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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살수-15화 (15/314)

15화.

“이, 이건 도대체…….”

회귀 전 혈영살객이라 불렸던 그였지만 이런 기사는 듣도 보도 못했기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 푸른 불이 움직이더니 모산파 조사들의 위패와 분향단을 불태웠다.

이현성은 서너 걸음 물러났다.

“어, 어…….”

그가 당황하는 사이, 제단은 완전히 불타서 재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재가 쌓인 곳에 검은 무언가가 보였다.

시커먼 상자였다.

이현성은 사방을 경계하며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곳에는 세 권의 서책이 들어 있었다.

“이건… 아…….”

그는 이 세 권의 서책이 모산파의 진정한 유산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회귀 전 이곳에 들이닥쳤던 무림인들은 모산파에 대한 예를 차리지 않았기에 기연을 만나지 못했음을 알아차렸다.

과연 모산파다운 안배였다.

이현성은 세 권의 겉면에 적힌 제목을 보았다.

“기환십이결(奇幻十二訣), 본초경집주(本草經集注), 상청도량심결(上淸道場心訣).”

처음 집은 서책은 기환십이결이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모산파의 기환술이 저술된 비급이었다.

기환술에 대해 아는 것은 없었지만 기환십이결을 읽은 그의 얼굴에는 감탄이 어려 있었다.

“대…단하구나. 기환술이란 것이 이렇게 대단한 거였나? 하아… 만약 예전이 이걸 익혔다면… 죽지 않았을 텐데…….”

그의 입가에 씁쓸함이 어렸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기환십이결은 그의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대단했다.

무림인들은 무공도 아닌 고작 기환술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무공보다 술법으로 유명한 모산파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기환술 등 술법은 결코 무시할 만한 공부가 아니었다. 과거 무림을 공포에 빠트렸던 배교의 사술도 결국 술법의 일종이었다.

기환십이결은 부주술(符呪術), 환영술(幻影術), 귀혼술(鬼魂術) 등 흔히 도술이라고 불리는 모산파 술법의 정수였다.

“내 은신술에 기환십이결만 잘 접목시키면 그 누구에도 들키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술법사들뿐만 아니라 살수들에게도 지보와 같은 비급이었다.

이현성은 기환십이결을 내려놓고 또 다른 서책을 꺼냈다.

“의원이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본초경집주를 여기서 볼 줄이야.”

기환십이결과 달리 본초경집주는 제법 알려진 서책이었다.

모산파의 술법에 가려졌으나 방술(方術) 역시 뛰어나다.

특히 모산파 9대 장문인이 저술한 본초경집주는 의서이자 약초술로 그 명성이 자자했다. 본초경집주만 통달하면 신의는 못 되어도 나름 명의 소리는 들을 정도였다.

이현성이 모산파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두 비급을 본 만큼 마지막 서책에도 큰 기대를 가졌다.

“상청도량심결라… 처음 들어본 이름인데…….”

그는 마지막 서책을 펼쳤다.

이현성의 눈에 놀라움과 함께 안타까움이 물들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도가계열의 심법이었다.

게다가 그 수준이 상당했다.

그가 회귀 전에 익힌 내공심법보다 더 뛰어났다.

하지만 그의 주력 심법이 될 수 없었다.

“상단전이라… 하아… 모산파 역시 도문이구나.”

안타깝게도 상청도량심결은 일반적인 무림문파의 내공심법과 달리, 하단전이 아닌 상단전을 중심으로 두었다.

술법은 하단전이 아닌 상단전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다 보니 모산파 역시 상단전을 다루는 내공심법을 창안하게 된 것이다.

“하단전의 심법과 충돌하지만 않으면 익힐 가치는 충분해.”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실망하지는 않았다.

애초 모산파의 유산을 노리고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모산파의 유산을 얻었으니 실망할 이유가 없었다.

이현성은 검은 상자에 세 권의 서책을 다시 고이 넣었다.

“후우. 우선 청소부터 하자.”

귀혈삼과 삼목금섬

“혈살동의 입동은 어찌 되었는가?”

“혈무곡을 끝으로 모두 입동했습니다.”

