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물론 언유광 역시 진주언가의 종손으로, 재능을 인정받은 후기지수였다.
권군 언규철이 괜히 아끼는 것이 아니었다. 허나 지봉의 짝으로는 손색이 있었다.
그건 제갈인겸만 아니라 언규철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지봉의 짝으로 우리 광이가 부족하다는 것은 알고 있네.”
“하하. 그럴 리가요.”
제갈인겸은 아니라고 말했으나 속내는 달랐다.
언유광 따위가 자신의 조카의 짝으로 가당키나 하냐 생각했다.
허나 대놓고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상대는 무림 백대고수이자 진주언가의 가주였다.
같은 무림 백대고수라 해도 제갈인겸과 언규철의 실력 차는 분명 존재했다.
그때 언규철이 승부수를 던졌다.
“만약 양가의 혼약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면 예물로 승사검을 보낼 생각일세.”
“승…사검 말입니까.”
“그렇게. 구야자의 승사검.”
“…….”
제갈인겸은 입을 다물었다. 그 역시 검객이었다. 그것도 초절정고수였다.
만약 예물로 승사검이 제갈세가로 전해진다면 그 주인은 자신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제갈세가를 대표하는 검객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고작 검 한 자루에 흔들리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여포는 적토마를 선물받고 양부를 배신했다.
검객에게 보검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니 흔들리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제갈인겸의 눈동자가 흔들리자 언규철이 쐐기를 박았다.
“아, 그리고 운 좋게 보검 한 자루를 더 손에 넣었네. 만약 양가의 관계가 더 긴밀하게 된다면 무엇이 아깝겠는가. …자네에게 선물하겠네.”
“혹시 안평상단주께서 선물한…….”
“맞네.”
꿀꺽.
승사검만 못 하지만 예사롭지 않은 검이었다는 걸 떠올린 제갈인겸의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군요. 돌아가는 대로 가주와 상의해보겠습니다.”
“하하! 고맙네. 그리고 이걸…….”
언규철은 안평상단주에게 받은 보검을 내밀었다. 이를 본 제갈인겸은 기겁하며 손을 저었다.
아직 두 사람의 혼약이 결정된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저 검을 덥석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연륜이 어디 가는 것이 아니었다. 언규철은 강하게 밀어붙였다.
“아, 아직 결정된 것도 아닌데…….”
“허허… 아닐세. 생각해보니 그 아이들의 혼약 때문에 이 검을 제시하는 것은 아닌 것 같네. 설사 양가의 관계가 틀어진다고 해도 이 검은 자네에게 선물하고 싶네. 받아주게나.”
“…….”
“허허…부담 갖지 않아도 되네. 부디 받아주게나.”
언규철은 사람 좋게 웃었으나 제갈인겸으로서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젠장, 어떻게 부담을 안 가져! …에라 모르겠다!’
머리는 거절하라고 하지만 심장은 그렇지 못했다. 결국 제갈인겸은 검을 받았다.
거절할 명분도 없었고, 그 역시 탐이 나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늙은 생각이 맵다고 했던가, 역시 언규철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는 ‘양가의 관계가 틀어져도’ 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혼약이 무산되면 진주언가와 친구가 아닌 적이 될 거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아무리 진주언가가 오대세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적이 되어서 좋을 것은 없었다.
그리고 장로이자 가주의 친형인 제갈인겸에게 보검을 미리 선물했다.
그도 찔리는 것이 있으니 두 사람의 혼약을 피력할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으로 승사검이라면 예물로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그때였다.
“가, 가주님!”
“무슨 일이더냐, 귀한 손님이 계신 것을 모르더냐!”
“가주님, 용무는 마친 것 같은데…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아…미안하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제갈인겸은 선물받은 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제갈인겸이 나가자 총관인 언규벽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크, 큰일 났습니다.”
“큰일? 무슨 일이더냐?”
“창고들이 전소했습니다.”
“고작 그것 때문에 호들갑이더냐! 총관이라는 녀석이!”
