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진주언가의 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가주가 있으니 무슨 문제요?”
“맞네. 하지만…….”
소가주인 언중경은 뛰어난 고수이며, 가주로서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권군 언규철의 그림자가 너무 컸다. 무림 백대고수란 자리는 그런 자리였다.
그렇기에 원로들과 장로들은 안타까워했다. 그때 침묵하고 있던 언중경이 입을 열었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지금 이런 말을 드리기 뭐하지만… 얼마 전,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서, 설마……!”
“예. 벽을 깼습니다.”
“오! 하늘이시여!!”
부친의 죽음이 진주언가에 어떤 영향을 끼칠 줄 아는데도 일을 저질렀다.
그건 자신이 초절정고수가 되었기에 가능했다. 그걸 알려주듯 그의 주먹에 강렬한 빛이 유형화되어 있었다.
“진정 하늘이 본가를 지켜주는구나!”
“소가주 아니, 가주. 형님 대신 본가를 잘 이끌어주게나.”
권군의 권강(拳罡)만 못하지만 분명 권강이었다. 이로써 그의 실력을 증명한 셈이었다.
신임 가주로서 자리 잡는 것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석대환 네놈에게 놀아나는 것은 이번뿐이다.’
석가장주인 석대환은 하북성에 혈천의 씨앗을 심는 임무를 수행하는데, 방해가 되는 언규철을 제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언중경의 야심을 눈치챘다.
그가 언젠가 사고를 크게 칠 것을 예측하고, 천년설삼을 선물했다. 그가 강해져야 사고를 칠 테니까.
언규철이 벽을 깨는데, 천년설삼이 큰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었다.
‘분명 노리는 것이 있을 텐데… 설마 그 검 때문은 아니겠지?’
석대환은 언중경에게 직접 혼원신검을 요구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천하의 석가장주가 원하는 검이었다. 언중경이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가주가 될 수 있게 도움을 주겠다는 식으로 충동질을 했을 뿐이었다. 너무도 큰 유혹을 떨칠 수 없었던 언중경은 몇몇이 은밀하게 출입할 수 있게 손을 썼다. 덕분에 부친을 죽기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예상치 못한 승사검을 보냈을 때,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뭐기에.’
제갈인겸이 습격당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의아했다. 부친을 제거하기에도 버거웠을 텐데, 제갈인겸까지 습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제갈인겸이 은밀하게 자신을 찾아와서 선물 받은 보검을 잃어버렸다고 사과를 했다.
그때 깨달았다. 석대환의 원래 노림수가 어쩌면 그 검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실제로 석대환은 혼원신검을 원했다. 하지만 동시에 언규철의 죽음 역시 원했다.
그렇기에 이번 일을 유도했던 것이다.
흡정혈왕으로서 혼원신공을 원했듯, 혈천의 호법으로서 그의 죽음이 필요했다. 이로써 황실의 끈을 잃은 실수를 조금은 만회한 셈이었다.
그야말로 석대환으로서는 일석이조였던 것이다.
‘뭐 상관없지. 나 역시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말이야.’
자신이 가주에 오르게 되었다. 게다가 선물한 보검을 잃은 제갈인겸에게 마음의 빚을 지게 했다.
이로써 제갈세가와의 혈맹은 수월해졌다. 언중경으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었다. 허나 세상일은 생각처럼 쉽게 흘러가지 않는 법이란 사실을 잊고 있었다.
언중경은 물론 석대환 역시 마찬가지였다.
흑룡방
“커억!!”
중년 사내가 자신의 팔을 부여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십여 명의 사내들은 사색이 되었다.
그때 그들의 귀에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흑화회(黑花會)를 해산시켜라.”
인신매매를 업으로 삼고 있는 흑화회는 주로 여아를 납치해서 기루에 파는 일을 했다.
납치의 경우는 황도 밖에서 이루어지지만, 납치한 여아를 파는 곳은 황도의 기루였다.
미색이 출중한 경우는 고관의 첩으로 넘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관리들이 흑화회의 뒷배가 되어준 덕분에 이 사업을 지금까지 할 수 있었다.
