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금의위 백호인 위표의 명에 금의위사 서광이 물러나며 마차로 향했다. 그 대신 위표가 서광의 자리로 향했다.
거웅채주에게 밀렸으나 위표 역시 절정고수인 만큼 다른 녹림도는 그의 상대가 아니었다.
죽어나가는 것은 녹림도들이었다.
절정고수인 거웅채주가 정체불명의 청년에 의해 발이 묶였다.
그러자 전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 조급해지는 것은 거웅채주였다.
쾅!!
“네놈!! 감히 녹림의 일을 방해하냐!!”
마음이 조급해진 거웅채주는 잔뜩 흥분했다.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동작이 커지고, 빈틈이 많아졌다.
이러한 사실을 거웅채주 본인은 인식하지 못했다.
그때 거웅채주의 귓가로 청년의 전음이 들려왔다.
―미안하지만 날 위해 죽어줘야겠어.
흠칫!
깜짝 놀란 거웅채주가 본능적으로 철곤을 휘둘렀다.
그런데 청년은 피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달려들었다.
“미친놈… 컥!!”
“귀령박(鬼靈搏), 일점홍(一點紅).”
청년은 거웅채주의 철곤을 왼손으로 흘려보내고, 오른손에 쥔 검을 찔러넣었다.
단 한 호흡에 일어난 일이었다.
비록 녹림의 수뇌라는 십팔채주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칠십이채주 중 한 명이었던 거웅채주.
그런 그가 고작 약관도 채 되어보이지 않는 청년의 손에 죽어버렸다.
‘내각대학사 문종학… 당신은 내 배경이 되어주셔야겠어.’
거웅채주가 죽음으로써 싸움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그러나 이미 수많은 희생을 치른 후였다.
“서광. 가까운 관아로 가서 관병들을 차출해오고. 엄환. 전우들의 시체를 모아라.”
“충!”
“충!”
금의위사는 위표 본인을 포함해 여섯, 금위군사는 고작 스물셋으로 절반만 살아남았다.
포로로 잡힌 거웅채 녹림도 삼십여 명의 처리는 물론 임무를 완수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위표는 잠시 이곳에서 대기하며 가까운 관아의 지원을 받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오합지졸인 관병들이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음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관병들의 합류에 앞서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본관은 금의위 백호 위표라고 하오. 도움에 감사하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무례임을 알지만… 묻겠소. 소협은 누구요?”
“…저는 이현성이라고 합니다.”
청년의 정체는 바로 이현성이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일류고수에 불과했던 그였으나, 삼목금섬의 내단과 귀혈삼을 복용한 덕분에 이갑자(二甲子, 120년)의 내공을 손에 넣었다.
그조차 모든 영기를 흡수한 것이 아니었다.
아직 육신이 감당하지 못했기에 나머지 기운들은 포영심결과 함께 근골, 혈맥에 잠들어 있었다.
이현성은 회귀 전에 이미 초절정 지경까지 올랐던 고수였다.
당시의 기억과 이갑자의 내공을 기반으로 절정지경에 오르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절정고수가 된 이현성은 곧바로 이곳으로 왔다.
이곳에서 벌어질 일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체가 뭐냐고 묻는 것이오?”
위표는 칼을 뽑지 않았을 뿐, 언제든 도파(刀把)를 쥘 수 있는 자세를 취했다.
허튼수작을 부린다면 바로 베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약관(弱冠, 20세)도 채 되어보이지 않는 청년이었다. 그럼에도 무위는 자신에 비해 손색이 아니, 더 강했다.
무림세가의 후예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청년이 위험한 순간 딱 나타났다.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이러한 위표의 반응에 금의위사들과 금위군사들은 덩달아 긴장했다.
그들은 상명하복(上命下服)을 목숨처럼 지켜야 하는 금군이었다. 비록 자신들을 도와준 은공이라도 명령이 떨어지면 그에게 칼을 겨누어야 한다.
