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그럼 우리를 미끼로 쓴 거란 말인가!”
광도사의 말은 그럴 듯했다. 아니, 그게 정답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그럼 왜 이 의뢰를 받으신 겁니까? 함정이라면서요.”
“나라고 처음부터 알았겠는가. 이제야 깨달은 걸. 이렇게 된 것 못 받을 보수 대신 이곳에서 챙기세. 단, 시간이 없으니 감당할 수 있는 양만 챙기세.”
광도사의 말에 모두 동의했다. 아니,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까.
결국 그들은 예정과 달리 비문의 보물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허나 또다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우드득…….
“설마했거늘…….”
“비, 빌어먹을… 어떻게 권군이 벌써!”
“저 새끼 때문이구나!!”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아직 나타나지 말아야 하는 권군이 비문에 나타났다. 이 모든 것은 무명인이 일부러 흔적을 남겼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그때 광도사가 나직하게 말했다.
“다행히 권군 혼자인 것 같군. 아무리 권군이라도 우리 모두를 감당할 수는 없지 않겠소?”
“마, 맞습니다.”
“해볼 만하겠어.”
광도사의 말에 나머지 셋의 눈빛이 바뀌었다.
이 자리에 있는 넷 중 홀로 권군을 감당할 수 있는 고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 넷이라면 상황이 또 다르다.
귀제갈과 흑개는 토목기관지술과 추적술로 유명하기에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숨기고 있는 한 수를 가진 고수들이었다. 하물며 초절정지경에 근접한 투귀와 초입이지만 초절정지경에 오른 광도사가 힘을 합친다면?
굳이 권군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다. 잘만 하면 그를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이없군. 나 언규철이 이런 대우를 받을 줄은 몰랐군. 좋다. 네놈들이 모든 것을 말하기 전에 죽지도 못하게 만들어주마.”
그렇게 1대 4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조금 전 광도사의 검에 찔린 무명인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 역시 계획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을.
* * *
“이런… 내가 이런 실수를…….”
거처로 돌아온 제갈인겸은 자책을 했다.
얼떨결에 언규철 가주가 건넨 보검을 받았다.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선물로 포장된 뇌물이란 것을.
보검을 받은 이상 양가의 혼약을 반대할 수 없었다. 아니, 거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평소의 그라면 이런 어리석은 실수를 범하지 않았을 텐데, 승사검과 이 보검 때문에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했던 것이 실수였다.
“안 되겠어. 돌려드려야겠어.”
실수하는 것도 문제지만, 실수를 인지하고도 바로 잡지 않는 것은 더 큰 문제였다.
그걸 알기에 제갈인겸은 다시 진주언가의 가주전으로 향했다. 급한 마음에 가주전으로 향했으나 곧 깨달았다.
아무리 자신이 제갈세가의 장로라지만, 일가의 가주를 미리 기별도 없이 찾아가는 것은 실례라는 것을.
빨리 보검을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에 그답지 않은 실례를 범할 뻔했다.
“허허… 이 제갈인겸이 평소하지 않던 실수를 몇 번이나 하는구나.”
제갈인겸은 헛웃음이 나왔다. 거처로 돌아간 후 사람을 보내서 약조부터 해야겠단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돌렸을 때였다.
“누구냐.”
제갈인겸은 검파를 쥐었다. 미약하지만 살기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예민해서 착각을 했나 생각했으나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오호? 감히 날 유도하겠다? 좋다. 어울려주지.”
이게 얼마만인가.
제갈세가의 직계이자 장로란 이름 때문에 자신의 무혼(武魂)을 불태울 일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먼저 자극하니 무시할 수 없었다.
진주언가의 본가는 일개 장원 수준이 아니었다.
본가에 기거하는 무인만 수백에 시비와 하인 역시 그 수가 상당히 많다. 그러다 보니 본가에는 크고 작은 전각에 수십 채나 된다. 그 부지가 작을 리가 없었다.
