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오랜 시간 비고에서 잠을 자고 있던 물건일 뿐이다.”
“허나 비밀을 풀 수 있었다면 폐하께 큰 힘이 되어줄 물건입니다.”
“물유각주(物有各主)라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까지 연이 닿지 않았다면 애초 짐과는 연이 없었다는 뜻일세.”
담담히 말하는 황제와 달리 천위령주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것에 담긴 비밀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엄청난 공능을 가질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천위령주를 보며 황제가 나직하게 말했다.
“…자연스럽게 그 아이에게 흘러갈 수 있게 처리하게. 그리고 천위령주… 과한 욕심은 화를 면치 못한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게.”
“조, 존명!”
명령을 받은 천위령주는 바로 사라졌다. 그런 그의 빈자리를 보며 황제는 차가운 말을 흘렸다.
“역시 그 친구만 한 인재는 없군. …그에게는 무거운가 보군. 천위령이 말이야.”
뛰어난 인재인 전임 천위령주를 떠올린 황제는 천위령주의 교체를 고려하게 되었다.
“…기대해보지.”
* * *
“…제 도법을 봐주십시오.”
“초식의 연계가 부자연스러운 이유를 아십니까?”
“이 교두님…….”
이현성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한숨이 나왔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장원에 손님이 찾아왔다. 문제는 그들이 문태규 혹은 위표를 핑계로 찾아와서 이현성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어찌된 것인지 내각대학사의 식객이 금의위를 가르친다는 소문이 퍼졌다.
게다가 구문제독의 장손이자 군부에서 기대하는 후기지수 북궁무한이 처참하게 깨졌다는 말까지 퍼졌다.
그 후 젊은 무관들이 이현성에게 도전해왔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를 ‘이 교두님’이라고 부르며 가르침을 청하고 있었다.
‘이래서는 곤란해.’
자신이 북경에 온 이유는 힘을 키우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힘을 키우기도 전에 주변의 주목을 받는 이 상황은 결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가르침을 원하며 찾아오는 무관들을 딱 잘라서 거절하기도 힘들었다.
지금은 하급 무관들이지만, 일이십 년 후에는 각 부대의 중요한 중간 간부가 되어 있을 자들이기 때문이다.
관과 무림이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고 해도 그 인연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좋은 관계를 맺는 게 좋다.
‘슬슬 부상도 회복되어가고 있었기에 움직일 때가 되어 가는데… 어찌해야 하나.’
그가 이곳 북경을 거점으로 삼은 이유가 있었다.
게다가 조만간 부상 역시 완쾌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 더 이상 무관들에게 시간을 빼앗길 수만은 없었다.
이런 저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의 기척이 느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평범한 사람의 기척이었다. 예상대로 하인 중 한 명이었다.
“이 대협. 대인께서 뵙기를 청하셨습니다.”
“문 대인께서? 알겠소.”
문종학이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이현성은 서둘러 발걸음을 움직였다.
“오셨소이까.”
“절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문종학은 이현성을 반갑게 맞이했다. 근래 바쁜 일이 있는지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런 그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이현성은 어리둥절했다. 그런 그를 향해 차를 권했다.
“우선 차를 한잔 드시겠소.”
“예. 한 잔 주십시오.”
이현성이 올 때를 맞춰서 준비했는지 차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차를 한 모금 마셨을 때였다.
“동문에게 연락이 왔는데, 이 대협의 가족들이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다고 하더이다.”
“그렇군요.”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현성은 담담했다.
허나 약조한 문종학의 입장에서는 달랐다. 이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강구하고 있소.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겠소?”
“제 걱정은 마십시오. 그들이 살아 있다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겠지요.”
이현성의 말에 문종학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흡사 가족들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드러낼 문종학이 아니었다.
“그리고 일전에 말씀드렸던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일전이라시면… 아!”
문종학은 비단으로 쌓인 길쭉한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를 본 순간 이현성은 비단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풀어보셔도 되오.”
“예. 대인.”
문종학의 권유에 이현성은 비단을 펼쳤다. 그러자 예상했던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바로 한 자루의 검(劍)이었다.
특별한 장식은 없으나 검 자체에서 주는 기품이 느껴졌다.
이것만 봐도 보통 검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상당히 가벼웠다.
이현성은 검파(劍把, 검자루)를 쥐곤 검집에서 뽑았다.
검파를 쥔 느낌이 나쁘지 않았고, 제법 날이 잘 섰다.
“마음에 드시는지 모르겠소.”
“좋군요. 명장이 제련했는지 검의 균형이 매우 뛰어나군요. 게다가 보통 철이 아닌 것 같습니다.”
검집에서 드러낸 검신(劍身)의 자태는 더욱 대단했다.
균형이 완벽한 것은 물론이고 날 역시 잘 서 있었다. 그중 가장 놀라운 것은 철이었다.
‘한철(寒鐵)인가? 한철치고는 가벼운데?’
보통 명검을 만들 때는 소량이라도 현철(玄鐵) 혹은 한철을 섞는다. 그것만으로 철의 강도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검신에서 미묘하지만 한기를 띠고 있기에 한철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만 한철이 소량만 들어갔는지 상당히 가벼웠다. 하지만 그런 것치곤 제법 단단해보였다.
고수인 이현성은 검을 쥔 것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 검은 명검 아니, 보검이라는 사실을.
“각사난중(各司郞中)으로 있는 동문이 소개해준 황실야장이 내어준 검이외다.”
