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어쩌면 일점홍이 일점혈에서 파생되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일점홍과 일점혈의 구결은 매우 흡사했다. 아니, 일점홍을 익히면서 아쉬웠던 부분까지 완벽하게 보완된 느낌이었다.
다만 그로 인해 구결이 길고 익히기가 어려워 보였다.
물론 이미 일점홍을 완벽하게 익힌 이현성에게는 일점혈도 수월하게 익힐 수 있을 것 같았다.
“최소 두 배 이상 빠르겠어. 다만 내공 소모 역시 3할은 더 크겠어.”
속도나 위력은 더욱 뛰어나지만, 그만큼 내공 소모 역시 컸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일격필살인 일점홍과 달리 일점혈의 경우 공방의 조화가 이루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일점홍은 일점혈을 익히기 편하게 완화시킨 검초로 추정되었다.
“혼원검결을 보지 못했으나 그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못하지는 않겠어. 도대체 이런 절대검법이 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지?”
듣도 보도 못한 검법이었지만, 어떤 검법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뛰어난 검법이었다.
물론 단점은 있었다.
“당장은 일점혈을 제외하곤 익히지 못하겠는데?”
암천살무의 다른 초식들은 내공 소모가 너무 크다. 기본적으로 강기(罡氣)로 펼치는 초식이기 때문이다.
아직 초절정지경에 오르지 못한 이현성에게는 그야말로 화중지병(畵中之餠)이었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한번 갔던 길, 그리 오래 걸릴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애초 원했던 혼원신검을 얻지는 못했으나 대신 암천검을 손에 넣었다. 그러니 실망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감사할 일이었다.
“끙~ 내일 떠나야 하니 밤새 운기행공이나 해야겠어.”
어차피 내상을 모두 회복하고 떠나기는 어렵다. 그 전에 최대한 회복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이현성은 밤새 운기행공을 하며 긴 밤을 보내야 했다.
* * *
“빌어먹…을…….”
“헉…헉…헉…….”
진주언가 곳곳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그중 가장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 곳은 바로 비역(秘域)이었다. 그 싸움도 광도사가 쓰러지면서 간신히 마무리되었다.
토목기관지술의 대가인 귀제갈과 추적술의 대가 혈개. 두 사람의 비도술과 곤법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백타로 정평이 자자한 투귀는 왜 유명한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강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대단했지만, 권군을 한계까지 몰아세울 정도는 아니었다.
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자는 바로 광도사였다.
권군 언규철보다는 약할지 몰라도 광도사 역시 초절정고수였다. 그의 검은 혈향(血香)이 가득할 정도로 잔혹스러웠으나 동시에 현묘함이 담겨 있었다.
투귀를 제외한 삼인이 정파출신이란 소문이 거짓은 아닌 듯싶었다. 그러다 보니 까딱하면 쓰러진 것은 그들이 아닌 권군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의 곁에는 소가주인 언중경이 있었다. 어찌 알고 왔는지 그의 곁을 지켜주었다.
“아버님. 괜찮으십니까?”
“후… 괜찮지 않구나.”
겉으로 보이는 상처도 심각했으나 내상은 더 심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외문기공인 강시공(僵屍功) 덕분이었다. 만약 강시공의 경지가 조금만 낮았다면 이렇게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진주언가권과 함께 진주언가를 명가로 만들어준 외문기공 강시공. 다시 한번 진주언가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그래 보이십니다.”
“그러게 말… 컥! 너, 너……!”
눈이 의심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작은 비수가 언규철의 가슴에 꽂혀 있었다. 부상 때문도 있지만, 아들과 함께 있기에 방심하고 있던 차였기에 전혀 반응도 하지 못한 채 비수를 허용하고 말았다.
내상으로 인해 강시공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고 해도 강시공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가슴에 꽂혔다면 보통 비수가 아니란 뜻이었다.
허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 비수를 찌른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다.
