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부당주를 포함해 청부자를 알려줄 몇 명을 제외하면 몰살이었다.
이로써 십대살문의 한곳인 청살당이 괴멸당했다.
물론 탈명회를 정리하기 위해 떠난 살수 일부가 있었으나 그쪽으로도 황실고수들이 움직였다.
잠시 후, 군막에서 중년 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각대학사로 내정된 문종학이었다.
“귀관은 누군가?”
“금의위 천호(千戶) 추윤이 문 대인을 뵙습니다.”
내각대학사로 내정되었으나 정식으로 임명되기 전이었기에 대인이란 칭호로 대신했다.
문종학은 주변을 둘러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 한 명 때문에 너무나도 많은 희생이 발생하여 마음이 아팠다.
그런 그의 심정을 읽었는지 추윤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들의 희생은 폐하를 향한 충정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희생을 애도하지 마시고, 자랑스럽게 생각해주십시오. 대인.”
“…….”
문인인 문종학으로서는 무관인 추윤의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의 말을 부정하면 희생된 군사들의 죽음이 하찮아지기 때문이다.
“그보다, 대인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은공의 안배 덕분이었네.”
“은공이시라면…….”
청살당의 부당주가 군막을 확인했을 때는 분명 비어 있었다. 그런데 문종학은 비었어야 할 군막에서 나왔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은 이현성의 안배 덕분이었다.
이현성은 살수들을 제거하기에 앞서, 만약을 대비했다.
문종학 일가가 잠이든 군막 안에 부적술을 이용해 간단한 결계를 친 것이다.
일시적으로 모습을 가려주는 효용을 가진 결계로, 청살당의 부당주를 속였으니 제 몫을 톡톡히 한 셈이었다.
전투가 끝날 때까지 군막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이현성의 서신 때문에 지금까지 기다리고만 있었다.
“은공… 은공은 무사하신가!”
“대인. 이 대협께선 위중하시나 다행히 살아계십니다!”
“살리게! 무조건!”
살수들을 섬멸한 위표는 곧장 이현성의 상태를 살폈다.
가슴뼈가 드러날 정도로 위중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포영심결이 또 한 번 이현성의 목숨을 지켜주었던 덕분이었다.
이현성을 경계하던 위표는 이제 그를 완전히 신뢰하게 되었다. 그 증거로 호칭 역시 대협으로 바뀌었다.
그러던 중 위표는 실소를 터뜨렸다.
‘웃고 계시다니… 정말 별난 분이구나.’
의식을 잃은 이현성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황도
“으아악!!!”
“사, 살려… 컥!”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부 소리와 돈이 쌓이는 소리로 가득했던 저택에서 발생한 일이었다.
그 비명 점점 가까워졌다.
벌컥!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무관들이 들이닥쳤다.
그런 그들을 보며 한 중년인이 소리쳤다.
“이놈들!! 내가 누구인지 모르더냐!!”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이부상서 공 대인이 아니십니까.”
명나라 최고의 실무 행정기관 육부(六部).
그런 육부 중 한 곳인 이부(吏部)는 관리들의 인사(人事)를 담당하는 부서였다. 그리고 육부의 각 수장들의 직위가 바로 상서(尙書)다.
즉, 눈앞의 중년인은 관리들의 인사권을 손에 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정이품의 고관대작이란 뜻이었다.
그만큼 날아가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권세를 가졌다.
그런 그를 보며 히죽이는 인물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이게 누군가! 좌부도어사(左副都御史)가 아닌가!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공 대인. 협조해주신다면 마지막 체면만은 지켜드리겠습니다.”
무관들의 뒤에 있던 중년인이 앞으로 나왔다.
육부가 실무 행정기관이라면 도찰원(都察院)은 중앙 감찰기관이었다.
도찰원은 임무가 임무인 만큼 부패되기 쉽다.
이에 수장인 도어사(都御司) 두 명을 임명했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하라는 의미였다.
부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부도어사(副都御史) 역시 두 명 존재했다.
