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그러나 9명 모두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두 아이, 정확히는 한 소년과 한 소녀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역시 저 아이들이군. 66호와 207호… 확실히 달라…….’
66호는 검귀가 눈여겨보고 있는 이현성이었다.
하지만 그 못지않은 아니, 그 이상의 재능을 보이는 소녀가 있었으니… 바로 207호였다.
나머지 7명도 부족하지 않은 인재들이었지만 둘과 비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내 가르침을 따라가지 못하면 혹독한 처벌이 주어질 것이다.”
“…….”
아이들은 금세 사색이 되었다.
가차 없이 몽둥이를 드는 부교두들도 두려웠으나 눈앞의 검귀 교두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날이 시퍼렇게 선 검을 들어 당장이라도 심장을 찌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검귀는 교두의 직위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맡은 임무를 소홀히 하는 인물도 아니었다.
그런 그였기에 당근과 채찍을 조절할 줄도 알았다.
“허나 반대로 내 가르침을 잘 따라와준다면…….”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이미 검이 허공을 찌른 후였다.
“일점홍(一點紅)이라는 일초검술을 전수해주마. 단언하는데, 너희가 혈살객이 된다고 해도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꿀꺽.
아이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검술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그들이 봐도 범상치 않은 검술이었다.
속도로만 보면 명문의 쾌검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게다가 내공이 일천하다고 해도 익힐 수 있어서 살수에게는 최적의 검술이었다.
그러나 장점이 있다면 단점 역시 존재했다.
속도에 치중하다 보니 위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 없었다.
물론 인간의 피육(皮肉)을 가르기에 부족하지 않은 위력이었으나 도검불침의 외공고수를 벨 수는 없었다.
당연히 호신강기를 펼칠 수 있는 초절정 고수에게는 무의미했다. 검술로써의 한계가 뚜렷하다는 뜻이었다.
‘왜 바뀐 거지? 원래는 일섬(一閃)이었는데…….’
이현성은 내색하지 않았을 뿐 내심 당황했다.
회귀 전, 그가 전수한 쾌검술은 일섬이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일점홍처럼 일초검술이었다.
그리고 비슷한 찌르기였다.
사실 일섬과 일점홍은 검술로서는 이류에 불과했다.
그러나 쾌를 기반으로 둔만큼 살수에게 최적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점홍은 일섬과 대우가 달랐다. 일류를 잡아먹는 이류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류의 살수가 일류검객을 죽였다.
바로 이 일점홍이라는 일초 쾌검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모두에게 전수해줄 생각은 없다.”
검귀는 잔혹했다.
가르침을 잘 따라온다고 해서 무조건 전수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경쟁까지 요구했다.
‘일점홍이라면… 조금 실력을 드러낼 가치가 있겠어.’
원래는 더 이상의 실력을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자신을 과소평가하면 할수록 계획이 성공할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높아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섬은 회귀 전에 배운 만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점홍이라면 말이 달라졌다.
일점홍이라면 검기(劍氣)를 익히기 전까지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검기를 익힌 후, 포영심결 이외에 비장의 수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앞으로 일 년. 일점홍의 새로운 주인이 결정될 것이다.”
* * *
“일점홍? 검귀 이 새끼가 미쳤나!!”
검귀 교두의 공언이 혈무곡에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에 부교두들은 물론 교두들까지 어이없어했다.
물론 그들이 익힌 무공 중 일점홍보다 못한 것은 없었다. 그들은 최소 일류고수였으니까.
그러나 일점홍은 이류검술임에도 그 가치가 상당했다. 게다가 혈천의 무학이 아닌 만큼 혈천 내 일점홍을 익힌 자는 몇 없었다.
“홍화(紅花)만으로는 안 되겠어. 젠장. 나는 혈풍뇌우(血風雷雨)를 내걸어야겠어.”
검귀의 공언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자는 바로 혈검 교두였다.
그는 검귀 교두에게 경쟁의식을 갖고 있었다. 일점홍보다 더 뛰어난 검초를 내걸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혈풍뇌우는 그의 독문무공인 혈뢰검법의 한 초식이었다.