본가 내에는 작은 못이 몇 개나 되고, 작은 숲까지 있을 정도였다.
제갈인겸이 유도당한 곳은 인적이 드린 숲 안이었다.
“원하는 대로 와주었는데, 이제 그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어떨까?”
“…과연 천지신검(天地神劍)인가.”
천지신검 제갈인겸. 가주만 익힐 수 있는 천지호연검법을 익힌 덕분에 얻은 별호였다.
비록 가주는 아니지만, 제갈세가는 종통이었다. 그리고 세가 제일의 무재였다. 그러다 보니 전통을 깨고, 그에게 천지호연검법을 전수한 것이다.
다행히 전통을 깨고 천지호연검법을 전수한 보람이 있게 제갈인겸은 5년 전, 초절정지경에 오르게 되었다.
그로 인해 위협이 되었던 오대세가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런 제갈인겸이 복면인을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댄… 누구냐?”
“모르는 것이 낫지 않겠소? 알게 되면 죽어야 하는데?”
천하의 천지신검을 상대로 죽음을 운운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결코 과한 자신감이 아니었다. 복면인에게서 풍기는 죽음의 향이 보통이 아니었다.
수많은 살생을 해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향기였다.
무림인이라도 모두 그런 향기를 풍길 수는 없었다. 이런 족속은 무림 아니, 세상에서 흔치 않았다.
“살수?”
“아직 때가 아니니, 기회를 주지. 검을 포기하면 이대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마.”
“건방진! 감히 살수 나부랭이가!”
복면인 아니, 살수의 말은 제갈인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가 누구인가. 제갈세가에서도 역대급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실제로 무림 백대고수였다.
게다가 천재인 제갈세가의 선조들이 피땀 흘려 창안한 천지호연검법의 계승자이기도 했다.
그런 자신이 고작 쥐새끼처럼 숨어 있다가 암습이나 하는 살수에게 얕보였다는 사실 때문에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이성적으로 유명한 제갈세가의 직계이지만, 무인은 무인이었다.
“살수 나부랭이라…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바란다면야…….”
순간 살수가 모습을 감추었다.
허나 제갈인겸은 걱정하지 않았다. 몰랐다면 몰라도 이미 살수의 존재를 알고 간파하지 못한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기감을 넓혀서 은신한 살수의 위치를 찾았다. 그러나 이내 제갈인겸의 얼굴이 굳어졌다.
―흐흐흐. 내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지 못했나 보군.
‘육합전성(六合傳聲)!!’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게 만들어 시전자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음공이었다.
고도의 수법으로 아무나 펼칠 수 없었다.
제갈인겸은 깨달았다. 상대가 일개 살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십대…살수인가.”
―글쎄? 누굴까?
기감에 잡히지 않은 고도의 은신술과 육합전성.
일개 살수가 펼칠 수 있는 수법 아니, 공부가 아니었다.
십대살수, 그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진짜 살수다.
“천살(天殺)? 사성(死星)? 설마… 살왕(殺王)은 아니겠지?”
“정말 죽고 싶나보군.”
십대살수 중에서도 초절정지경에 올랐다고 추정되는 자들이었다.
무림인들은 고작 살수 따위가 그런 경지에 오르는 것이 가당키나 하냐고 생각하면서도 입 밖으로 부정하지는 못했다.
그들의 화를 돋운다면 죽은 목숨이기 때문이다.
‘아닌가? 나머지 십대살수인가? 하지만 그들의 수준은 아닌 것 같은데?’
육합전성을 통해 느껴지는 분노를 알아차린 제갈인겸은 혼란스러웠다. 천살, 사성, 살왕을 언급하자 감정을 드러냈으니 말이었다.
“네가 그들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제갈인겸은 검을 꽉 쥐곤 투기를 드러냈다.
설사 상대가 살왕이더라도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채~챙! 챙! 챙!
“제법이군.”
언제 나타났는지 살수의 손이 제갈인겸의 목을 노렸다.
허나 제갈인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러 살수의 공격을 막아냈다.