육부 예하 실무를 담당하는 부서를 경력사(經歷司)라고 하고, 그 경력사의 수장이 바로 정오품인 각사난중이었다.
관병들이 사용할 도검이나 창의 경우는 계약을 맺은 상단에서 공급하지만, 황실고수들이 사용하는 도검은 황실야장이 직접 제련을 한다.
황실야장이 제련한 무기를 사사로이 챙겨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문종학은 황실야장에게 돈을 지불하고 구입한 검이었다.
황실야장은 예전에 제련해두고도 아까워서 내놓지 않았던 역작이라고 했다.
“마음에 드시오?”
“이런 과분한 검을 제가 받아도 될지…….”
“하하. 이 대협께서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오.”
물욕을 드러내지 않던 이현성이 진심으로 만족스러워하자 문종학 역시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움직이려면 검이 필요했는데, 이런 보검이라니… 운이 좋아.’
생각 이상으로 좋은 검을 얻은 것에 이현성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그것이 그의 손에 들어온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들이
“오라버니. 어디 가시나요?”
“교교구나. 잠시 바람 좀 쐬려고.”
가벼운 무복에 검 한 자루를 쥔 이현성이 오랜만에 별채를 나섰다.
부상을 회복한 이현성은 바람을 쐰다는 명분으로 나섰으나 실제 목적은 달랐다.
그런 그의 말에 문교교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좀처럼 장원 밖을 나가지 않는 그였기 때문이다.
“바람이요? 생각해두신 곳이라도 있으세요?”
“민충사에 다녀올까 생각 중이다.”
“선무문(宣武門) 부근에 있는 그 민충사요?”
고구려 정벌을 꿈꾸던 당태종이 군사를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아무런 성과 없이 귀환한 당태종이 군사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세운 절이 바로 민충사(憫忠寺)였다.
800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진 고찰(古刹)이었기에 유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 순간 문교교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를 본 이현성은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물론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헤헤. 오라버니.”
“으…응…….”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어? 안… 된다기보다는…….”
그녀의 말에 이현성은 당혹스러웠다.
그가 민충사에 가는 것은 명분처럼 바람을 쐬기 위함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찾기 위한 사전답사였다.
그렇기에 홀로 움직여야 하는데, 문교교라는 혹이 붙는다면 행동의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내각대학사의 여식이 장원 밖을 나가는데, 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녀의 시중을 둘 시녀와 호위할 무사들 역시 대동해야 한다.
인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의 행동 제약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거절하려고 했으나 초롱초롱한 그녀의 눈망울에 이현성은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럼 되는 거죠?”
“하… 그래. 같이 가자꾸나.”
“자,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얼른 채비하고 올게요!!”
“기다릴 테니까 조심! 조심히 다녀와!”
이현성의 허락에 기쁜지 문교교는 헐레벌떡 뛰었다.
그런 뒷모습에 이현성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짓고 말았다.
“좋게 생각하자. 교교랑 같이 다녀오는 것이 오히려 의심을 사지 않겠지.”
어차피 오늘은 민충사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주변의 의심을 사지 않으면서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그렇게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며 문교교를 기다렸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저희도 동행하겠습니다. 교두님.”
“동행은 허락하지만… 변복(變服)을 할 수 없나?”
채비를 마친 문교교는 시녀인 향아와 함께 나왔다.
그녀들을 호위하듯 금의위사들이 이현성에게 다가왔다. 문제는 그들의 복장이었다.
금의위의 정식관복인 비어복(飛魚服)을 입고 있었다.
이곳 황도에서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비어복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금의위란 황제의 검이다.
백성들은 물론 관리들 역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런 금의위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다닌다면 편하게 유람을 할 수 없었다.
당연히 민충사의 구조를 파악하려는 이현성의 의도 역시 이룰 수 없었다.
“변복(變服) 말입니까?”
“가볍게 바람을 쐬러 가는 길인데, 이래서는 마음 편히 갈 수가 없지 않은가.”
비어복(飛魚服)은 금의위의 상징.
그렇기에 내각대학사의 장원을 경비하면서도 비어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허나 나들이의 호위로서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었다.
결국 선임 위사인 시백호(試百戶) 엄환을 포함해 금의위사 셋이 변복하고 돌아왔다.
어차피 절정고수인 이현성이 함께 있는 이상 더 많은 호위는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형님. 저도 함께 가고 싶지만 해야 할 일이 있어서…누이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 마라. 민충사를 다녀오는 것뿐이니까.”
불행 중 다행인지, 문태규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번에는 동행하지 않게 되었다.
일거리 하나가 준 셈이었다.
그렇게 여섯 명이 장원을 벗어나 민충사로 향했다.
“와~”
문교교와 그녀의 시녀 향아의 입이 다물어질 줄 몰랐다.
민충사에 향객들이 많은 이유는 유서 깊은 고찰답게 수많은 불상과 석탑 그리고 불당들 때문이다.
허나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곳곳에 핀 정향나무의 꽃이 너무도 아름다워 여인들의 발길을 붙잡기도 했다.
꽃다운 나이의 소녀들인 그녀들이 탄성을 지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녀들의 모습에 금의위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오라버니! 저것 좀 보세요!”
평소에는 조신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으나 문교교는 아직 열여섯. 꽃의 아름다움에 한창 즐거워할 나이였다.
불상과 석탑 등을 볼 때는 약간 지루해하더니, 꽃들을 보니 들떠 보였다.
결국 꽃에 정신이 팔려 있다보니 지나가는 향객과 부딪히는 실수도 하고 말았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