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 * *
“일점혈(一點血)!”
검을 쥔 순간 이미 허공을 베었다. 쾌검으로 유명한 점창파의 사일검법도 이 정도는 아닐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난 극쾌검이었다.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 속에 담긴 위력은 더 이상 검술로 고민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이현성의 얼굴에 만족감이 드러났다.
“이런 쾌검이 있을 줄이야. 정말 대단해.”
그간 익히고 있던 일점홍이나 월광검법도 빠르지만, 일점혈은 비교 자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일점홍을 익히면서 아쉬웠던 점이 일점혈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이현성에게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첫 번째 초식이 이 정도인데, 다른 초식들은 얼마나 대단하려나?”
부서진 검파의 잔해에서 발견된 암천살무는 대단한 절학이었다.
현재 유일하게 익힌 일초식인 일점혈을 통해서 이미 암천살무의 위대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초절정지경에 올랐다면 다른 초식들도 익힐 수 있었을 텐데, 아직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덕분에 더욱 초절정지경에 오르고 싶어졌다.
“한번 갔던 길이지만, 역시 만만치 않구나.”
분명 회귀 전에 초절정지경에 올랐다. 그때의 기억은 분명 머릿속에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에 있는 것과 몸이 익히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특히 이현성의 경우 두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으로 인해 틈이 존재했다. 이 괴리감 때문에 경지가 높아질수록 방해가 되었다.
“하긴 쉬울 리가 없지. 괜히 초절정고수를 백대고수라고 칭하는 것이 아니니까.”
지금까지의 괴리감으로 인해 생긴 방해는 노력으로 채웠다. 될 때까지 검을 휘둘렀다. 몸이 머릿속의 깨달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지금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한번은 넘어야 하는 산이었다.
게다가 암천살무라는 절대신공을 익힐 기회가 왔다. 암천살무를 익히며 부족함을 채워나갈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검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참, 흑룡당은 어떻게 하지?”
그는 이제 일개 살수(무인)가 아니었다. 비록 흑도방파라고 하지만 한 조직의 수장이었다. 때문에 자신의 무위만 신경 쓸 수는 없었다.
흑룡당은 흑룡방도 중에서 실력과 자질 등을 고려해서 모아둔 조직이었다. 다른 사당(四堂)과 달리 흑룡방을 해체해야 한다고 해도 끝까지 거둘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들의 출신이 제각기 다르다는 점이었다. 출신이 다르다는 말은 곧 익히고 있는 무공들 역시 제각기 다르다는 뜻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익히고 있는 무공들이 다른 만큼 수련을 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쩐다? 이참에 그들에게 새로운 무공을 가르쳐야 하나?”
그들은 현재의 경지만 아니라 익히고 있는 무공 수준도 그리 높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했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곤 이렇다고 할 배경이 없기에 흑도에 흘러들어 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껏해야 이삼류 무공을 익혔을 테고, 운이 좋아야 일류무공을 접했을 것이다.
기존의 무공을 버리고 새로운 무공을 익히는 것은 어려우나, 이 상태라면 미래를 위해서라도 새로운 무공을 익히는 것이 낫다.
기왕이면 이를 통일할 필요성도 있었다.
자신이 직접 일일이 가르친다면 모르겠지만, 그들을 가르치는 것은 흑룡당주인 묵장진의 몫이었다.
그의 경지도 낮지는 않으나 익히지도 않은 무공에 대한 조언은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통일된 무공을 가르치는 것이 낫다.
“역시 같은 무공을 가르쳐야 할 것 같은데…….”
또 다른 문제는 그들에게 뭘 가르쳐야 되는가였다.
익히지는 않았으나 알고 있는 무공은 제법 있었다. 혈영살객으로 활동하면서 얻은 전리품이었다.
익히지 않았다고 수준이 떨어지는 무공들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익히고 있는 무공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에 포기했을 뿐이었다.
어차피 흑룡당에게 전수할 무공은 신공절학이 아니었다.
제법 나이가 있는 그들에게 고차원의 무공을 전수한다고 해도 익힐 수 없을 테니까. 이현성은 그런 점까지 고려해야 한다.