검과 손이 충돌하면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살수의 손 아니, 수갑(手甲)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허나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살수는 제갈인겸을 비웃으며 다시 연기처럼 사라졌다.
내색하지 않았으나 제갈인겸은 간담이 써늘했다.
검을 휘두른 것은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냥 무인으로서의 감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심장은 뜨거워졌다.
“제갈세가에도 검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마!”
암천
“헉헉… 헉…….”
초절정고수인 제갈인겸의 호흡이 무척이나 거칠어졌다.
게다가 입고 있는 옷 여기저기가 찢어진 것이 고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눈빛은 살아 있었다.
‘한번… 단 한 번이면 돼.’
확실한 정체는 알 수 없으나 십대살수 중에서도 상위급의 실력자임을 알 수 있었다. 기감에도 잡히지 않는 엄청난 은신술로 인해 막아내는데 한계가 있었다. 결국 상처 하나하나가 쌓여 제법 지쳐갔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 기회를 엿보았다.
그때였다. 제갈인겸의 눈빛이 번쩍였다. 허나 번쩍인 것은 눈빛만이 아니었다.
“거기냐!!”
쾅!!
혼신을 다한 제갈인겸의 검이 허공을 찔렀다. 순간 강력한 빛이 폭사했다.
놀랍게도 그곳에 살수가 있었다.
허나 살수를 베지는 못했다. 막아냈기 때문이다.
물론 아예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으윽… 과연 신검인가. 교룡의 힘줄과 천잠사를 꼬아서 만든 내 수갑이 찢어질 줄이야.”
“신…검?”
초절정고수인 제갈인겸의 강렬한 염원에 검이 반응했는지, 일시적이지만 신검합일(身劍合一)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보물이라고 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살수의 수갑이 찢기고 말았다. 제갈인겸의 검격을 몇 번이나 멀쩡히 막아냈던 수갑이었다.
허나 조금만 위력이 더 강력했다면 수갑만 아니라 살수도 벨 수 있었는데,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죽여주마.”
“어림… 큭!”
살수는 유령처럼 사라졌다. 제갈인겸은 결코 살수의 뜻대로 당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검을 들었다.
허나 마음과 달리 몸은 그 뜻을 따르지 못했다.
혼신을 다한 일격 덕분에 신검합일을 이룰 수 있었다. 모든 것을 그 일검에 담았기에 지금 그에게 남은 힘이 하나도 없었다. 결국 제갈인겸은 막기는커녕 무방비하게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 충격으로 검까지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손을 떠난 검은 살수의 손에 들어갔다.
“흐흐… 드디어 신검을 손에 넣었군.”
“으… 신검이라니… 도대체…….”
깊은 내상을 입은 제갈인겸은 고통보다 당혹스러움이 컸다. 제법 좋은 검인 것은 인정하지만 신검이라고 말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보며 살수는 저승가는 길의 선물인 셈 치며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혼원검왕하면 뭐 떠오르는 것이 없어?”
“서, 설마… 혼원신검!!”
“맞아. 전설의 혼원신공이 숨겨진 신검이지.”
“그…런…….”
승사검이 문제가 아니었다. 혼원신검의 비밀을 푼 자에게 주어지는 기연, 혼원신공.
오대세가인 제갈세가도 탐이 나지 않을 수 없는 절세신공이 혼원신공이었다. 이런 기연이 눈앞에 있었음에도 잡지 못한 어리석은 자신의 안목이 한탄스러웠다.
허나 이제는 의미가 없었다. 자신의 죽음은 확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너는 도대체… 누구더냐……?”
“내 선물은 여기까지다. 나머지는 염라대왕에게 물어라.”
살수는 혼원신검을 머리 위로 올렸다. 검이 내려가는 순간 제갈인겸은 이를 악물었다.
서걱!
“누구냐!!”
하늘의 뜻인가. 제갈인겸은 겨우 죽음을 면했다. 그의 목을 향하던 혼원신검이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