그런 흑화회도 오늘로써 끝이었다.
뒷배가 되어주던 관리가 형장의 이슬이 된 상황이었다. 새로운 줄을 찾고 있을 때, 사신(死神)이 방문했다.
“사, 살려주십시오!”
“흑룡방(黑龍幇)의 밑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지금까지 흑화회가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관리들에게 뇌물을 적절하게 바치기도 했으나 흑화회주가 초일류고수였기 때문이다.
그런 흑화회주가 복면인의 일검(一劍)에 팔이 잘렸다.
자신들이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란 뜻이었다.
“본방은 쓰레긴 필요 없다. 황도를 떠나라. 하루를 주마. 내일도 내 눈에 띈다면…….”
복면인의 차가운 목소리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흑화회의 파락호들은 목이 부러질까 걱정이 들 정도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복면인은 그들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본 후 나직하게 말했다.
“뒤처리는 조용하게. 소란스럽지 않게…….”
“존명!”
그의 말에 십여 명이 대답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들의 왼쪽 가슴에는 黑(흑)이라는 글자와 그 위에 용을 둥글게 두르고 있었다. 그들이 흑룡방도임을 증명해주었다. 최근 북경 흑도 사이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북경에서도 가장 큰 힘을 자랑하던 청살당이 멸문했다. 그 후 몇 개월이 지나서 일락방과 만금전장이 연이어 사라지게 되었다.
그야말로 큰 권력을 쥘 기회였다. 다만 황실의 분위기 때문에 모두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황실의 분위기가 잠잠해질 때, 흑도 조직들은 전쟁을 시작했다.
그때 나타난 집단이 있었다. 바로 흑룡방이었다.
특히 복면을 쓴 방주는 무시무시했다. 잔혹하면서도 강했다. 북경 흑도에서도 어깨에 힘을 주던 고수들이 그의 검에 하나같이 무너졌다.
그들의 일부는 흑룡방에 흡수되었고, 나머지는 흑화회처럼 해산과 동시에 황도에서 쫓겨났다.
‘생각보다 쓰레기가 너무 많아. 잘한 선택일까?’
복면인이자 흑룡방주의 정체는 바로 이현성이었다.
진주언가에서 황도로 돌아온 그는 쾌활림주인 귀백의 권유로 흑룡방이란 방파를 만들었다.
쾌활림이란 이름 하에 북경 흑도를 장악하는 것보다 나누어서 서로 견제하는 척하는 것이 외부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겠냐는 제안 때문이다.
하나의 집단이 독주를 한다면 황실의 시선이 쏠릴 수 있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흑룡방이었다.
‘흑염방(黑鹽幇), 황금장(黃金場), 환희루(歡喜樓)는 분명 대문파를 능가하는 힘이 있기에 그 가능성을 본 것인데…….’
수없이 많은 흑도의 방파 중에서도 대표적인 집단이 바로 산동의 흑염방, 소주의 황금장, 항주의 환희루였다.
그들이 움직이는 재력은 대형 상단을 능가하며, 보유한 무력은 대문파를 상회한다.
그들의 존재를 알면서도 무림세가는 물론 황실조차 건드리지 못할 정도이니,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었다.
대놓고 활동할 수 없는 이현성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생각한 것 이상으로 흑도의 쓰레기들은 갱생이 불가능했다. 다행히 묻혀 있던 원석들을 건질 수 있었기에 위안을 삼을 뿐이었다.
‘내가 바꾸면 되겠지. 내가…….’
* * *
“살(殺)!”
외침과 함께 한쪽 벽에 무언가 꽂혀 있었다. 그건 놀랍게도 반지였다.
절대 무르지 않는 석벽에 반지가 꽂혔으니 놀라운 일이었다.
허나 이를 불만스럽게 바라보는 자가 있었다.
“귀왕살무(鬼王殺武)를 익히고 있어서 귀왕진결을 수월하게 익힐 수 있었는데… 내공이 너무 부족해.”
그는 아니, 그녀는 귀왕야가의 비역에 든 야래향이었다. 귀왕인을 다루는 비결인 귀왕진결을 익히고 있었다.
