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그리고 반가운 마음이 들어 큰소리로 외쳤다.
그런 그를 타박하는 여인 아니, 소녀가 있었다.
문태규의 누이이자 문종학의 장녀인 문교교였다.
“두 사람 모두 무사하니 다행이군요. 대인께서는…….”
“아버님께선 취임준비를 위해 입궐하셨어요. 그리고 오라버니. 저희에게 말을 낮추셔요.”
“맞습니다. 형님. 왜 말을 다시 높이십니까?”
“그래. 알겠다.”
문태규와는 호형호제하게 되었으니 말을 내렸지만, 문교교의 경우는 이렇다고 할 관계형성이 된 것이 아니었기에 말을 높였다.
하지만 그녀 역시 이현성을 오라버니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대했다.
그가 쓰러진 사이, 이현성을 오라버니로 대하라는 아비 문종학의 말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문교교 역시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얼굴을 붉힌 채 이현성과 눈을 맞추지 못하는 문교교를 보던 문태규의 입가에 장난기가 어렸다.
“누이. 얼굴이 붉네? 그리고 왜 형님의 눈을 못 봐?”
“규, 너~어!”
“히히!!”
두 남매의 정감 어린 대화에 이현성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생사도 알 수 없는 두 동생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잘 살고 있는지…….’
제때 천검(天劍) 한승의 장원에 도착했다면 살았을 것이고, 아니라면… 안타깝게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현성은 한승의 장원을 찾아갈 수 없었다.
아직은 가족들을 만나러 갈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자신이 혈천에 팔려 감으로써 한번 화를 당한 가족들이었다. 어쩌면 자신과 거리를 두는 것이 그들의 안전에 나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가족들을 지킬 힘을 가지기 전까지는 그들을 찾아갈 수 없었다.
“저희가 쉬시는데 방해되었네요. 규야. 그만 나가자.”
“응. 형님. 쉬세요.”
“그래.”
두 남매가 돌아가자 이현성은 가부좌를 틀고 운기행공을 했다. 몸이 불편하였기에 기력을 되찾기 위함이었다.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내공이 늘었다?’
실전보다 좋은 공부는 없는 법이었다.
십대살수인 청살괴옹과 생사결을 나눈 덕분인지 자신도 모르게 진전이 있었다.
내공이 늘어난 것이 그중 하나였다.
물론 초절정 지경에 오르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했다.
하지만 이제 곧 열여덟이 되는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빨라도 너무 빠른 진전이었다.
‘강해져야 해. 혈천을 상대하기도 전에 죽을 순 없으니까.’
* * *
“진행 상황이 어떻게 되는가?”
이현성이 황도에서 깨어났을 때 혈살동에서는 수련이 한창이었다.
혈살객 후보들은 목숨을 걸고 수련했다.
목숨을 걸 정도로 치열하게 수련한다는 것이 아닌 정말로 목숨을 걸어야 했다.
순간의 방심으로도 목이 날아가기 때문이다.
“현재 이관에 155명, 삼관에는 74명, 사관에서 21명이 수련 중입니다. 동주님.”
“벌써 사관에 21명이라… 기껏해야 열 명 내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법이군.”
혈살동은 여섯 개의 훈련단계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를 혈살육관(血殺六館)이라 칭했다.
처음 입동한 인원은 약 삼백 명이었다.
지난 5년간 육십에 가까운 후보생들이 죽음을 맞이했다. 그만큼 혈살동의 수련은 치열했다.
그리고 이백오십 명이 현재 일관 이상을 통과했다.
물론 생존한 이백오십 명 전부가 이관에 수련 중인 것은 아니었다.
지난 5년간 그들의 실력 차이는 점점 벌어졌다.
그 결과 이미 이관을 통과해서 삼관, 심지어 사관까지 진입한 혈살객 후보도 있었다.
실로 놀라운 성장이 아닐 수 없었다.
“사관(四館)을 통과해야 정식 혈살객이 되는 거지?”
“예. 동주님.”
정식으로 혈살객이 되기 위해서는 혈살육관 중 최소 사관을 통과해야 한다.
혈살사관을 통과할 수 있어야, 홀로 절정고수를 암살할 수 있는 특급살수의 능력을 갖추기 때문이다.
그러한 혈살사관에서 수련 중인 후보가 벌써 21명이나 된다고 하니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관과 삼관에서 수련 중인 후보들 역시 인재인 만큼, 당장은 아닐지라도 상당수가 사관까지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과연 21명 중 몇 명이나 육관을 모두 통과할까? 기대가 되는군. 안 그런가? 부동주?”