이러한 반응에 청년 아니, 이현성은 당혹스러운 척할 뿐이었다.
“정체라고 할 것이 뭐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지나가던 무림인일 뿐입니다만…….”
“수상…….”
“그만! 위 대장! 은공께 무슨 무례인가!”
“죄송합니다. 대인. 허나…….”
호위책임자인 위표가 이현성을 압박하자 마차 안에 있던 중년 학자가 밖으로 나왔다.
그의 꾸짖음에도 위표는 제 임무를 위해 물러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의지도 결국은 꺾을 수밖에 없었다.
칼 한번 쥐어본 적이 없는 학자이건만, 마음의 굳건함은 그 어떤 무인보다 더 강건했다.
그런 중년 학자의 눈빛에 위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중년 학자가 이현성에게 다가갔다.
이에 위표는 긴장했다.
거웅채주를 벤 청년이었다.
그런 그라면 중년 학자의 목숨도 단숨에 취할 수 있을 것이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우려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문종학이 은공을 뵙습니다.”
“저는 이현성이라고 합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제 아버님 같은 연배인 학자님께서 허리를 숙이시는 것은 너무 부담스럽군요.”
금의위 백호인 위표를 압박하던 문종학이 이현성에게는 무척이나 정중하게 인사했다.
덕분에 이현성이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은공께서는 제 목숨은 물론 제 가족들 그리고 황제 폐하의 군사들까지 구해주셨습니다. 전혀 과하지 않습니다. 허나 은공께서 부담스러우시다면…….”
그는 비굴하지 않았다.
과한 예를 표하면서도 오히려 당당해 보였다.
문종학, 그는 그런 인물이었다.
“은공.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은혜라니요. 도울 수 있어서 도왔을 뿐입니다. 그리고 사실 제게도 두 동생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떠올라서…….”
문종학은 제 자식들 때문에 그가 도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마차 밖에서 제 아이들이 보셧단 말입니까?”
“…귀가 좀 밝습니다. 학자님의 영식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이현성은 당황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실제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소리에 문종학의 아들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아직 지학(志學, 15세)에 불과한 어린 소년에게는 정신적으로 충격이 컸던 것이다.
“그러셨군요. 그럼 이제 집으로 가시나 보군요.”
“사부님께서 돌아가신 후 집으로 돌아갔는데 가족들이 떠났다고 하더군요. 옆집 아주머니께서도 제 가족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고…….”
9년 전 야반도주를 했으니 그의 가족이 왜 그리고 어디로 떠난 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에 댈 수 있는 핑계였다.
추후 자신의 뒷조사할 것을 대비함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위표는 감탄을 터뜨렸다.
위협을 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상대의 신상을 파악하는 문종학의 화술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문종학보다 이현성 스스로 연출하고 있었다.
자신이 위험한 존재가 아님을 피력하기 위함이었다.
“그럼 가실 곳이 없으십니까?”
“목적지는 없습니다만… 가족들을 찾기 위해서 돌아다닐 생각입니다.”
“차라리 저희와 함께 가시지요. 미력하지만 제가 은공께서 가족들을 찾는 것을 돕겠습니다.”
“그래주신다면 감사하겠지만 신세를 지는 것이…….”
이현성은 난처한 척했다.
쉽게 수락하면 의심을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문종학은 고개를 저었다.
“신세라니요. 저희의 목숨을 구해셨는데요. 신세는 저희가 졌지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소관 역시 부탁드리겠소. 부끄럽지만 대인을 지키기에는 저희의 힘이 부족합니다. 소협께서 함께 계신다면 안심됩니다.”
위표는 아직 이현성에 대해서 경계심을 거두지는 않았으나 고수인 그의 도움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염치불구하고 함께하고자 도움을 청했다.
그만큼 상황이 좋지 못했다.
이현성은 고민하는 척했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럼 당분간 신세를 지겠습니다.”
* * *
쾅!