“머리 좀 아프겠지만, 이것도 공부가 되겠지.”
* * *
“헉헉…헉…….”
여기저기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숨소리만 거친 것이 아니었다. 눈동자 역시 풀려 있었다.
“고작 이거 했다고 지친 거냐!!”
“아…닙니다!”
입은 아니라고 했으나 이미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런 그들을 못마땅하게 보는 자가 있었다.
묵장진, 흑룡당주였다.
그는 휘하 흑룡당의 무인들을 혹독하게 가르치고 있었다. 녹슨 칼은 필요없다는 이현성의 명령 때문이다.
흑룡당의 무인들은 하나같이 최소 이류무인 수준은 되지만, 묵장진은 과감하게 기초부터 다시 가르치고 있었다.
다들 흑도 생활로 닳고 닳았기 한가닥씩 하지만 반대로 몸에 너무 배어 있었다.
묵장진은 그들의 습관부터 고치기 위해서 기초부터 다시 가르치고 있었다.
흑룡당의 무인들이라고 불만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감히 내색하지는 못했다.
당주인 묵장진이 자신들과 같이 땀을 흘리며 수련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될 것 같은데… 뭘 가르쳐야 할까.’
이현성이 하던 고민을 그 역시 하고 있었다. 게다가 묵장진은 이현성만큼 수준에 오른 것도 아니기에 모르는 무공을 가르치는 것도 어렵다.
그런 그의 고민을 아는지 마침 이현성이 다가왔다.
“모두 수고가 많군.”
“모두 멈춰!”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달리고 있던 흑룡당은 묵장진의 명령에 제자리에 멈추었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무척이나 기뻐 보였다.
이현성은 그들을 힐끔 보곤 묵장진에게 말했다.
“오늘 수련은 이쯤하고, 묵 당주는 날 따라오게.”
“존명!”
이현성의 명령대로 묵장진은 흑룡당을 해산시키고, 그의 뒤를 따랐다.
방주의 거처로 온 묵장진은 이현성의 지시를 기다렸다. 그런 그를 보며 이현성은 무척이나 흡족했다. 허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흑룡당의 수련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예. 주군. 방만한 정신과 나태함을 고치기 위해서 기초훈련을 진행했습니다.”
“그럼 슬슬 본격적인 수련에 들어가야겠군.”
“예. 주군.”
이현성은 묵장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직하게 말했다.
“본격적인 무공수련이 시작될 텐데, 어찌할 생각인가?”
“본가의 도법을 가르칠 생각입니다.”
그의 대답에 이현성은 살짝 놀랐다. 가문의 무공을 타인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아무리 자신이 잘 가르치라고 했어도.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묵장진으로서는 그 외에 떠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이현성은 서책 한 권을 꺼냈다.
“묵 당주가 그렇게까지 희생할 필요는 없네. 우선 이걸 가르치게.”
“무공…비급입니까?”
주군께서 자신의 고민을 알았다는 생각에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이현성이 내민 비급은 고민의 결실이었다. 기왕 가르치는 김에 제대로 된 무공을 가르치자는 생각에 고생을 했다.
자신이 아는 무공을 하나 전수하는 것은 쉽지만, 그렇게 해선 흑룡당의 현 수준이 너무 낮았다.
그렇기에 기존의 무공을 살짝(?) 손을 댔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사혼팔도(死魂八刀)였다.
“심법의 경우는 결정을 하지 못했기에 도법만 준비했네.”
흑룡당 안에는 다른 무기를 사용하는 자들도 있으나 과감하게 칼로 통일시킬 생각이었다.
칼(刀)이 비교적 익히기 쉽기 때문도 있지만, 흑룡당 무인들 대부분이 도법을 익히고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게다가 대부분 이류를 벗어나지 못한 만큼 쉽지는 않겠지만 노력한다면 무기를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고 판단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사혼도법이란 도법을 익히기 쉽게 변형했네. 위력은 다소 약해졌지만, 대신 노력만 한다면 흑룡당도 충분히 익힐 수 있을 것이네.”