결코 일점홍에 뒤지지 않는 아니, 더 뛰어난 검초라고 할 수 있었다. 환검(幻劍)임에도 강(强)의 무리가 접목되어 있었다.
이 두 사람의 경쟁(?)에 몇몇 교두들 역시 숨기고 있던 비장의 패를 하나씩 꺼내들었다.
물론 모두가 자극을 받아 경쟁에 동참한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혈살동에 들어가면 다른 무공을 익힐 애새끼들인데… 뭘 그렇게 열을 내는 거야?”
몇몇 교두들은 원래 생각해두었던 기본적인 초식만 전수하기로 했다.
그로 인해 훈련생들의 열의가 갈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 * *
“제길… 역시 검귀 교두 밑으로 들어갔어야 했어.”
“아니면 무영 교두 아래로.”
검귀(劍鬼), 무영(無影) 교두와 함께 속검을 가르치는 섬풍(閃風) 교두는 경쟁(?)에 참여하지 않은 교두 중 한 명이었다.
섬풍 교두는 검귀만은 못하지만 무영 교두보다 강했다. 때문에 무영 교두보다 더 많은 훈련생들이 몰렸다.
그러나 그는 무영 교두와 달리 계획되었던 일섬을 가르칠 예정이었기에 그 아래 훈련생들의 불만이 커졌다.
섬풍 교두뿐만 아니라 같은 판단을 한 교두들 역시 비슷한 상황을 맞이했다.
“검귀는 왜 괜한 짓을 해가지고……!!”
결국 섬풍 교두를 포함한 모든 교두들도 비장의 패를 하나씩 꺼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즐거운 사람은 바로 혈무곡주였다.
여러 훈련소 중 혈무곡 출신들이 더 좋은 성적을 내면 자신의 평가가 올라가는 것은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혈무곡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 * *
챙! 챙! 챙!
두 자루의 검이 연이어 충돌했다.
충돌음이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것을 보아 두 사람의 검이 얼마나 빠른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빠른 검술을 펼치는 이들이 고작 십대 초반이라는 사실 역시 정말 놀라웠다.
‘역시 대단해. 왜 이런 애를 기억하지 못하지?’
66호 아니, 이현성은 207호와 비무하며 놀라워했다.
그녀의 실력이나 재능은 결코 1호인 혁련후에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혈살오객 중 207호는 없었다.
‘아니, 내 기억 속의 207호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 실제로 혈살동에 입동하지 못했으니까.’
즉, 그 말은 혈무곡에서 뼈를 묻었다는 말이었다.
그만큼 실력이 없거나 싹이 자라기 전에 누군가 짓밟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207호의 경우, 전자보다는 후자의 가능성이 높았다.
기본적인 검술만 펼쳤다고 해도 제압하지 못했다.
‘더 이상은 안 돼. 어쩔 수 없지. 일점홍은 아쉽지만… 여기서… 포기를… 음?’
“…제가 졌어요.”
더 이상 실력을 드러낼 생각이 없던 이현성은 자연스럽게 패배를 인정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비무 상대인 207호가 돌연 패배선언을 하면서 모두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물론 비무 상대인 이현성이 느낀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검귀 교두가 차갑게 말했다.
“아직 패배를 선언할 정도는 아닐 텐데. 아직 선보이지 않은 검술도 있을 테고 말이야.”
“그렇게까지 해서 이기는 것은 전혀 기쁘지 않습니다. 교두님.”
“…뭐, 좋다. 이유야 어쨌든 승패는 갈린 것이니까. 일점홍은 66호, 너에게 전수해주마. 나머지는 너무 실망하지 마라. 일섬도 일점홍 못지않으니까.”
이현성은 얼떨결에 일점홍을 전수받을 기회를 얻었다.
검귀 교두는 모두에게 일섬을 전수해주었다.
그리고는 이현성만 따로 불렀다.
약조한대로 일점홍을 전수하기 위함이었다.
