황도인 북경은 달랐다. 황도를 수호하는 구문제독부에는 뒷돈이 통하지 않는다.
어설픈 수를 쓰다가는 구문제독부의 정예들이 오웅방을 쑥대밭으로 만들지도 모른다.
아무리 구웅방이 강해도 황실의 강군인 구문제독부와 일전을 벌일 수는 없었다.
“아우. 북경에 잘 아는 관리 좀 있는가? 북경에 들어가려면 도움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관리 새끼들의 목이 날아가서… 아! 장 당주 아니, 장 부방주라면 아는 관리가 좀 있을 겁니다.”
“장 아우가? 오호? 나 좀 보자고 하게.”
“예. 대형.”
대방주는 북경에서 쫓겨난 흑화회주와 극락당주 등을 구웅방의 부방주로 삼았다. 그들의 사업수단이 구웅방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구웅방의 대방주는 무위뿐만 아니라 사람을 다룰 줄 아는 자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제 사람을 이용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있었다.
“이거… 잘하면 쉽게 처리할 수도 있겠는데?”
* * *
“재정 상태가 좋지 않단 말인가? 모 당주?”
늦은 시각, 이현성은 흑룡방을 찾았다.
아무래도 내각대학사의 빈객이라는 신분을 숨겨야 하다 보니 흑룡방에 출입하는 것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가 신분의 노출을 꺼린다는 것을 당주들 역시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에, 회의는 대체로 늦은 시각에 진행되었다.
“삼당(三堂)에서 벌어들이는 재화가 적지 않으나 소모되는 비용 역시 적지 않지 않습니다, 방주님.”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게나.”
이현성의 물음에 흑룡방의 안살림을 맡고 있는 백룡당주 모유환이 설명을 시작했다.
“방주님의 방침에 따라 본방은 다른 흑도방파와는 차별화(?)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본방이 흑도임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원활한 방파 운영을 위해 관리들에게 기름칠은 필수적입니다.”
“본 방주 역시 인정한 바네. 계속하게.”
관리들에게 뇌물을 줘야 한다는 것이 마땅치는 않았다.
허나 관리들이 흑도를 흔들기 시작하면 여간 골치 아픈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이현성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물론 궁지에 물린 쥐는 고양이도 무는 법인만큼 관리들 역시 과도한 뇌물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허나 기름칠 할 데가 한두 곳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수입의 상당 부분이 뇌물로 소모된다.
“그리고 방주님의 방침에 따라서 돈이 되는 아니, 비인간적인 사업 등을 금하셨기에 수입에 한계가 뚜렷합니다. 게다가 삼당의 운영 역시…….”
“그만. 무슨 말인지 알겠네. 모 당주. 그대의 생각에는 민초들의 고혈을 쥐어짜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북경 흑도를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흑룡방이다.
그런 그들이 긁어모으는 재화는 상상을 초월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허나 실상은 조금 다르다.
흑룡방주의 방침은 너무 흑도(黑道)스럽지 않았다.
인신매매는 물론 마약유통, 염왕채(고리대금업)운영 등 알짜배기라고 할 수 있는 사업은 비인간적이란 명목 하에 금했다.
그러다 보니 전장을 맡고 있는 금룡당의 수입이 높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물며 보호비를 최소한으로 규정한 만큼 시전관리를 맡은 청룡당의 수입은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그나마 수입을 창출하는 쪽은 도박장들을 맡고 있는 적룡당이었다.
다만 도박장의 매출을 높이기 위해서는 돈을 잃은 자들에게 돈을 빌려줘서, 계속 도박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그런데 이현성의 명령에 의해 전장에서 염왕채를 운영하지 못하게 했다. 자금융통이 원활하지 않아서 종래에는 도박장 운영이 원활해지지 않았다.
물론 염왕채 운영만 금한 것이지, 자금융통 자체를 금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고리(高利)가 아니며 자금융통 상한선을 정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건 아니지만… 재정상의 문제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이대로라면 본방을 우습게 보는 자들이 나올 겁니다.”
“저희의 위신에도…….”