“무조건 익히게 만들겠습니다.”
원형인 사혼도법의 경우는 사파계열의 절정도법이었다. 그만큼 위력적이지만, 익히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일류에 오른 고수도 거의 없는 흑룡당에게 사혼도법을 전수해봤자 익히기가 어렵다.
그렇기에 몇 가지 초식은 과감하게 없애고, 몇 가지 초식은 새롭게 조합해서 여덟 초식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탄생한 도법이 바로 사혼팔도였다. 이제 절정도법이라 부를 순 없으나 충분히 일류도법은 되었다.
현재 흑룡당의 수준을 생각하면 사혼팔도만 해도 과분하다고 할 수 있었다.
“묵 당주만 믿지. 사혼팔도를 능숙하게 펼칠 수 있다면 다른 무공도 전수할 생각이니, 고생 좀 하게나.”
“주군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자신의 믿음에 부응하겠다는 묵장진의 마음이 그의 눈빛을 통해 전해졌다. 그로 인해 이현성은 마음이 든든했다.
‘다른 당주들도 이렇다면 좋겠지만… 차차 좋아지겠지.’
흑룡방도는 전부 힘으로 굴복시킨 자들이었다. 그렇기에 진실한 충심을 바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한 명, 묵장진이 진심으로 따라준다는 것에 위안을 삼을 뿐이었다.
최소한 오대 당주의 충성만 확실하게 끌어낼 수 있었다면 이현성은 흑룡방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후… 쾌활림은 어쩌나…….’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은 그였다.
그 시각, 흑룡방의 존재를 미심쩍게 보는 자가 있었다.
* * *
“흑룡방이라… 묘하군.”
수 년 간 굳건해져 있던 균형이 몇 달 사이에 무너졌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자리를 새로운 흑도방파가 차지했다. 물론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달이 차면 기울 듯 영원한 권력은 없었다.
괜히 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이란 말이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하물며 흑도의 형세는 언제 바뀌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 상황이 너무 절묘해서 더욱 의심이 갔다.
“고작 흑도방파 따위지만… 신경이 쓰인단 말이야.”
북경 흑도는 황도 관리들의 용돈벌이 장소다. 그렇기에 뇌물만 잘 바친다면 신경 쓸 것이 없었다. 그런데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고작해야 흑도 나부랭이였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지울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분명 황상께서 손을 쓰신 것은 아닌 것 같은데… 한번 건드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그는 ‘흑룡방의 존재가 황제의 비수가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생각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황상께서 고작 흑도를 신경 쓰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냥 지나가기에는 찝찝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게 있느냐.”
“예. 태감 어른.”
황실에 피바람이 불었으나 사람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었다.
특히 거세를 통해 남성성을 잃은 환관들의 권력과 재력에 대한 탐욕은 보통이 아니었다. 태감 몇이 형장의 이슬이 된 지금도 탐욕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적당한 흑도방파를 움직여서 흑룡방을 건드려봐라.”
“존명!”
명령을 받은 수하가 떠나자 태감은 입맛을 다셨다.
“동창만 예전 같았어도 이런 귀찮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말이야.”
제독동창이 자신들 십이태감에게 협조적이었다면 좋을 텐데, 그는 오히려 자신들을 적대시 했다.
게다가 태태감의 사람인 좌첩형까지 잘려나가면서 동창에 대한 간섭력이 더욱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해서 태감들의 수족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늙은 생강이 맵다고 그들은 나름의 수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전의 사라진 수하 역시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태태감 어른께서 제독동창 그자를 왜 그냥 놔두시는 건지.”
아무리 제독동창이 잘났다고 해도 태태감의 권위를 넘어설 순 없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환관 서열 1위는 사례감장인태감(司禮監掌印太監). 즉, 태태감이었다.
괜히 황실의 진정한 실력자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제독동창 그자도, 큰코다칠 날이 멀지 않았어. 어른께서 다시 움직이시는 날에는…….”
그는 아직도 몰랐다.
자신의 작은 탐욕이 스스로를 조이는 일이 된다는 사실을.
태태감이 몸을 숙인 것은 그만큼 이유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