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살수가 제갈인겸의 목 대신 벤 것은 검집이었다. 누군가 그를 향해 검집을 던졌던 것이다.
검집이 날아온 방향을 보자 그곳에는 천으로 얼굴을 가린 누군가 서 있었다. 신분을 숨기고 싶은지 옷자락을 찢어서 눈 아래를 두르고 있었다.
살수의 물음에도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
“목격자를 살려둘 수는 없지.”
살수의 검이 얼굴을 가린 사내를 공격했다.
챙챙챙!!
생각보다 접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살수의 특기는 검이 아니었다.
“죽어라!!”
“큭! …유령살수(幽靈殺手)?”
“어, 어떻게!!”
순간 살수는 엄청 당황했다. 설마 유령살수를 알아볼 자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유령살수를 알아본 사내 역시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유령살수가 누구의 무공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본 곡의 무공을 알아보다니 기필코 죽여주마!”
살수의 손이 얼마나 빠른지 순간 일곱개로 늘어났다. 이를 본 이현성의 얼굴이 굳어졌다.
“칠살유령수(七殺幽靈手)… 설마했는데 진짜 유령곡이었구나.”
“끄응… 유령곡이라니…….”
놀랍게도 살수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사라진 유령곡의 살수였다. 그것도 일개 평범한 살수의 솜씨가 아니었다.
챙! 챙! 채챙!!
일수에 일곱 개의 사혈(死穴)을 동시에 놀리는 무시무시한 수법이었다. 일곱 중 하나라도 막아내지 못하면 그대로 죽을 수 있는 죽음의 무학이었다. 유령곡에서도 손꼽히는 절학이었다. 그만큼 연성한 사람 역시 좁혀졌다.
‘젠장! 흡정혈왕을 피하려고 했다가, 유령곡을 만나다니… 유령왕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유령살군이겠구나!’
오래전에 무림에서 사라진 유령곡. 허나 그들이 완전히 사라졌던 것은 아니었다.
혈천십삼세의 하나로 다시 태어났다.
유령곡은 귀림, 살막과 오랜 시간 전쟁을 했다. 살종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수백 년이 지났으나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혈천과 손을 잡은 것이다.
유령곡의 곡주는 유령왕(幽靈王)이었다.
만약 눈앞의 살수가 유령왕이었다면 아직 초절정에 한 발밖에 담그지 못한 자신은 죽을지 모른다.
그가 아님에도 이 정도 살법을 펼친다면 단 한 명. 부곡주인 유령살군(幽靈殺君)뿐이었다. 문제는 유령살군 역시 지금의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고수가 아니란 점이었다.
‘빌어먹을… 역시 모른 척했어야 했어.’
사내가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이유는 그 역시 혈천에 대해서 잘 알기 때문이다.
얼굴을 가린 사내는 바로 이현성이었다. 이 숲은 이현성과 문태규가 쉬고 있는 별채의 인근이었다.
만약을 대비해서 삼라만상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그때 누군가의 기척이 걸려들었다. 이현성은 기겁했다. 혈살객과 매우 흡사한 은신술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수련이 끝날 때가 아님을 알고 있는 이현성으로서는 기겁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게 실수였다. 그는 혈살객이 아닌 유령곡의 살수였으니까. 그가 착각한 것도 당연했다.
혈살객의 모태는 유령곡이었다. 유령곡이 존재함에도 혈살객을 따로 양성한 것은 유령곡의 힘이 커지는 것을 견재하기 위함이었다.
“죽어라! 혈살유령수(血殺幽靈手)!”
그때 유령살군의 기세가 바뀌었다. 음유하고 은밀함으로 유명한 유령곡의 절학답지 않게 사이하고 강렬한 혈광(血光)이 유령살군의 손에서 꿈틀거렸다.
유령곡이 괜히 혈천에 합류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유령곡의 살법에 혈천의 마학(魔學)을 결합시키면서 새로운 무공을 탄생시켰다.