전대 귀왕인 조부의 죽음으로 스승 없이 홀로 익히는 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선친이 돌아가기 전에 귀왕살무를 전수해주었다는 점이었다.
귀왕살무는 귀왕의 독문절학이고, 귀왕진결은 그런 귀왕살무의 핵심구결이었다.
즉, 귀왕살무를 익히고 있다면 귀왕진결을 그나마 수월하게 익힐 수 있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야래향은 홀로 익힐 수 있었다. 하지만 반쪽짜리라는 것이 문제였다.
“이제 회령환(回靈丸)을 복용할 때구나.”
귀왕인은 십대암기 중 하나였다.
수많은 암기 중에서 십대암기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호신강기와 금강불괴조차 무력화시키는 강력한 살상능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표적을 암살 후 이기어검술(以氣馭劍術)처럼 되돌아온다는 점이 귀왕인을 십대암기로 만들어주었다.
귀왕진결에 이기어검술과 비슷한 무리(武理)가 담긴 것은 사실이었다.
허나 귀왕진결만으로 그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귀왕인을 제외하곤 귀왕진결만으로 날아갔던 것을 회수하지는 못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귀왕진결과 귀왕인만의 비밀이 숨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야래향은 귀왕인을 날리는 것이 한계였다. 그 역시 제 위력을 낼 수 없으니 회수는 애초 불가능했다.
그녀의 경지와 내공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를 대비한 안배인지, 비역에 영단인 회령환이 보관되어 있었다.
“후. 대환단과 버금간다는 회령환(回靈丸)이라면…….”
무림의 성역이라는 성수의가가 민초들을 무료로 진료할 수 있었던 이유는 수많은 기부금 때문도 있었으나 바로 회혼환(回魂丸)이란 영단 때문이다.
영단치곤 얻을 수 있는 내공의 양은 많지 않으나 부상 회복효과가 매우 뛰어나다.
게다가 활력을 보하는 효과가 있어서 부자들에게는 보약, 무림인들에게는 상비약으로 꼭 필요했다.
그런 회혼환의 판매가 성수의가의 재정에 한몫을 했다.
회령환은 회혼환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단이었다.
그 효과가 무림성약이라는 소림의 대환단에 버금간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한 영약인지 알 수 있었다.
문제는 회혼환은 정기적으로 제련할 수 있으나 회령환은 아니었다.
엄청난 효과만큼이나 들어가는 약재가 너무도 많고 귀한 약재도 많이 필요했다. 게다가 배합과 제련 자체가 너무도 어렵다.
그렇기에 성수의가에서도 몇 알 보유하지 못했고, 웬만해서는 판매하지 않는 것이 회령환이었다.
그런 회령환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후… 그럼…….”
홀로 영약을 복용하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었다. 과한 것은 부족한 것보다 못한 법이었다.
약기를 감당하지 못하면 주화입마에 빠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보통 영약을 복용할 때는 고수의 진기도인(眞氣導引)이 필요했다.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야래향은 조심스러웠다.
그나마 영단이 회령단이라는 점이었다. 회령단은 다른 영단보다 약기가 뛰어나면서도 안정성이 매우 높은 편이었다.
‘본림의 모두를 위해서 성공해야 해. 그리고 귀인의 은혜를 위해서라도…….’
야래향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회령단을 복용한 그녀는 곧바로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그러자 엄청난 약기가 그녀의 몸속에 퍼졌다.
예상 이상으로 많은 양에 야래향은 움찔했다. 하마터면 입을 열 뻔했다.
운기행공. 특히 영약의 기운을 흡수하기 전에 입을 열면 기운이 흐트러진다. 그렇기에 기운을 흡수할 때까지는 입을 열거나 소리를 내어서는 안 된다.
‘안 돼. 집중해야 해.’
그녀는 귀왕살무의 내공구결을 되새기며 회령단의 기운을 제어하려고 했다.
귀왕살무도 신공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나 그녀의 경지가 낮기 때문인지, 아니면 회령단의 기운이 예상이상으로 많기 때문인지 제어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야래향과 회령단의 사투가 시작되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