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석 호법의 가문은 자금을 담당하는 세력 중 하나였다.
그 때문인지 다른 세력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상인을 무시하는 무인들의 습성 때문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석 호법의 가문이 약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단순히 돈만 많다고 혈천십삼세에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본가가 군림하는 그날 반드시 네놈들을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 * *
“일점홍(一點紅)!”
이현성의 검이 어둠을 갈랐다. 극쾌검인 일점홍이었다. 그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월광참(月光斬)!!”
일점홍과는 다른 류의 쾌검이었다.
혈영살객 당시 주로 펼친 검법의 하나인 월광검법이었다.
월광마객(月光魔客)이란 전대 고수의 독문검술로, 극쾌검은 아니나 일격필살의 검인 일점홍과 달리 공방을 염두에 둔 검술이었다.
허나 이번에는 쾌검이 아니었다.
“폭뢰(爆雷)!”
쾅!!
검기가 폭발하면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혈영살객 당시 그가 익힌 검술은 대부분 쾌검이나 은밀한 살수검을 익혔다.
대단한 신공절학을 익힐 수 있는 배경이 없는 이유가 가장 컸지만, 그의 은신술에 가장 어울리기 때문이다.
폭뢰는 몇 안 되는 위력을 중시한 강검이었다. 다만 내공 소모가 커서 효율이 좋지 못하기에 사용을 자제했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아.”
검을 거둔 이현성은 한숨이 나왔다.
십대살수 중 말석인 청살괴옹에게 죽을 뻔했다. 귀림의 대장로인 귀백은 또 얼마나 강한가.
이대로라면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렇기에 회귀 전에 익혔던 무공들을 점검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암살에 적합한 일격필살의 검들이기 때문이다.
즉, 암살을 실패한다면 오히려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회귀 전이야 혈살육관을 통과하면서 초절정고수가 되었고, 부족한 부분은 특기인 은신술로 메울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한 상황이었다.
“새로운 검술이 필요해…….”
일락방과 만금전장의 몰락으로 북경 흑도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흑도를 장악하기에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당장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일락방과 만금전장의 일로 황실까지 영향을 받는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로 인해 황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럴 때, 흑도를 장악하기 위해서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어떤 불똥이 튈지 모른다.
이현성은 쾌활림주의 조언에 인해 북경 흑도의 장악은 잠시 미루었다. 대신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그 과정에서 다시 한번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특히 신공절학이 절실했다.
문제는 신공절학은커녕 상승절학조차 익히고 싶다고 익힐 수 있는 무공이 아니란 점이었다.
“가장 쉬운 방법은 흑점을 통해서 구입하는 것인데…….”
흑점(黑店).
개방, 하오문과 함께 천하 3대 정보집단이었다.
그중 흑점의 특이점은 불법적인 사업을 운영한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사고판다. 정보만 아니라 장물은 물론 사람의 목숨, 무공조차 사고판다.
물론 그 값이 싸지는 않았다.
무공의 등급에 따라서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다.
이류 이하의 무공조차 금 한 냥이며, 일류 이상은 기본 금 닷 냥부터 시작한다. 상승검학은 최소 금 백 냥이었다.
문제는 자신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살 수 있는 만큼 파해법 역시 판매할 수 있었다.
유일한 소유를 하기 위해서는 금 수천에서 일만 냥 이상이나 한다.
만약 신공절학이라면? 부르는 것이 값이었다.
황제의 하사품과 북궁세가에서 받은 보상은 만금전장을 흔드는 미끼로 사용했다. 그렇기에 당장은 흑점에 지불할 만큼의 재화를 보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도 흑점은 믿을 만한 집단이 아닌 만큼 그들에게서 무공을 구입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결국 북경을 떠나야 한다는 건데…….”
다행히 회귀 전의 기억 덕분에 잠자고 있는 기연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황도에는 귀왕인을 제외하곤 자신이 원하는 기연이 없었다.
“산동의 패왕도법, 하남의 역천마라공, 산서의 천화검결… 후… 익힐 게 없네.”
하북성과 가까운 산동, 하남, 산서성에 잠들어 있는 기연들이었다.
어느 하나 신공절학이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그중 익힐 만한 것이 없었다.
검과 도는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무기다.
검을 익힌 이현성의 입장에서는 도법을 익히는 것은 어렵기에 패왕도법은 설사 손에 넣는다고 해도 무의미했다.
역천마라공 역시 다르지 않았다. 장법을 다루는 마공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천화검결이 검학이나 문제는 항산파에서 잃어버린 검학이란 점이었다.
자신이 천화검결을 익힌다면 오악검파인 항산과 사생결단을 해야 한다.
힘을 키우는 입장에서 적을 줄이는 것보다 적을 더 이상 만들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법이었다.
“절강에 다녀와야 하나.”
삼백 년 전, 천하제일검이라고 불렸던 단천검황의 유산이 절강성에서 발견된다.
비록 삼백 년 전의 검술이지만 단천검법(斷天劍法)이라면 명실상부 신공절학이었다.
문제는 절강까지 다녀오려면 족히 반년은 걸린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절강 북부에 있는 산이라는 점 말고는 더 이상의 단서가 없었다. 즉, 단천검법을 찾으려면 제법 오랜 시간 북경을 비워야 한다. 대학사의 빈객이란 신분이 필요한 지금 쉽게 떠날 수도 없었다.
“다른 검술은 없나? 후…….”
“부르셨습니까. 문 대인.”
“늦은 시간에 이리 청해 미안하오.”
“아닙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내각대학사인 문종학은 워낙 공사다망했다. 그런데 이번에 만금전장의 일이 황실까지 영향을 끼쳤다.