혈살유령수도 그중 하나였다. 이현성은 이를 악물었다. 막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폭뢰(爆雷)!!”
콰쾅!!!
그가 익힌 무학 중 가장 위력적인 폭뢰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혼신의 힘을 다했기 때문인지, 폭뢰는 대단한 위력을 보여주었다. 허나 혈살유령수만은 못했다.
그 증거로 이현성은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검이 충격을 일차로 흡수했음에도 그렇게 되었다.
그로 인해 검에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검신(劍身)과 검파(劍把)에 쩌억~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괜히 참견했다가 목숨만 위험해졌다. 허나 조금 전의 폭발로 인해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었다.
“무슨 소리지!”
“저쪽이다!”
“칫! 운이 좋은 줄 알아라, 허나 기필코 네 목을 수거해주마!”
유령살군은 이가 갈렸으나 당장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라고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천지신검 제갈인겸이 혼신을 다해 찌른 검에 유령살군의 수갑이 찢어졌다. 그만큼 충격이 가볍지 않았다. 내색하지 않았을 뿐 그 역시 내상을 입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이현성과 연이어 충돌했으니 어찌 멀쩡할 수 있겠는가. 마음 같아서는 이현성의 숨을 끊고 싶었으나 진주언가의 고수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자신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고 판단했는지, 검만 회수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방해를 받았다.
“그냥! 떠나진 못한다!!”
“미친 새끼가!”
쓰러졌던 제갈인겸이 도망치려는 유령살군을 잡았다. 정확히는 혼원신검의 검집을 잡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를 죽이고 싶으나 시간이 촉박한 유령살군은 잡고 있던 검집 대신 검파를 쥐었다. 그리곤 그대로 도망쳤다.
어차피 검집보단 검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의 빠른 판단 덕분에 제갈인겸은 유령살군을 놓치고 말았다.
아쉬워하는 그를 향해 이현성이 나직하게 말했다.
“으… 후… 부탁이 있습니다.”
“아… 은공! 말씀하십시오.”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싶지 않군요. 저에 대해서는 숨겨주십시오.”
“예?”
“부탁입니다.”
제갈인겸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공의 청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알겠소. 뒷일은 본인이 처리하겠소. 아, 그리고 이 검집을 가져가시오.”
“…그렇게 하지요.”
제갈인겸을 구하기 위해 급한대로 검집을 던졌기에 이현성의 손에는 금이 간 검을 넣을 곳이 없었다. 이를 본 제갈인겸이 혼원신검의 검집을 건넸다.
그때는 몰랐다. 이 행동이 얼마나 후회할 일인지를.
“그럼…….”
이현성은 내상을 입고 엉망이 된 몸으로 간신히 피했다. 직후 한 무리의 사내들이 들이닥쳤다.
“누구냐!!”
“어, 어… 제, 제갈 장로님!”
“자, 장로님께서 이곳에는 왜……?”
그들은 진주언가의 고수들이었다. 순찰 중에 폭음이 들리자 모여든 것이다. 다행히 그들 중에는 제갈인겸을 알아본 자가 있었다. 덕분에 일이 쉽게 풀렸다.
“습격을 당했네.”
“장로님께서‘도’ 말입니까!”
“‘도’라니 또 누가 습격을 당했다는 말인가?”
“그, 그게…….”
창고 몇 채가 불에 타고 수십 명에 죽었다는 사실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사항이었다. 진주언가의 위신과 연관이 있기에 입단속을 시켰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말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것도 귀빈에게.
상대가 제갈인겸이다 보니 둘러댈 수도 없었다.
“저,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무, 물론 이미 처리했으나 혹시 몰라서 순찰 중이었습니다.”
“그런…….”
소란을 피웠던 괴한들은 대부분 추살되었다.
진주언가 최강이라는 권혼대를 파견한 권군 언규철의 판단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허나 만약을 대비해서 순찰을 강화했다.
“그런데… 장로님을 습격한 자는…….”
“…도망치고 말았네.”
“예? 그, 그게 정말입니까!”