“그러게 저들과 공멸해주면 얼마나 좋았습니까? 그랬으면 제가 이런 패륜을 저지를 필요가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크으윽… 왜냐… 왜냐……?”
생명이 꺼져가는 언규철은 믿을 수 없었다. 설마 아들이 이런 경악스러운 짓을 벌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허나 그건 그의 생각일 뿐, 언중경의 생각은 달랐다.
“제 나이가 쉰입니다. 언제까지 소가주입니까? 다른 가문 녀석들은 벌써 가주인데…….”
“쿨럭… 때가… 때가 되면 너의… 것이 되거늘…….”
안 그래도 내상이 심한데, 비수로 인해 심장이 훼손되었는지 기침에 피가 섞여 나왔다. 허나 언규철은 육체적 고통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커보였다.
그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허나 언중경은 이미 마음을 굳혔는지 죄책감은 보이지 않았다.
“일 년, 이 년? 아니면 십 년을 더 말입니까? 전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아버님.”
“쿨럭… 쿨럭… 손바닥으로 하늘을 으…으… 가릴 수 없는 법…이란다. 쿨럭… 게다가 명사(名士)들이 많은 자리에서 이런 짓을 벌이고… 네가 뜻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더냐?”
맞는 말이었다. 비록 다른 가문의 일에 함부로 관여할 수 없으나 가주가 죽은 일이었다. 그의 고희연에 참여한 명사들이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허나 언규철의 말에도 언중경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버님은 저들과 동귀어진을 한 것으로 공포(公布)될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서지 못할 겁니다.
“네, 네놈…….”
언중경의 말에 언규철의 눈이 커졌다.
가슴에 꽂힌 비수를 뽑은 대신 광도사의 검을 다시 밀어넣었다. 비수의 흔적을 가리고 사인을 광도사의 검으로 위장하기 위함이었다. 잘 들어가지 않았으나 검에 실린 기운 때문에 그 정도도 충분했다.
놀랍게도 강기였다. 언중경이 초절정고수가 된 것이다.
“큭!”
“죄송합니다. 허나 저를 위해 이제 그만 죽어주십시오.”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었지만, 어차피 검시(檢屍)와 장례를 주관하는 것은 언중경이며 그의 심복들이 진행할 것이니 문제될 일은 없었다.
괴한들이 진주언가에 잠입할 수 있었던 것도, 쉽게 걸리지 않고 활보할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비역의 위치를 알 수 있었던 것 모두 내부조력자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바로 소가주이자 차기 가주로 내정된 언중경이 내부조력자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럼 언중경이 초절정고수가 되었다.
권군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언중경에게 잘 보이려고만 할 것이 뻔했다.
“후…회…하게…….”
“…상관없습니다. 후회하긴 이미 늦었으니까요.”
* * *
“왜 이렇게 늦는 거야?”
한 중년인이 초조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석대환, 천하제일의 부자라는 석가장주가 바로 그였다.
상계의 절대자란 그가 홀로 나와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공식적으로는 무공고수란 것이 알려지지 않았다. 허나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기에 은밀하게 외유를 나왔다. 짜증이 나 있던 석대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 직후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오. 부곡주.”
“석 호법. 시간이 없으니 바로 교환하고 헤어집시다.”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자는 복면을 쓴 자였다.
그렇기에 표정을 볼 수는 없으나 석대환은 알 수 있었다. 그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사실을.
저 건방진 태도에 순간 살심이 솟구쳤으나 참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지. 건방진 새끼… 아직은 살려두마.’
자신은 혈천삼십세 중 한 곳의 주인이었다. 그런데 곡주도 아닌 부곡주가 감히 평대를 하고 있었다.
자신을 얼마나 얕보는지 잘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움찔.
참는다고 참았으나 석대환이 살기를 완전히 숨기지 못한 것이다. 이에 복면인은 움찔했다.
