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그러던 중 멀리서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무림인들을 발견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들이 자신들을 죽이러 온 자들이라는 사실을.
그는 이현성이 준 작은 쪽지를 장녀인 이현영의 손에 쥐어주었다.
“아빠는 곧 따라갈 테니 현호랑 같이 뛰어가거라. 절대 절대 뒤돌아보지 말고. 당신도…….”
“여보…….”
부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슬픔을 나누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어떻게든 아이들만은 살리기 위해 그녀가 두 아이를 데리고 뛰어갔다.
그러는 사이 사내는 주변에 떨어진 돌을 주워들었다.
“그래! 아들을 버리고 잘 살 생각은 없었어! 이놈들아! 나부터 죽여라!!”
그는 쥔 돌을 던지며 무림인들이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도록 위협했다.
돌도 충분한 흉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를 잘못 골랐다.
그들은 혈천 휘하의 추살조였다. 고작 평범한 사내가 던진 돌로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실제로 그들은 검을 휘둘러서 날아오는 돌들을 모두 쳐냈다.
“오, 오지 마라! 컥!”
“병신. 고작 그걸로 우릴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나.”
결국 추살조의 검에 의해 그의 목이 떨어졌다.
가족을 살리려던 가장의 너무도 안타까운 죽음이 아닐 수 없었다.
이후 추살조는 느긋하게 나머지 가족들의 뒤를 쫓았다.
언제든 죽일 수 있으니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아이들과 도망치던 어머니는 남편의 죽음을 목도했다.
“아, 아무래도 너희들끼리 먼저 가야 할 것 같아. 현영아! 네가 누나지? 동생을 잘 부탁할게. 할 수 있지?”
“어, 엄마!”
“제발… 제발… 부탁이란다. 이 엄마의 말 좀 들어주면 안 되겠니? 절대 뒤를 돌아보면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뛰어가야 해. 알았지? 약속이다.”
“예…….”
울먹이는 어머니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두 아이는 다시 달려 나갔다.
그녀는 남편처럼 주위에 있는 돌을 쥐었다.
하지만 사내인 남편이 던진 돌은 힘이라도 있었지, 아녀자인 그녀가 던진 돌은 아무런 위협조차 되지 않았다.
오히려 추살조를 자극할 뿐이었다.
그들의 눈에 음욕이 번들거렸다.
쫘악!
“꺄악! 왜, 왜 이러… 시, 싫어!!”
“애새끼들을 살리고 싶지 않나 보지?”
밤새 도망치느라 조금 더러워졌지만, 민가의 여인답지 않게 제법 얼굴이 반반했다.
임무 특성상 한동안 몸을 풀지 못했던 그들로서는 음욕이 피어올랐다.
게다가 곧 죽일 여인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여인은 발버둥질했으나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스스로가 혐오스러워서 혀를 깨물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이자들을 조금이라도 더 붙잡고 있어야 아이들이 살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살조는 한 명이 아닌 두 명이다.
그녀를 유린한 짐승이 아니더라도 또 한 명의 악마가 더 있었다. 그가 아이들의 뒤를 쫓았다.
“아, 안… 흑흑…….”
“가만있어! 이년아!”
결국 그녀는 처참하게 유린당한 뒤 죽임당했다.
그러는 사이, 또 한 명의 악마가 아이들을 붙잡았다.
“사, 살려주세요.”
“이제 그만 죽여볼까? 애새끼를 죽여본 적은 없는데… 어떤 느낌인지 궁금한데?”
결국 두 아이는 또 다른 추살조원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가 비수로 이현성을 찌르려고 했다.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음? 빨리도 왔군. 그런데 왜?”
“난 아직 애를 건드려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미친! 나도 그런데?”
그들은 한껏 히죽거리며 이현영에게까지 마수를 뻗으려고 했다.
그때 이현호가 혈천 고수의 손을 물어버렸다.
고작 5살밖에 안 되는 소년을 피하지 못한 것은 이상했다. 하지만 설마 손을 물릴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퍽!
“이 미친 애새끼가!! 그렇게 죽고 싶다면 죽여주마!”
“혀, 현호야! 현호야!!”
이현호는 추살조 고수의 주먹을 맞고 나가떨어졌다.
그것만으로 5살짜리 소년이 죽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그들은 비수를 던져 확인사살까지 했다.
이현호의 왼쪽 가슴에 비수가 꽂혔다.
부르르 떨던 이현호는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짜~악!!
“시, 싫어!”
“닥쳐! 네년은 저 애새끼 대신 내 화를 풀어줘야겠다!”
추살조의 고수가 이현영의 상의를 찢었다.
그녀는 뒷걸음질하려 했으나 이를 두고 볼 추살조 고수가 아니었다. 그가 이현영의 혼혈(昏穴)을 짚었다.
그녀는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의식을 잃었다.