“그러게 탈명회(奪命會) 말고, 확실한 곳에 청부하자고 하지 않았소!”
“종 대인께서도 거웅채만 잘 엮으면 탈명회만으로도 충분하다며 찬성하지 않으셨소이까!”
“문종학이 황도에 도착하면 우린 끝장이오!”
“끝장일 것까지 있겠소? 우리란 증거도 없는데. 허나 그자가 대학사가 되는 것은 막아야 하오.”
그들은 문종학이 황도에 오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황제는 은밀하게 낙향했던 한림원 전(前) 학사인 문종학을 황도로 불러들이기 위해 금의위를 움직였다.
얼마 전에 물러난 내각대학사의 후임으로 삼기 위함이었다.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란 황제의 자문기관인 내각의 수장으로 종이품에 해당되는 고관대작이었다.
승상이었던 호유용의 난 이후, 명의 태조 주원장은 재상의 지위를 없앤 후 직접 육부(六部)를 관장했다. 그 후 내각의 대학사를 중용했다.
처음에는 황제의 조언자에 불과했다.
허나 황제의 측근인 대학사의 영향력이 점점 높아졌다.
급기야 상서의 직위까지 겸하면서 내각대학사의 힘이 막강해졌다.
이에 3대 황제인 영락제는 대학사의 품계를 정오품으로 묶어버렸다.
우환거리로 성장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선황(先皇)이자, 4대 황제인 홍희제는 오히려 내각대학사를 육부상서의 위에 올려놨다.
품계는 종이품이지만 사실상 재상과 다를 바가 없다는 뜻이었다.
문종학이 그렇게 막강한 자리에 오르면 많은 권력이동이 예상된다.
현재 권력을 쥔 자들로서는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황도까지 오려면 아직 시간은 충분하오. 게다가 지난 일로 호위대가 반파되었다고 하오.”
“지난번처럼 어설픈 자들 말고, 제대로 된 놈들로 보냅시다. 태감께선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오?”
“동창을 움직이면 흔적이 남아서 곤란한 듯합니다.”
“쳇… 우리만 좋자고 하는 일이 아니거늘…….”
동창(東廠).
황제의 눈과 귀가 되는 특무기관이었다.
동창의 주요구성원들은 대부분 환관으로, 그 권력은 내각을 견제할 만했다.
사실 황제가 내각대학사를 중용하는 것은 동창과 도찰원 등을 서로 견제하는 구도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하나의 조직이 독주하면 폐단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돈은 좀 많이 들어도 청살당에 청부하는 것이 어떻소?”
“청살당의 실력이라면 믿을 수 있겠지만 뒤탈은 어찌할 생각이오?”
청부살인업을 수행하는 살문은 셀 수도 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초절정고수조차 암살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열 개의 살문이 존재한다.
이를 십대살문이라고 한다.
청살당(靑殺堂)은 그런 십대살문의 하나이자, 북경 최대 살문이었다.
그만큼 청부비용이 어마어마했다.
거물급의 청부만 수행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의 재력을 생각하면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 후였다.
자신들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청부했던 살문 역시 정리해야 한다.
일개 살문이라면 어렵지 않지만 십대살문인 청살당이라면 장담할 수 없었다.
탈명회에 청부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청부를 완수하면 토사구팽(兎死狗烹)시킬 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살당은 토사구팽 시키기가 어렵다. 만약 그들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하면 두고두고 우환거리가 된다.
“지금 뒤탈을 생각할 때요? 문종학의 죽음이 먼저 아니오? 찝찝하지만 청살당의 정리는 미룹시다. 그들도 머리가 있으니 저희에 대해서 입을 열겠습니까? 게다가 때가 되면 태감께서 처리하시지 않겠소?”
“하긴… 문종학이라면 몰라도 청살당이라면 사악한 살수문파를 정리한다는 명분도 있으니까.”
태감이란 인물은 동창을 움직일 힘이 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