언규철은 어이가 없었다. 제갈세가와의 혈약을 맺는 매우 중요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고작 창고들이 전소한 일이 대수라고 이리 호들갑을 떠니, 어이를 넘어서 짜증이 났다.
“차, 창고의 잔해 속에 순찰당 아이들의…….”
“순찰당이 뭐?”
“순찰당 아이들의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뭐,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더냐!!”
그제야 언규철은 가벼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의 고함에 총관은 보고된 사항을 설명했다.
“시체에는 검상이 남아 있는 것이 사고가 아님이 밝혀졌습니다. 현재 철권대(鐵拳隊)를 움직여서 흉수들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으음… 느낌이 좋지 않구나. 권혼대(拳魂隊)를 동원해라.”
“궈, 권혼대를 말씀이십니까! 아, 알겠습니다!”
철권대만 해도 진주언가의 정예 무력대였다.
귀빈들이 많은 지금 일이 커져서는 곤란하기에 그들을 움직인 것인데, 언규철은 한술 더 떠서 권혼대를 움직이라고 했다.
진주언가 제일의 무력대인 권혼대를.
“어떤 미친놈들이… 자, 잠깐… 설마!!”
언규철은 ‘설마’하면서 급하게 어딘가를 향했다.
* * *
“멀었나.”
“…….”
“이익! 내 말이…….”
“화를 거두게나. 기관을 멈추기 위해서 집중하느라, 자네의 말을 듣지 못한 것뿐이니.”
복면을 쓴 다섯 괴한들이 어느 문 앞에 서 있었다.
진주언가의 가주만 출입할 수 있는 비문(秘門)이었다.
가주만의 연공실인 동시에 비밀 보고이기도 했다.
비문의 존재는 진주언가에서도 극소수만 알고 있으며, 정확한 위치는 가주와 소가주만 알고 있었다.
비밀을 위해서 경비조차 세우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걱정이 없었다.
진주언가의 선조가 천금을 들여서 기관장치로 보호하고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가주가 가지고 있기에 그 외에는 누구도 출입이 불가능했다.
“칫! 날 가르치려고 하지 마라, 목적이 있어서 협력하고 있을 뿐이니까.”
“허허. 알고 있네, 불쾌했다면 미안하네.”
그들은 복면을 쓰고 있는 서로가 누구인지 눈치채고 있었다.
다만 입 밖에 꺼내지 않을 뿐이었다. 알려져서 서로 좋을게 없기 때문이다.
‘과연 광도사(狂道士). 싸움 귀신(鬪鬼)이 화를 거두다니. 역시 제일 조심해야 할 자는 저자야.’
복면인들은 하나같이 대가라고 불리는 인물들이었다.
거의 사장(死藏)되었다는 토목기관지술의 대가 귀제갈(鬼諸葛).
추적의 대가 흑개(黑丐).
백타의 달인이자, 싸움에 미친 자 투귀(鬪鬼)
평소에는 인자한 노도사이지만, 화가 나면 어떤 악귀보다 무서워진다는 광도사(狂道士).
유일하게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명인.
“후… 됐군.”
“수고 많았네.”
얼마 지나지 않아 귀제갈의 입에서 기다렸던 말이 나왔다. 이에 광도사가 그를 격려했다.
비록 그들 사이에 수장은 없으나 은연 중 최고수인 광도사가 일행을 이끌고 있었다.
다들 불만이 없지 않았으나 그를 제외한 다른 자를 자신들의 우위에 두는 것은 싫었기에 은연 중 광도사가 일행을 이끄는데 찬성한 것이다.
“흐흐흐… 기대가 되는군.”
“괜히 아무거나 훔치지 말게. 그러다 꼬리가 잡히면 곤란하니까. 우린 승사검만…….”
“알고 있다고… 자꾸 날 자극하면…….”
비록 광도사보다 못하다고 해도 투귀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고수였다. 게다가 쉽게 흥분하는 성격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까지 참은 것도 광도사가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투귀의 인내심도 한계에 도달했다. 결국 투기를 드러냈다.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뿐, 적의를 드러낸 자에게 자비를 베풀 광도사가 아니었다. 그 역시 검파를 쥐었다.