상대는 흡정혈왕 그리고 자신은 몸 상태가 좋지 않다. 때문에 시비가 붙어서 좋을 게 없었다.
그걸 깨달았는지 태도가 바뀌었다.
“석 호법, 천지신검의 암살을 실패했소. 추격대가 나올 수 있소. 걸릴 일은 없으나 이곳에 있다면 석 호법께서도 의심을 받지 않겠소?”
“실패를 했단 말이오? 그대가?”
석대환은 깜짝 놀랐다. 복면인의 실력을 알기 때문이다.
천지신검의 실력이 그 정도로 대단하단 말인가?
“혼원신검이 괜히 신검이 아니더구려. 물론 쓰러트렸으나 방해꾼 때문에 숨을 끊지는 못했소.”
“허… 그렇구려.”
복면인은 바로 유령곡의 부곡주인 유령살군이었다.
그는 이현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애송이의 방해로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고 말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그런 유령살군의 자존심이 이현성의 존재를 숨길 수 있었다.
복면을 한 덕분에 유령살군은 물론 천지신검 제갈인겸 역시 이현성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마음먹고 쑤시고 다닌다면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을 것이니 다행일 수밖에 없었다.
“의뢰했던 혼원신검이오.”
“검집은?”
“…천지신검의 방해로 검집은 회수 못 했으나 문제가 될 거라 생각하지는 않소만?”
“…좋소. 내가 양보하겠소. 약속했던 유령비요.”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석대환은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이걸로 유령살군이 빚을 진 것이기에 나중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석대환이 혈천십삼세의 한 명이라도 유령살군을 사적으로 부릴 수는 없었다.
같은 호법인 유령왕의 휘하이기도 했지만, 유령살군은 호법에 준한 대우를 받기 때문이다.
그런 유령살군을 움직이기 위해서 준비한 것이 바로 유령비(幽靈匕)였다.
유령곡의 조사가 남긴 유령삼보(幽靈三寶)의 하나였다.
“고맙소. 그리고 이 일은…….”
“물론이오. 서로 잊으십시다. 그럼 이만…….”
유령비를 건네받은 유령살군은 유령처럼 사라졌다.
혼원신검을 바라본 석대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혼원신공만 익힌다면 모두 굴복시킬 수 있어. 그리고 네놈의 역할이 중요하다.”
석대환은 혈천십삼세의 하나가 된 이후 받은 차별을 결코 잊지 않았다. 혼원신검을 오랫동안 찾아다닌 것처럼 막대한 돈을 소모하면서 찾은 것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유령비였다.
유령왕은 유령곡주였지만 완벽하게 유령곡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유령삼보를 모두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석대환은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하기 위해서 유령비를 찾았고, 지금까지 숨겨두었다.
그런 유령비를 유령살군에게 넘겼다. 이로써 유령왕과 유령살군의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그로 인해 혈천십삼세는 간접적으로도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는 사이 자신은 혼원신공을 익혀서 더욱 강해지면 된다.
그것이 혈천의 대업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나 이 정도로 무너질 혈천이 아니기에 문제될 것은 없었다.
“마지막에 웃는 사람은 바로 나다. 크크크…….”
* * *
“허… 형님께서 그리 가실 줄이야.”
전날까지만 해도 큰 잔치가 열렸던 진주언가가 오늘은 상갓집이 되었다.
고희연 중에는 그렇게 정정했던 권군 언규철이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진주언가의 무인들 여럿이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분위기가 너무도 침울해졌다.
그 와중에 진주언가의 수뇌부는 소란스러웠다. 언규철과 같은 항렬의 원로들까지 나올 정도였다.
“분위기가 좋지 않구려.”
“빨리 신임 가주를 세워서 본가의 건재함을 보여야 하오.”
승상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고, 승상이 죽으면 사람이 없어서 쓸쓸하다고 했던가.
전날만 해도 바글바글했던 진주언가에 많은 사람들이 간단히 조문한 후 돌아갔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