태감과 고관들 그 외 여러 관리가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일 년 사이에 벌써 큼지막한 사건이 두 개나 터졌다. 내각대학사인 그가 더욱 바쁠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한 장원에 살면서도 오랜만에 얼굴을 보게 된 것이다.
“이 대협께 부탁이 있어서 예가 아님을 알지만 청했습니다.”
“아닙니다. 청이 뭡니까?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부탁이라면…….”
문종학은 남에게 쉽게 부탁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이런 늦은 시간 자신을 청할 정도라면 쉬운 일이 아닐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각대학사인 그에게 빚을 지워두면 분명 언젠가 큰 도움이 될 수 있기에 웬만한 일이라면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동문수학하던 친우의 아버님께서 얼마 후에 생신이오. 고희연(古稀宴)이라 찾아뵙지 않을 수 없소만… 아쉽게도 여건이 되지 않는구려. 해서 태규를 대신 보내려 하는데, 아무래도 그 아이만 보내기에 안심이 되지 않소. 해서…이 대협께서 동행해주실 수 없겠소?”
“으음…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생각보다는 큰일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현성은 바로 수락했다. 이에 문종학은 크게 기뻐했다.
이로써 걱정 하나는 줄었기 때문이다.
“표국에 의뢰를 해뒀으니 다녀오시는데, 어렵지는 않을 것이오.”
“어디기에 표국까지 의뢰하셨습니까?”
이현성은 의아했다. 사실 문태규의 호위라면 위표에게 부탁하면 금의위사 한두 명쯤 내어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부탁했다. 물론 금의위사보단 자신을 더 의지하는 것이니 그러려니 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표국에까지 의뢰했다면 말이 다르다. 황도가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안평의 언가이외다.”
“안평의 언가라면… 혹시 진주언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 그리 불린다고 들은 적이 있소.”
황도라면 몰라도 하북성 남부에 위치한 진주언가라면 금의위사를 움직일 수 없었다.
그들은 황제가 문종학의 안위를 위해서 특별히 파견한 금의위였기에 장기간 자리를 비울 수 없기 때문이다.
진주언가(晋州彦家). 정파의 오대세가에 못하지만, 족히 십대세가에는 들 수 있는 명문 중에 명문이었다.
독문권법인 진주언가권은 황보세가의 천왕삼권에 견줄 정도였다. 그런 진주언가의 혈족이 문종학과 동문수학을 했다니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명가인 진주언가라면 무(武)만 아니라 문(文)에도 신경을 쓰는 것은 당연했다.
‘자, 잠깐! 진주언가면!!’
이현성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진주언가라고 하니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 후 진주언가가 몰락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건 하나의 보물 때문이다.
‘운 좋으면 혼원신검(混元神劍)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이백 년 전, 무림을 종횡했던 혼원검왕의 애검이었다.
어디 출신인지 아무도 알 수 없으나 그 끝을 모르는 내공과 그로 인한 무시무시한 위력은 적수를 찾기 힘들었다. 혼원검결(混元劍訣)은 무림 최고의 검술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 혼원신검이 진주언가에 있었다. 어이없게도 진주언가조차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러고 보니 권군(拳君)의 고희연 때 받은 선물이라고 들었는데… 이런 우연이라니…….’
진주언가는 권법으로 유명한 가문이지만, 삼절검(三絶劍)이라는 뛰어난 검법을 소유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 어떤 보검을 선물했다. 문제는 그 보검의 정체가 혼원검왕의 혼원신검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선물한 자는 물론 받은 진주언가 역시 몰랐다.
허나 세상에는 비밀이 없는 법. 어느 날 그 사실을 알게 된 괴한들이 진주언가를 급습했다.
명문정파이자 초절정고수인 권군(拳君)의 가문이 바로 진주언가였다.
누가 감히 습격을 할 거라고 생각하겠는가. 그런 방심이 진주언가를 위험하게 만들었다.
결국 예상치 못한 급습으로 권군과 진주언가의 고수들이 상당수 죽게 되었다.
그 이후 진주언가는 위명을 잃고 몰락하게 된다.
‘내각대학사의 빈객이자, 태규의 보호자 신분이라면 진주언가 안에 출입하는데, 어려움이 없겠지.’
절호의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권군의 선물을 진주언가에서 빼돌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출발은 나흘 후이니 부탁드리겠소.”
“걱정 마십시오.”
* * *
“어찌되었나.”
“…안평상단주가 구입했다고 합니다.”
중년 사내는 미간을 찌푸렸다.
안평상단은 대상단급은 아니지만 나름 탄탄한 상단이었다. 게다가 배경이 대단했다.
바로 진주언가에서 운영하는 상단이기 때문이다.
“이런! 왜 하필 안평상단이란 말인가! 곤란하지만… 어쩔 수 없지. 상단주를 베는 한이 있어도 꼭 손에 넣어라.”
“그게 권군의 고희연 선물이라서… 이미 진주언가로 향하고 있습니다.
수하의 말에 중년 사내는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
안평상단주 역시 진주언가의 요인이기에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필요한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무리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이미 진주언가로 향하고 있었다. 아무리 중년인이라 해도 이 상황은 당황스러웠다.
“진주언가라면 삼당(三堂)을 모두 움직여야 가능합니다.”
“그건 곤란해. 삼당을 비밀리에 양성하느라 소모된 금액만 천문학적이야. 지금 삼당을 움직일 수는 없어.”
삼당이 어떤 집단이기에 천하의 진주언가를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문제는 그런 삼당을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기에 다른 방법을 강구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