혈살객은 대업에 매우 중하게 사용될 것인 만큼 혈천 상부에서도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런 혈살객인 만큼 어중이떠중이를 모아서 양성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옥석을 가리기 위해 마련된 장소가 혈무곡과 생사교였다.

혈무곡이 혈천의 하급 무사양성소에서 이번에 혈살객의 후보양성소로 바뀌었다면, 생사교는 중원의 살수집단인 그들을 제압해 또 다른 혈살객의 후보양성소로 만들었다.

두 후보 양성소에서 통과한 생존자 아니, 혈살객 후보들이 현재 모두 혈살동에 입동한 상황이었다.

“그보다 혈무곡이라고 하니 생각나는데… 혈무곡의 흔적이 드러났다고?”

“본천의 흔적까지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당분간은 소란스러울 것 같습니다.”

수하의 보고에 노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입꼬리가 빠르게 올라갔다가 원래대로 돌아왔기에 수하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혈무곡의 책임자가 누구였지?”

“마광수라(魔狂修羅)입니다. 대군사님.”

노인은 혈천의 두뇌라는 대군사 문인윤걸이었다.

혈천에서도 열 손가락에 꼽히는 실력자이자 문인세가의 전대가주이기도 했다.

그만큼 그가 가진 영향력은 막강했다.

‘한 번 정도는 밟아놓는 것이 좋겠지.’

혈무곡주인 마광수라가 자신을 포함한 몇몇 세가를 상대로 위험한 줄타기를 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알면서도 모른 척해주었다.

혈무곡은 마광수라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혈옥의 옥주를 복귀시킬 때가 됐지?”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혈옥(血獄)은 혈천의 감옥으로, 중원에서 납치한 중요한 인물 혹은 혈천 내의 죄인을 가두는 장소다.

그 중요성은 이루 말할 것이 없다.

그런 혈옥을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었다.

허나 그런 중요도와 달리 권력과는 거리가 먼 만큼 좌천지에 가깝다. 그런 면에서는 혈무곡과 비슷했다.

현(現) 혈옥주 역시 과거 임무를 실패하면서 좌천되었다.

하지만 실력은 쓸 만하기에 슬슬 복귀시킬 예정이었다.

그러면 혈옥주의 자리는 공석이 된다.

대군사는 그 자리에 마광수라를 다시 집어넣을 생각이었다. 감히 자신을 상대로 줄타기를 했던 그를 벌하기 위함이었다.

명분은 충분했다.

물론 혈천의 수뇌들이 반대하면 좌초될 수 있으나, 대호법과 하후 장로는 자신의 뜻을 들어줄 것이다.

혁련후와 하후광의 일로 두 사람 역시 마광수라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혈천 서열 10위권 내에 있는 세 사람이 합심하면 반려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수라검귀(修羅劍鬼)가 혈살동의 교두로 지원했습니다.”

“혈살동? 혈룡대가 아니라?”

수라검귀는 혈무곡 검귀 교두의 원래 별호였다.

알려지지 않았을 뿐, 혈천은 매우 거대한 세력이었다.

혁련, 하후, 문인세가처럼 명가들이 혈천을 이끌고 있지만 그들은 전체의 1할에 불과했다.

그들의 수족이 되는 나머지 9할은 수라(修羅), 야차(夜叉), 나찰(羅刹), 악귀(惡鬼). 사대동에서 배출한다.

혈무곡은 원래 사대동에 입동 전에 기본적인 훈련과 혈천에 대한 충성을 세뇌시키는 장소였다가 혈살객 후보 양성소로 개조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혈살동이 신설되었으니 사대동이 오대동으로 바뀌었다.

마광수라나 수라검귀는 그중 수라동 출신이었다.

사대동 아니, 오대동의 이름이 별호에 붙었다는 것은 그 실력이 인정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런 수라검귀가 혈룡대의 교두도 아닌 혈살동의 교두를 지원했다니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혈무곡에서 교두 생활을 하면서 흥미가 생긴 듯싶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대군사님.”

“으음. 수라검대의 부대주로 복귀시킬 생각이었는데… 본인의 뜻이 그렇다면 들어줘야지.”