혈살사관까지만 통과해도 정식 혈살객이 될 수 있었으나 혈살동은 육관까지 존재한다.
만약 혈살육관까지 모두 통과하면 무림백대고수 즉, 초절정고수조차 암살할 수 있었다.
애초에 초절정지경까지 올라야만 혈살육관을 통과할 수 있게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이현성이 회귀 전에는 단 다섯 명만 혈살육관을 통과했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혈살오객(血殺五客)이었다.
“…본인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동주.”
혈살동주의 물음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부동주가 대답했다.
마광수라(魔狂修羅).
혈무곡주였던 그는 현재 혈살동의 부동주가 되었다.
대군사로 인해 혈옥금수당에 배속될 뻔한 그는 대호법의 개가 되어서 간신히 혈살동에 올 수 있었다.
혈살동의 동주 역시 요직이라고 할 순 없지만, 요직에 오를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두고 볼 대군사가 아니었다.
그의 수작으로 혈살동주는 생사교의 교주였던 혈강야차(血剛夜叉)가 맡았다. 대신 마광수라는 부동주가 되었다.
대호법과의 계약에 의해 혁련후를 밀어줘야 하는 마광수라로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혈살동주인 혈강야차 때문에 혁련후를 지원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십 년… 앞으로 십 년 밖에 없다. 그 안에 최대한 많은 혈살객을 배출하라는 상부의 명이 떨어졌다. 그들을 조금 더 몰아세워서 더 강해지게 만들게.”
“존명!”
혈천은 대업의 시작을 십년 후로 보고 있었다.
그때까지 혈살객의 양성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혈살객들은 대업에 매우 큰 역할을 할 것이고, 그들을 양성한 자신들 역시 그 영광을 함께하게 될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동주는 물론 교두들 역시 어깨가 무거워졌다.
하지만 가슴은 더욱 뜨거워졌다.
그런 그들과 달리 마광수라는 골치가 아팠다.
‘그 미친놈들이라도 빨리 처리해야 하는데! 젠장!!’
* * *
“죽어라!!”
거대한 대검이 허공을 벴다.
그 무지막지함에 파공음마저 섬뜩했다.
그러나 더욱 섬뜩한 것은 대검을 휘두르는 거구의 청년이었다.
광기(狂氣)로 희번덕거리는 눈빛은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을 쪼그라들게 만들었다.
“미친 소 새끼… 지겹지도 않냐.”
자신을 쪼갤 것만 같은 섬뜩한 대검을 보고도 청년은 짜증만 냈다.
챙!
놀랍게도 청년은 거대한 대검을 가볍게 막아냈다.
“이놈!! 아직이다!”
“꺼져.”
그 순간 청년의 검이 거구의 청년에게로 향했다.
검 한 자루지만 수십 개로 변해서 쇄도했다.
챙! 챙! 챙! 퍽! 퍽!
거구의 청년도 보통이 아니었다.
거대한 만큼 그 무게도 보통이 아닐 것 같은 대검으로, 수십 개로 늘어난 건장한 청년의 검을 모두 막아냈다.
하지만 아무래도 역부족인지 대부분 막아냈음에도 몇 개의 검은 놓치고 말았다.
“쳇. 더럽게 단단한 몸뚱이군.”
“흐흐흐. 이제 내 차례… 큭!!”
놀랍게도 청년의 검은 거구의 청년을 뚫지 못했다.
이때를 노려 반격하려고 했으나 거구의 청년은 나가 떨어졌다.
“야! 미친 개(狂犬)! 미친 소(狂牛)를 데려가라!”
“…….”
청년의 외침에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호리호리한 청년이었다.
“지겨우니까 다른 놈이랑 놀아라. 귀찮다.”
“…….”
청년은 그들을 향해 비아냥거린 뒤 사라졌다.
호리호리한 청년이 쓰러진 거구의 청년에게 다가갔다.
“또 졌냐?”
“빌어먹을…….”
두 사람은 혈살동에서 쌍광(雙狂)이라고 불리는 자들이었다.
광견(狂犬) 초운비, 광우(狂牛) 철우.
그렇다. 그들은 이현성의 두 의제들이었다.
그런데 철우가 광기를 드러내며 싸운 상대는 혁련후가 아니었다. 아니, 두 사람은 사관에 있는 그와 달리 아직 삼관에 머무르고 있었다.