모유환은 물론 삼당주 역시 이현성의 운영방침에 불만이 있었다.
당주들 중 유일하게 흑룡당주만이 침묵할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북경 흑도제일의 방파임에도 불구하고 벌어들이는 재화가 예전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대답을 들은 이현성이 차가운 조소(嘲笑)를 지었다.
“재밌군. 역시 쓰레기는 쓰레기인가?”
“헉!”
“바, 방주님!”
너무나도 지독한 살기에 오대당주는 신음을 흘렸다.
이현성의 살기는 격이 달랐기 때문이다.
모유환을 제외한 네 당주들은 무공을 익혔음에도 도저히 그의 살기를 감당할 수 없었다.
혈영살객 시절에 비해 손에 피를 덜 묻혔다고는 하지만 이현성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 가공한 살기에, 절정에도 오르지 못한 당주들은 다시 한번 눈앞의 사내가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검 한자루로 북경 흑도를 장악한 고수, 흑룡방주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언제까지 쓰레기로 살 생각이지? 고작 흑도라는 작은 물에 만족할 생각인가?”
흑룡방을 세우면서 생각했던 고민거리가 있었다.
과연 흑도방파로 자신이 원하는 수준만큼 힘을 키울 수 있을까?
흑도의 가능성을 보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이대로라면 기대한 수준에 도달할 수 없었다.
물론 자금을 확보차원으로 운영한다면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현성은 그런 목적만을 위해서 이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흑도라는 진흙 속에 숨겨진 원석을 꺼내 자신의 보석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묵장진을 포함한 당주들에게서 그 희망을 보았다.
하지만 오늘 그들의 모습을 보고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주군…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허나 저희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바, 방주님! 기회를 주십시오!”
“기회를…….”
이현성의 실망감이 깃든 음성에 묵장진이 부복하며 기회를 청했다.
그들 중 유일하게 이현성의 뜻을 거스르지 않은 묵장진이었다. 그럼에도 죄를 인정했다.
지적하지는 않았으나 흑룡당이 생각보다 자신의 가르침을 잘 따라오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녹슨 칼로 남을 수도 있었다.
이현성에게 흑룡당을 부여받은 묵장진으로서는 자신의 잘못을 통감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 묵장진의 모습을 본 나머지 당주들 역시 따라서 부복했다.
그리고 다시금 깨달았다.
우습게 본 것은 남들이 아닌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그때였다.
“큭!”
“으윽!”
“흠.”
번쩍이는 순간 다섯 당주의 입에서 또다시 신음이 터져나왔다.
어느새 이현성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그와 동시에 자신들의 어깨가 붉게 변해 있었다.
“이번에는 경고뿐이지만 내게 두 번의 기회를 바라지 마라. … 너희들의 생각대로 본방은 흑도다. 내 뜻을 꺾고 싶다면 날 꺾어라. 아니면 내 명을 따라라. 아니면 다음에는 목이 떨어질 것이다.”
“존명!”
“바, 방주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방주님.”
모유환을 제외하고, 당주들은 최소 일류고수들이었다.
그런 자신들이 인지하기도 전에 어깨를 베였다.
그것도 살갗만 베어서 고통만 주었다.
더 놀라운 점은 한사람이 아닌 다섯을 동시에, 그것도 동일한 상처를 주었다는 점이다.
흑룡방주는 그가 자신들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고수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좀 정신이 바짝 들었겠지.’
어차피 한 번쯤은 이런 날이 올 줄 예상했다.
그렇기에 이현성은 실력을 조금 더 드러냈다.
사전에 어설픈 반항을 눌러놓기 위함이었다.
‘기회는 주지만 더 이상 갱생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면 흑룡방을 포기하자. 단, 흑룡당 하나만은 건져야 해.’
비록 흑룡방이 흑도방파이지만, 무림방파로 성장시킬 생각도 가지고 있던 그였다. 하지만 그들이 쓰레기 근성을 버리지 못하면 과감하게 포기할 생각도 있었다.
허나 들인 공이 있는데, 다 포기할 수는 없었다.
무력대인 흑룡당이라도 건져야 한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