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귀인?”
두 사람이 연인관계는 아님을 깨닫고 림주는 안도를 했다. 하지만 귀인이란 말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깜짝 놀랄 정도로 대단한 힘을 숨기고 있는 듯싶으나, 귀인이라고 불린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야래향은 림주가 아닌 대장로라고 불렀다.
쾌활림주가 아닌 귀림의 대장로서 대한다는 뜻이었다.
그때 야래향이 손을 내밀었다. 림주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가 곧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봤다.
“그, 그 반지는 서, 설마!!”
“맞아요. 귀왕인… 할아버지의 반지가 맞아요.”
“아… 형님의…….”
림주는 감격했다. 오래전에 사라진 의형인 귀림주의 반지. 그의 시체를 찾았으나 귀왕인을 회수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사라졌던 반지. 아니, 귀왕의 신물이 돌아왔다.
이는 곧 봉문했던 귀림이 부활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 두 눈을 감기 전에 다시 귀왕인을 볼 수 없을 줄 알았거늘… 오… 하늘이시여. 감사합니다.”
“하늘이 아니라 귀인 덕분이에요.”
비록 그녀 역시 민충당에 들어갔으나 그곳에 귀왕인이 있었다고 확신하고 잠행한 것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조부의 행적을 조사했고, 그 부근을 지나간 흔적을 찾아낸 덕분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잠행했던 것이다.
직접 회수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제 손에 있으니 고생한 보람은 있었다.
“그런 이 청년 아니, 귀인께서?”
“예. 이 대협께서 찾아주셨어요.”
“실례가 많았소. 귀인. 이 감사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소.”
갑작스러운 림주의 반응에 이현성은 얼떨떨했다. 하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이런 분위기라면 협상이 어렵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감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 역시 목적을 갖고 귀왕인을 돌려드린 것이니까요. 야 소저 아니, 소림주님의 약조가 있었습니다.”
“목적이시라면 어떤 것이오?”
목적이라는 이현성의 말에 림주는 긴장하는 눈치였다.
귀림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귀왕인을 돌려줄 정도의 약조라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닐 테니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래는 귀림을 제 휘하에 둘 생각이었습니다.”
“그건 불가하오.”
“알고 있습니다. 이미 소림주께 들었으니까요.”
이현성의 대답에 림주는 약간 안도를 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귀림이 안 된다면 그에 버금가는 요구를 해올 것임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경 흑도(黑道)를 제게 넘겨주십시오.”
“북경… 흑도를 말이오?”
예상치 못한 의외의 요구였다. 귀림에 비하면 오히려 가벼운 요구였다. 하지만 쉬운 것도 아니었다.
그가 요구가 쾌활림이 아닌 북경 흑도였기 때문이다.
“그 말은 북경 흑도를 일통한 후 넘겨달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제가 사적인 이유로 힘이 필요합니다. 그 중에는 세력이 필요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힘보다는 숨겨진 힘이 더 적격입니다. 그렇기에 북경 흑도가 필요합니다.”
이현성이 내각대학사인 문종학을 구해서 북경에 입성한 이유였으며, 귀왕인을 찾은 이유이기도 했다.
흑도의 힘은 무림 입장에서는 보잘것없었다. 흑도 조직이라고 해봤자 파락호들이 모인 것에 불과했다.
허나 그건 맞으면서도 틀린 말이었다.
대부분의 흑도 조직은 일반적인 인식처럼 파락호 수준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사파나 마도에서 퇴출된 고수가 숨어든 곳은 대부분 세외 아니면 청해였다. 그게 아닌 경우 그들은 신분을 바꾼 후 흑도로 들어간다.