―얼마나 늘었냐?
―흐흐흐. 벌써 6성이다. 8성에만 오르면 그 빌어먹을 자식과 한판 뜰 수 있겠어.
―방심하지 마. 그 자식이 대호법의 손자라며. 분명 숨기고 있는 게 있을 거야.
―흥! 결국 그놈의 목을 따는 건 나야!
두 사람이 삼관에 머무르는 것은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비교적 덜 주목받으면서, 자유롭게 힘을 키우기 위해 일부러 힘을 숨겼다.
―너무 자신하지 마. 네 광룡마공(狂龍魔功)은 아직 불완전하잖아.
―기필코 완성하고 말 테니 걱정 말라고.
혈살육관은 각 관마다 수많은 무공비급과 잡학이 비치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단련한 뒤 그 다음 관으로 오르라는 뜻이었다.
일관(一館)만 해도 일류무공이 비치되어 있었다.
철우는 죽은(?) 의형의 조언대로 외공을 익히기 위해 비급들을 뒤졌다.
그러던 중 용신갑(龍神鉀)이라는 비급을 발견했다.
절세(絶世)라고 불리기에 부족하지 않은 외문기공이었다.
용력을 통해 육신을 단단하게 만드는 외공인 동시에, 용의 비늘처럼 수많은 내공의 비늘로 육신을 보호하는 호신기공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절세신공이 왜 일관에 비치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수련법과 그 원리만 남아 있고, 가장 중요한 내공구결이 남아 있지 않았다.
용신갑을 봤기 때문인지 그 외의 외공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구결도 모른 채 용신갑을 수련한 나도 미친놈이지. 크크크.’
철우는 무슨 생각인지 구결도 모르면서 용신갑을 수련했다. 그야말로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그의 행동을 신경 쓰지 않았다.
철우는 이미 미친놈으로 낙인찍혔기 때문이다.
‘이관에서 광마도를 발견하지 못했으면 큰일날 뻔했어.’
이관에서 찾아낸 광마도(狂魔刀)는 뛰어난 위력임에도 아무도 익히지 않는 도법이었다.
익히면 십중팔구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광마도와 용신갑이 묘하게 어울렸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광마도와 용신갑이 원래는 하나의 무공에서 나뉘어졌다는 사실을.
광마도의 구결과 용신갑의 수련법을 합치자 하나의 마공이 탄생했다.
그것이 바로 광룡마공(狂龍魔功)이었다.
―방심하지 말고. 그러다가 괜히 광룡(狂龍)에게 먹힌다.
아쉽게도 광룡마공은 온전하지 못했다.
두 무공을 연결해줄 핵심구결이 빠진 느낌이었다.
혹시 삼관에 그것이 있지 않을까 찾아봤으나 아쉽게도 그런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룡마공은 대단했다.
외문기공처럼 육신이 단단해지고, 힘이 강해졌으며, 내공이 심후해졌다. 다만 제어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더욱 곤란한 것은 수련방식이었다.
두들겨 맞으면서 광룡마공을 안정시켜야 한다.
정확히는 핵심구결이 빠진 탓이었다.
그렇기에 철우가 비무를 빙자해 두들겨 맞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바로 미친 용의 기운을 길들이기 위함이었다.
방심하는 순간 정신을 먹어치우려고 하니 방심은 금물이었다.
―나는 그렇다 치고… 넌 어때? 성취가 좀 있어?
―아쉽지만…….
철우는 용신갑과 광마도를 통해 광룡마공을 익힐 수 있었지만, 초운비는 이렇다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쌍단술의 비급이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십자혈검(十字血劍)이라는 쌍검술을 변형해 익히고 있었으나 쉽지가 않았다.
장검으로 익히는 쌍검술을 단검술에 맞게 변형하는 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그렇다 해도 독기를 품고 무식하게 수련하니, 삼관까지는 무난히 올 수 있었다.
―성님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는 그 개자식을 죽여야 해!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강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마!
사실 따지고 보면 이현성을 죽게(?) 만든 것은 혁련후가 아니었다.
이현성은 철우의 대검에 죽었으니까.
그러나 그 상황을 만든 것이 혁련후임을 알았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혁련후, 나아가서 혈천의 대업을 방해해서 복수하려고 했다.
물론 불가능에 가까운 꿈이었지만 앞날은 아무도 몰랐다.
‘성님.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복수를 끝내고, 이 아우도 성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