좌부도어사는 도찰원의 두 명의 부수장 중 한 명으로, 정삼품의 고관대작이었다.
좌부도어사의 말에 이부상서가 얼굴을 구겼다.
“좌부도어사! 자네가 감히 내게!!”
“공 대인.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셨구려. 호부상서 종 대인께서 이미 모두 시인하셨소.”
“……!!”
이부상서는 당황했다.
호부는 이부와 함께 육부의 하나로, 재정을 담당하는 부서였다. 그런 호부의 수장이 바로 호부상서다.
두 사람은 육부의 상서라는 공통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황하는 이부상서에게 쐐기를 박듯 좌부도어사가 말을 이었다.
“국자감 제주(祭州), 통정사 우통정(右通政)에게도 첨도어사(僉都御史)들이 갔소.”
“나, 나는 아닐세! 저, 정말 아닐세!!”
조금 전까지 호통을 치던 사람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이부상서는 비굴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좌부도어사는 이런 것에 눈 하나 깜짝할 위인이 아니었다.
“뭐 하느냐. 어서 공 대인을 모시지 않고.”
“예. 부도어사 어른.”
아직 정식으로 파직당한 것이 아니기에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주려고 했으나, 이부상서의 행태에 결국 강제할 수밖에 없었다.
도찰원 소속 무관들이 이부상서의 양팔을 잡았다.
이부상서는 버둥거렸으나 문관인 그가 무공을 익힌 무관들에게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그는 악을 쓰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놈들! 폐하께서 네놈들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폐하께서!!”
“공 대인 아니, 공소필. 네놈들을 잡아들이라고 명하신 분이 바로 황제 폐하이시다. 감히 폐하께서 황도로 불러들인 내각대학사 내정자를 암살하려고 해?!”
이부상서 공소필은 절망하고 말았다.
황명이 떨어졌다면 저항은 무의미했다.
축 처진 공소필은 도찰원 무관들에게 끌려가다시피 하여 황실로 향했다.
* * *
“폐하. 모두 자백했습니다.”
“수고했네. 좌도어사(左都御司).”
감찰기관인 도찰원의 수장이자 정이품의 고관대작인 좌도어사.
그런 막강한 권력을 가진 그도 부복하게 만드는 인물은 바로 황좌의 주인, 명의 5대 황제인 선덕제(宣德帝) 주첨기였다.
“‘그’는 어찌 되었는가?”
“죄송합니다. 폐하. 아쉽게도 꼬리를 잘랐는지 내각대학사 내정자에 대한 청부는 인정했으나, 그 외에는 일체 부정하고 있사옵니다.”
“아닐세. 그럴 테지. 쉽게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지는 않았네.”
신임 내각대학사의 내정. 그리고 내정자인 문종학을 황도로 불러들인 사실에 대한 정보유출.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불온의 꼬리를 잡기 위한 황제가 판 함정이었다.
그런 그의 노림수대로 줄줄이 엮여 들어왔다.
상소와 칙령 등을 관리하는 통정사(通政司).
그런 통정사의 부수장 중 한 명인 우통정(右通政).
그는 황제가 문종학을 황실로 불러들였다는 사실을 이부상서와 호부상서에게 전했다.
그들은 차기 내각대학사로, 교육을 총괄하는 국자감의 수장인 제주(祭州)를 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문종학이 차기 내각대학사가 되면 무척이나 곤란했다.
결국 그들은 황제가 노린 대로 무리수를 두었고, 결국 이렇게 압송되었다.
문제는 몸통인 그들과 달리 머리라고 할 수 있는 배후는 엮어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그의 팔다리 중 하나가 잘려 나간 것만으로도 운신의 폭이 줄어들었겠지. 그것으로 만족하겠네.”
“망극하옵니다. 폐하.”
천하의 주인인 황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존재.
그러나 그런 황제의 자리가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가진 권력만큼 짊어져야 할 짐 역시 어마어마했다.