이는 사파나 마도 고수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의외로 정파에서 파문된 경우에도 흑도로 전향하는 경우가 있었다. 마공이나 사술을 익혀서 파문당한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그 외에는 사파와 마도 역시 정파 출신인 그들을 배척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악감정을 갖고 공격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십대살문과 녹림 등의 힘도 무시할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음지에서 흐르는 돈과 정보는 상상을 초월한다. 대놓고 힘을 키울 수 없는 이현성의 입장에서는 흑도만큼 좋은 곳이 없었다.
“북경 흑도를 일통하기 위해서는 네 조직을 굴복시켜야 하오.”
“예상하고 있습니다.”
“쾌활림이야 애초 귀왕인을 찾기 위해서 만든 것이니, 귀인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드릴 수 있소. 청살당 역시 멸문한 이상 큰 문제는 아니오.”
황실을 흔히 복마전이라고 말한다. 권력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권모술수, 중상모략이 난무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황실의 권력자들이 살고 있는 권역이 바로 황도였다. 당연히 살문들이 많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십대살문에 속하는 청살당이 사라진 이상 아니, 청살당이 존재한다고 해도 귀림이 정리 못 할 이유는 없었다.
문제는 나머지 두 조직이었다.
“문제는 일락방과 만금전장이외다.”
“쾌활림이 아닌 귀림이라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가능은 하오. 하지만 뒤탈이 문제요.”
“…뒤탈 말씀이십니까?”
예상치 못한 림주의 말에 이현성은 입을 다물었다.
뒤탈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면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일락방과 만금전장에 숨겨진 고수들이 있소. 물론 본림이 감당할 수 있으나 그 뒤에 있는 배후까지는 감당할 수가 없소.”
“…….”
감당하기 힘든 것도 아닌 감당할 수 없다는 말까지 나왔다. 배후가 보통이 아니란 뜻이었다.
이현성은 신중해졌다. 쾌활림주의 말이 이어졌다.
“만금전장의 배후에 동창이 있소.”
“……!!”
“제독동창은 아닌 듯싶으나 동창을 움직일 정도의 실력자임은 확실하오.”
동창의 행사는 은밀했다. 그만큼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비공식적으로 소모해야 하는 자금 역시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자금 확보를 위해서 몇 가지 사업을 비공식적으로 운영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만금전장이었다. 동창의 수장인 제독동창은 아니라고 하지만 동창을 움직일 정도의 실력자라면 가볍게 볼 수 없었다.
“그럼 일락방은…….”
“구문제독부이외다.”
“……!!”
동창보다 더 놀라웠다. 설마 구문제독부일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당대 구문제독은 역대 구문제독 중에서도 가장 강했다.
무위만 아니라 권력은 물론 다방면에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런 구문제독부가 흑도 조직을 휘하에 두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구문제독부 아니, 북궁세가는 이미 여러 이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흑도 조직을 휘하에 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정확히 구문제독부는 아니오. 허나 그들이나 마찬가지요.”
“조금 더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구문제독의 아들이자, 현 북궁세가주의 동생인 북궁성우. 그가 일락방주이외다. 그리고 그를 보좌하는 일락방의 수뇌 중에는 퇴직한 구문제독부의 군관들이 여럿 있소. 비록 내놓은 자식이라지만 만약 누군가 손을 댄다면 가만히 두고만 보지는 않을 것이오.”
구문제독의 장남 북궁성후는 아비의 기대를 충족시킨 훌륭한 아들이었다.
허나 차남은 그렇지 못했다. 욕심은 많은데, 그에 비해 능력이 부족했다.
그래도 구문제독의 아들이고 나름 북궁세가의 직계라서 능력이 완전히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젊어서부터 사고를 많이 치더니, 무관이 된 후에도 그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결국 폭발한 구문제독은 북궁성우를 내쫓아버렸다.
그러자 북궁성우는 오래전부터 함께 지내던 부하들을 이끌고 도박장을 차렸다. 도박광다운 발상이었다. 친형인 북궁성후가 보이지 않게 뒤에서 도와주니 흑도 사대조직으로 성장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무리 귀림이라고 해도 동창과 구문제독부까지 건드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귀왕을 잃고, 봉문하는 동안 힘이 줄어든 귀림으로서는 더더욱 그랬다.