진주언가 고수들이 당황하는 것도 당연했다.
제갈인겸이 누구인가. 진주언가의 가주 권군과 함께 무림 백대고수에 속하는 초절정고수였다.
그런 그를 습격한 것도 놀라운데, 그의 손에서 도망쳤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의 반응에 제갈인겸은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 역시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먼저 가보겠네.”
“예. 장로님.”
유령살군의 일수를 허용한 것이 컸는지 제갈인겸은 몸 상태가 많이 좋지 못했다.
거처로 돌아가는 제갈인겸은 한숨이 나왔다.
‘유령곡이라니… 돌아가는 대로 폐관수련을 해야겠구나.’
* * *
“귀백 어른보다 반수 아래였던 것 같은데… 마지막 일수는…….”
은밀하게 거처로 되돌아온 이현성은 한숨이 나왔다.
강하다는 것은 예상했지만, 까딱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 정말 아찔한 상황이었다. 귀백이 귀림의 대장로라면 유령살군은 유령곡의 부곡주였다.
두 사람 모두 특급을 초월한 절대살수들이기도 했다.
그들의 실력은 근소하지만 귀백이 반수 위였다. 하지만 유령살군의 마지막 일수, 혈살유령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위력이었다.
자신이 살아남은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폭뢰가 아니었다면…….”
엄청난 내공을 소모하는 양날의 검과 같은 폭뢰다. 그렇기에 웬만해서는 펼치지 않는 폭뢰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내상을 입고 말았다.
검이 일차적으로 충격을 흡수하지 못했다면 정말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상상 이상으로 뛰어난 검이었고, 이 검을 준 문종학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현성은 한숨을 쉬며 검을 뽑았다.
검신은 물론 검파 역시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이런… 아쉽군. 제법 좋은 검… 음?”
검신에 생긴 균열이 더욱 커지더니 결국 부서지고 말았다. 허나 직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검신이 부서지면서 새로운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철로 덧입혀뒀구나. 도대체… 왜……?!”
검을 만든 황실야장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검신이 약해서 덧입힌 거라면 차라리 다시 제련하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하지만 덧입힌 철이 사라지고 모습을 드러낸 검신(劍身)은 절대 약하지 않았다.
가벼우면서도 강도가 웬만한 보검 못지않았다. 그렇기에 철을 덧입힌 것이 더욱 의아했다.
하지만 어렴풋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 피를 부를 만한 검이라 숨긴 것이구나.”
마검(魔劍)이란 뜻이 아니었다. 너무 뛰어난 검이라서 주변 사람들이 탐욕에 물들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었다.
탐욕은 곧 싸움을 일으키고, 결국 피를 보게 만든다.
이 검을 만든 야장은 그것을 우려해 철로 덧입혀 진면목을 숨기려고 했던 것이라 판단했다.
“암…천. 네 이름이 암천이구나.”
검신에 검명(劍名)이 음각되어 있었다. 암천(暗天)이라고. 그런데 균열이 생긴 것은 검신만이 아니었다. 검파 역시 부서졌다. 다만 검파는 검신과 달리 숨겨진 검파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돌아가는 대로 새로운 검파로 교체… 이건!!”
손잡이가 부서진 만큼 검파를 교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검파의 잔해 속에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얇은 쪽지였다.
쪽지를 펼쳐본 이현성의 눈이 커졌다.
깨알처럼 작은 글씨가 잔뜩 적혀 있었다. 허나 이현성은 읽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안법은 살수의 기본이며, 이현성 역시 익히고 있기 때문이다. 깨알처럼 적힌 글씨는 놀랍게도 무공구결이었다.
“암천살무(暗天殺舞)… 일점혈(一點血)?”
그제야 덧대어 있던 검신과 검파가 원래 검 주인의 안배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검을 소유했다고 해도 인연이 아니라면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걸 증명하듯 검명과 절학명이 겹쳤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암천살무의 첫 번째 초식인 일점혈이 그가 익히고 있던 일점홍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