“예. 알겠습니다. 대군사님.”

혈천의 머리라는 대군사의 결정에 의해 많은 것이 변하게 되었다.

* * *

“혀, 혈옥!”

마광수라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겨우겨우 혈무곡에서 본천으로 복귀했다.

삼원(三院)은 기대도 안 했다.

그렇기에 내심 오당팔각(五堂八閣) 중 한 곳을 맡지 않을까 기대했다.

실제로 그는 오당팔각의 한곳을 맡았다.

허나 결코 기쁜 기색이 아니었다.

혈천은 절대 권력자인 천주의 혈궁(血宮) 아래, 삼원이 존재한다.

원로원(元老院), 장로원(長老院), 호법원(護法院).

원로원이 은거한 혈천 전대고수들의 집단으로 혈천주의 자문기관이라면, 장로원과 호법원은 실질적으로 혈천을 이끄는 집단이었다.

그 밑에 오당팔각이 존재한다.

오당이 천주의 직속이라면 팔각은 장로원과 호법원의 영향을 받았다.

“미친! 겨우겨우 본천에 복귀했는데! 혈옥이 말이 돼?! 차라리 대주로 임명하든지!!”

오당 중 하나인 혈옥금수당(血獄禁囚堂).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혈옥의 죄인들을 지키는 집단이었다.

이 혈옥금수당주가 바로 혈옥주이기도 했다.

오당 중 유일하게 권력이 없기에 혈천의 중간 간부들 사이에서는 좌천지로 통하는 곳이었다. 실제로도 그렇다.

혈무곡에서 본천으로 간신히 복귀한 그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문인윤걸! 이 개 같은 늙은이가!!”

대주 급 이상은 한 사람이 마음대로 임명하지 못했다.

당연히 혈옥금수당주를 독단으로 임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능하게 만들 자가 있다.

바로 대군사인 문인윤걸이었다.

마광수라는 자신의 좌천이 그에 의해 결정된 사실을 눈치챘다.

그는 이 상황을 바꿀 방법을 고민했다.

하지만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대호법… 혁련 늙은이라면…….”

절대권력자인 천주에게는 감히 청할 수 없었기에 그를 제외하면 대군사의 뜻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대호법이었다.

물론 대호법이 자신의 청을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하후세가와 문인세가까지 줄타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곱게 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우드득.

“어쩔 수 없지.”

“혈살동을 맡고 싶다고? 자넨 혈옥에 배속될 예정이 아니던가?”

결심이 선 마광수라는 곧바로 대호법을 찾아갔다.

만남을 거절할 줄 알았던 대호법이 의외로 쉽게 만나주었다. 하지만 마광수라는 안심할 수 없었다.

진짜는 이제부터이기 때문이다.

“제가 혈살동을 맡아서 1호 아니, 이공자님이 혈살객의 수장이 되실 수 있게 물심양면으로 돕겠습니다.”

“으음…….”

협상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렇기에 마광수라는 처음부터 초강수를 날렸다.

대호법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 그것을 들어주겠다는 것이다.

대호법은 단도직입적인 그를 보며 잠깐 고민했다.

감히 자신과 협상하려는 마광수라를 혼내주는 것과 차손이 혈살객의 수장이 될 수 있게 만드는 것을.

그 찰나가 마광수라에게는 억겁과 같은 순간이었다.

잠시 후, 굳게 닫혔던 대호법의 입이 열렸다.

“…대군사에게는 내가 말해두지.”

“가, 감사합니다! 대호법님!”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는 사실에 마광수라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혁련후를 혈살객의 수장으로 만들면 다시 기회가 생긴다. 그렇기에 실수해서는 안 된다.

허나 대호법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 순간 강렬한 기운이 마광수라를 압박했다. 절정고수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수법이었다.

“컥!”

“…잊지 말게나.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세.”

“헉… 헉… 무, 물론입니다!”

기운만으로 절정 극의 고수를 제압했다.

대호법의 무지막지한 신위에 마광수라는 사색이 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누구랑 거래하려고 했는지를…….

‘빌어먹을… 이게 잘한 거 맞나…….’

귀환살수

— 문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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