‘동창에… 구문제독부라… 어렵겠지. 아, 꼭 불가능하지만은 않아.’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상황만 잘 이용하면 가능할 것 같기도 했다. 동창과 구문제독부를 정면으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면 희망이 있었다.
“동창과 구문제독부 문제는 해결하면 가능하단 말씀이시죠?”
“그야 그렇소만… 가능하겠소?”
쾌활림주의 물음에 이현성은 미소로 화답했다.
어떤 방법일지 모르지만, 귀왕인을 되찾아준 그라면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았다.
‘통해야 할 텐데…….’
* * *
“이, 이천 냥입니다. 추, 축하드립니다.”
“고맙소.”
북경 최대 도박장 일락방.
최고의 향락도시인 소항(蘇杭, 소주와 항주)의 도박장들과 비교해도 결코 규모에서 밀리지 않는다는 도박장이었다. 그런 일락방이 발칵 뒤집어졌다.
“저, 저 청년이 도왕(賭王)이라도 된단 말인가!”
“일락방주도 저 정도는 아닐 텐데 말이야.”
처음에 제법 귀티 나는 청년이 일락방에 방문했을 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봉이라고 생각하며 접근하는 자가 있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은 몇 냥을 따고 잃었기에 주목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수십 냥씩 따더니, 판돈이 수백 냥이 되었다.
결국 이번에는 이천 냥을 호주머니에 넣게 되었다.
어느덧 관중들까지 생길 정도가 되었다.
같이 노름을 하던 손님들만 아니라 일락방 소속 도수(賭手)들까지 돈을 잃기 시작했다. 즉, 일락방 역시 손해를 보았다.
“제가 끼어도 되겠습니까?”
“본인은 상관없소.”
“일락방의 총관인 도광(賭狂)!”
도수들 사이에서도 명성 높은 인물이 바로 도광이었다.
항주에서 활동하는 도왕들조차 인정한 인물이 바로 그였다. 그가 등장하자 관중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일락방의 반격이 시작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부는 청년을 동정했다. 지금까지 딴 돈은 물론 수중의 모든 돈을 잃게 생겼다며 안타까워했다.
“필부는 이가요.”
“이 공자이시군요. 검패(劍牌)는 어떻습니까?”
“상관없소.”
“말이 적으신 분이군요.”
청년의 말에 도광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뱀과 같았다.
이를 본 관객들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도광은 여러 도박에 능했으나 그중 검패에 가장 능했기 때문이다.
모두들 예상했다. 청년이 모든 재산을 잃고 거리에 내쫓길 미래를.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청년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 * *
“이, 이십만 냥! 이 미친 자식이!!”
은 두 냥이면 4인 가구가 한 달 간신히 살 수 있었다.
허나 그건 입에 풀칠할 정도였다. 최소 서너 냥은 되어야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했다. 물론 가난한 민초들의 경우다. 그렇다고 해도 은 이십만 냥은 엄청난 금액이었다.
웬 호구 하나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수만 냥을 따갔다. 결국 총관인 도광이 나섰다.
나간 돈은 모두 회수할 거라 생각하면서 여유 있게 시작을 했다. 허나 그건 착각이었다. 돈을 회수하기는커녕 더 많이 잃었다. 일락방주는 뒷골이 땅겼다. 그에게도 이십만 냥은 쉽게 볼 수 없는 금액이기 때문이다.
“가서 총관 이 새끼 끌고 와! 내가 직접 간다!”
“예. 방주님.”
더 이상 분을 참지 못하고 일락방주가 일어났다.
그는 도귀(賭鬼). 도박의 귀신이었다.
나간 돈을 되찾고 일락방의 위신을 되찾을 것이다.
허나 그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도광은 계속 돈을 잃고 있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