게다가 천자의 자리는 외로웠다. 자신의 짐을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이, 홀로 짊어져야 했다.
황제의 측근 중 한 명인 좌도어사는 주군인 황제를 보면 안타까울 뿐이었다.
‘폐하. 소신이 지켜드리겠사옵니다.’
좌도부어사가 돌아간 후 대전에는 황제 혼자만 남았다.
황제가 나직하게 말했다.
“령주(令主). 알아봤는가.”
“만세 만세 만만세. 신(臣), 천위령주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아무도 모르는 황제의 그림자, 천위령(天衛令)이었다.
조카를 강제로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된 영락제.
그는 언제 또 자신과 같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황권을 강화했다.
정보기관인 동창을 세운 것도, 오천에 불과했던 금의위를 이만 명 이상 양성한 것도 모두 영락제의 명령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안심할 수 없던 영락제는 자신은 물론 후대 황제를 위해 몇 가지 안배를 마련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천위령이었다.
“문종학 대인에게 접촉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우연이 아니었다? 그럼 역시 그의 꼬리인가?”
“송구스럽사오나 아직 이렇다고 할 증거는 물론 정황 역시 포착되지 않았습니다.”
“허허. 천위령 아니, 흑점에서 알아내지 못했다? 재미있군.”
흑점(黑店).
의뢰의 중개, 장물의 처분, 정보의 판매 등 공식적으로 거래할 수 없는 모든 것을 거래하는 집단이었다.
게다가 점조직으로 구성되었기에 총점주가 누구인지조차 알려지지 않은 신비한 집단이었다.
그들의 정보수집 능력은 대단하였기에 개방, 하오문과 함께 3대 정보집단이라고 불린다.
그 정보의 방대함은 동창조차 따라잡지 못한다고 알려졌다.
그런 흑점이 황실과 연관 있다고 하니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천위령은 황제의 수호자이자, 황제의 밀명을 전달하는 사자(使者)이었다.
쿵! 쿵! 쿵!
천위령주가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그만. 되었다. 령주의 잘못이 아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제가 손짓하자 천위령주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다시 침묵만 존재했다.
황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지켜보도록 할까. 뭘 하려는지 말이야.”
* * *
“으…윽!!”
고급스러운 비단이불을 덮고 있던 청년은 고통스러운지 신음을 흘렸다.
그런 그를 지켜보던 한 소녀가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그러는 사이 청년은 눈을 떴다.
“…여긴… 어디지…….”
화려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고풍적인 분위기의 방이었다.
청년은 낯선 공간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때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아, 깨셨군요. 잠시 상세를 살펴도 되겠습니까? 공자님.”
“…그러시지요.”
방 안으로 들어온 인물과는 초면이기에 경계심을 거둘 수는 없었으나, 의원으로 보였기에 수락했다.
의원은 청년의 맥을 살핀 후 가슴의 상처 역시 확인했다.
“큰 부상이긴 하나 다행히 고비는 넘겼습니다. 탕약을 꾸준히 드시고 정양하신다면 완쾌되실 겁니다.”
“아, 예… 그런데…….”
“말씀하십시오. 공자님.”
“여긴… 어딥니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니.
청년의 물음에 중년 의원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오랫동안 의식을 잃었던 만큼 그럴 수 있다고 판단했는지 정중하게 알려주었다.
“문종학 대학사님의 장원입니다.”
“아, 그렇군요.”
청년 아니, 이현성은 자신이 황도(皇都)인 북경에 도착했다는 사실과 문종학이 무사히 내각대학사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확히는 정식 취임 전이었지만 내각대학사로 임명된 듯했다.
의원이 돌아가자 한 소년이 들어왔다.
“형님! 깨어나셔 다행입니다! 정말!”
“규야. 오라버니께서 이제 막 깨어나셨는데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면 어떡하느냐.”
“아… 죄, 죄송합니다. 형님.”
문태규는 자신들을 위해 싸우다가 쓰러진 이현성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연락을 받고 바로 뛰어왔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