문제는 두 사람이 싸우게 된다면 자신들이 이곳에 침입한 사실이 드러난다는 점이었다.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먼저 들어가겠소.”
“우, 우리도…….”
“칫!”
침묵만 하고 있던 무명인이 비문의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당황해하던 귀제갈이 따르자, 투귀는 투기를 거두었다. 이에 광도사 역시 검파에서 손을 떼었다.
그들은 승사검을 노리고 이곳에 잠입했다. 정확히는 승사검을 의뢰자에게 건네고 그들이 원하는 보상들을 받기 위함이었다. 원래라면 이런 위험한 의뢰는 받지 않을 테지만,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보상들을 내세웠다.
설사 의뢰자가 마음을 바꾼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승사검이라면 그것대로 보상이 될 테니까.
의뢰자가 보통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움직임을 숨기기 위해서 소란을 일으킨 자들까지 섭외했고, 진주언가의 심처인 비문의 위치까지 알려주었다. 때문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거저먹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오호~ 역시 진주언가군. 많이도 숨겨 놨군.”
이곳은 진주언가 최후의 보루였다. 망한다고 해도 재기할 수 있게 막대한 재화는 물론 영약 그리고 비급까지 보관해두었다. 이곳만 털어도 평생 걱정없이 살 수 있었다. 덕분에 무명인을 제외한 4인의 눈에 탐욕의 빛이 일렁이는 것은 당연했다.
“히, 힘들게 들어왔는데… 기념으로 하나씩 챙기는 것이 어떻습니까?”
“흠흠… 본개는 찬성입니다.”
귀제갈의 말에 흑개가 힘을 실어주었다. 투귀와 광도사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무명인의 말에 그만두었다.
“…그럼 승사검은 본인이 회수하겠소. 그리고 보상 역시 본인만 받겠소. 동의한다면 전리품을 회수하셔도 좋소.”
“건방진 새끼, 네놈을 죽이고 우리끼리 돌아가는 방법도 있다는 걸 모르나 보군.”
으르렁거리는 투귀를 봤음에도 무명인은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저 나직하게 말했다.
“나 혼자 모두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도망치는 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다들 원하는 것이 있어서 이 의뢰를 받은 것 아닌가?”
“전리품 좀 챙긴다고 의뢰를 완수하는데, 문제는 없다.”
“의뢰의 조건은 애초 승사검의 회수만이었소. 그리고 괜한 행동으로 꼬리가 잡히는 것은 사양이오.”
“젠장! 알겠다. 알겠다고!”
그들은 강한 유혹이 일었으나 간신히 참았다.
승사검의 보상을 받기로 한 물건은 각자에게 가장 필요한 보물이기 때문이다. 작은 탐욕 때문에 큰 것을 잃는 우를 범할 수는 없었다.
“그럼… 승사… 컥! 네, 네놈이…….”
푹!!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광도사의 검이 무명인의 가슴을 관통했다. 감정조절이 미흡한 투귀만 신경 쓰던 무명인은 예상치 못한 광도사의 기습에 저항도 못 한 채 절명하고 말았다.
“무, 무슨 짓이십니까!”
“마, 맞습니다. 보상을 못 받으면 어쩌려고…….”
귀제갈과 흑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광도사에게 따졌다. 허나 그라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
“모두 예상은 하겠지만, 저놈은 의뢰자가 보낸 감시인일 것이네.”
“그야 모두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더더욱…….”
“그럼 저놈이 흔적을 남긴 것은 알고 있나?”
“그게 무슨 말인지!”
광도사의 말에 모두 기겁했다. 자신들도 모르게 흔적을 남겼다면 결코 좋은 의도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지금은 협력 중이지만 결국 타인이었다.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사이가 아니란 뜻이었다.
“왜 우리에게 이번 일을 의뢰했을 거라 생각하는가?”
“그야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맞네. 이 정도 준비를 할 수 있는 자라면 굳이 우리의 손을 이용할 이유가 없네. 결국 모든 것을 뒤집어 써줄 자가 필요했던 거지.”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