이현성이 검귀 교두를 따라가려고 할 때였다.
[네가 뭘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빚을 진거야. 잊지 말라고. 66호.]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고맙다. 207호.”
그때 207호가 육성이 아닌 입술만 움직였다.
이현성이 독순술(讀脣術)을 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소리내지 않고 말했다.
[내 이름은 문인주희야. 기억해둬.]
이현성은 대답하지 않고 검귀 교두를 따라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207호 아니, 문인주희는 생각에 잠겼다.
‘아쉽긴 하지만… 언니가 쓰러졌다고 하니…….’
그녀가 혈살동에 입동하지 못한 것은 죽어서가 아니었다. 가문에 일이 생겨서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채 돌아갔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녀의 조부가 혈천의 대군사이자 문인세가의 태상가주였기에 가능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인연은 끊어졌다.
회귀 전처럼 이번 생에도 그녀와의 인연이 완전히 끊어진 것일까?
“…일점홍은 그렇게 대단한 검술은 아니다. 결국 찌르기에 불과하니까.”
검귀 교두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실제로 흔한 찌르기가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기만 하면 일점홍을 괜히 일류를 베는 이류라고 부르겠는가.
“…구결과 시범은 딱 세 번씩만 보여줄 것이다. 익히든 익히지 못하든 그것은 네 책임이다.”
“예. 교두님.”
검귀는 그리 좋은 선생이 아니었다.
하지만 검객으로서는 발군이었다.
어차피 한번 갔던 길이었다. 그런 그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선생이 아닌 뛰어난 검객일지도 몰랐다.
검귀는 만약을 대비해 일점홍의 구결을 전음입밀의 수법으로 알려주었다.
“…이제 시범을 보여주마. 단 세 번뿐이니, 집중해서 봐야 할 것이다.”
과연 검귀였다.
검을 쥐었을 뿐인데도 분위기가 바뀌었다.
더욱 차갑고 날카로워졌다.
가까이만 가도 베일 것 같았다.
그때였다.
슝!
섬뜩한 파공음과 함께 검이 허공을 찔렀다.
‘역시 검귀 교두님이군. 차갑게 행동하면서도 이런 면이 있으니까.’
그는 전력을 다해 일점홍을 펼친 것이 아니었다.
이현성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속도를 조절했다.
그것을 증명하듯 두 번째 시범은 첫 번째보다 훨씬 빨랐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에는 소리가 검속을 따르지 못했다.
검귀 교두가 검을 거두며 나직하게 말했다.
“여기까지다.”
“수고하셨습니다. 교두님.”
검귀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보통 아이라면 고작 이 정도 보여줬다고 해서 일점홍을 제 것으로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현성의 눈빛은 결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는 자의 것이 아니었다.
‘역시 재미있는 녀석이야. 분명 무가의 혈통도 아닌데… 기대하마. 네가 꼭 살아서 혈무곡을 나가기를…….’
시련
“내 거야! 내 거라고!!”
“먼저 먹는 놈이 임자… 컥!”
“흐흐. 그래. 그러니 내가 임자지.”
훈련생들이 혈무곡에서 지낸 지 4년이 된 시점에서 갑자기 배식에 문제가 생겨났다.
인원수의 9할에 해당되는 배식만 온 것이다.
처음에는 적당히 조절해서 대부분 다 식사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이지, 매일 반복되니 이를 참지 못하게 되었다.
배식이 8할까지 줄어든 지금은 먹기 위한 싸움이 벌어졌다. 급기야 살인까지 불사하니 일이 심각해졌다.
그러나 혈무곡의 교두, 부교두들은 말리지 않고 지켜만 봤다.
애초에 이런 상황을 조장한 것은 바로 그들이었다.
아이들에게 경쟁과 생존, 악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평범한 무가의 무사가 아닌, 혈살객이라는 살수를 키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님. 가져왔습니다.”
“식사하십시오. 성님.”
한 손이 열손을 이기기 어렵다고, 결국 배식은 파벌들의 차지가 되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