“흐흐. 저 애새끼처럼 깨물면 귀찮아지니까. 그럼 재미를 좀 볼까?”
“내 몫도 남겨… 컥!”
“짐승만도 못한 놈들아! 죽어라!”
이현영에 못된 짓을하려던 모습을 지켜보며 실실 쪼개던 추살조 고수는 목이 베여 절명했다. 이에 그녀에게 못된 짓을 하려던 추살조의 또 다른 고수가 기겁하며 무기를 쥐었다.
그러나 그 역시 반응하기도 전에 목이 베였다.
두 짐승을 벤 존재는 중년의 미부(美婦)였다.
죽은 그들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너무나도 차가웠다. 그러나 의식을 잃은 이현영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안타까움이 깃들어 있었다.
“…미안하구나. 조금만 더 빨랐어도 너희 가족들을 구해줄 수 있었을 텐데… 정말 미안하구나.”
중년 미부는 혈천의 추살조 고수 둘을 가볍게 벨 수 있을 정도로 고강한 고수였다.
당연했다.
그녀는 한천마녀(恨天魔女). 여인에게 피눈물을 흘린 사내 아니, 짐승을 심판하는 무시무시한 여고수였다.
한천마녀는 의식을 잃은 이현영을 품에 안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일각(一刻)쯤 지났을 때였다.
“하아…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아무리 맹세했다지만 저 어린 것을…….”
어디선가 모습을 드러낸 자는 불혹은 넘지 않아 보이는 사내였다.
그가 죽어 있는 이현호를 내려다보며 자책했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작은 쪽지였다.
사내는 이현호의 곁에 떨어져 있던 작은 쪽지로 손을 뻗었다. 왜냐하면 반쯤 펼쳐진 쪽지에 낯익은 이름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 : 한은설
병명 : 월음절맥 – 발병시 사지가 한기에 잠식되어서…….
“이, 이게 뭐야! 서, 설마 여기 적힌 한은설이… 내 딸 설이를 말하는 거는 아니겠지?!”
추살조의 고수가 이현영의 상의를 찢으면서 흘러나온 쪽지였다.
사내는 혼란스러웠다. 처음 들어본 병명이었지만 ‘절맥(絶脈)’이라면 결코 좋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설명을 들어보니 가볍게 흘릴 수도 없었다.
그러나 곧 정신을 추스른 그는 이현호의 시신이라도 묻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음? 매, 맥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어! 희미하지만 분명 숨이 붙어 있어!”
놀랍게도 이현호는 왼쪽 가슴에 비수가 꽂혔음에도 절명하지 않았다.
사내는 이현호를 살리기로 결심했다.
그런 그의 검지에서 빛이 났다.
푹! 푸푹! 푹!
순간적으로 이현호의 혈들을 찔렀다.
결코 간단한 동작이 아니었는지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흡… 후우. 쿠, 쿨럭.”
그 순간 죽은 줄 알았던 이현호의 입에서 기침이 터져나왔다. 기침과 함께 피가 나온 것을 보아 아직 위험한 상태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살릴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내 너를 꼭 살려주마.”
천검(天劍) 한승.
이십여 년 뒤 천하를 떠들썩하게 하는 절대고수이자, 이현성이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한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족 모두가 아닌 남동생 이현호만 그가 정한 보호자의 손에 닿게 되었다.
그렇게 세 남매는 끝을 알 수 없는 이별을 맞이했다.
* * *
“지금 뭐라고 했느냐.”
“추살십삼조(追殺十三組)가 죽었… 컥!”
상관으로 보이는 중년 사내가 서책을 집어던졌다.
얻어맞은 사내는 신음을 흘리며 다시 그의 앞에 섰다.
“자세히 보고해.”
“…이현성이란 훈련생의 가족들이 도망쳤고, 추살십삼조가 정리하러 떠났다가 변을 당했습니다.”
“평범한 민가(民家)가 아니었던가?”
“중간에 방해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모로 보이는 시체 두 구는 발견되었으나 다른 두 아이의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추살십삼조의 시체에 남은 상흔을 보아… 한월마검(寒月魔劍)으로 추정됩니다.”
“끄응…….”
수하의 보고에 추살당(追殺堂)의 부당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한월마검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움직였다면 추살십삼조가 무슨 짓을 벌였을지도 유추할 수 있었다.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야! 내가 당주님께 깨지라고 일부러 그런 거 아냐?!”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젠장. 상대가 한천마녀라면 곤란해. 어쩔 수 없지. 적당히 흔적을 지운 뒤 덮는다. 이 일이 알려지면 너는 물론 내 목까지 위험해지니 조용히 처리해.”
“조, 존명!”
혈천은 현재 정체를 숨기고 있었다.
한천마녀를 제거하려면 추살당만으로는 힘들다.
아니,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추살당의 존속에 문제가 생길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한천마녀를 제거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과정에서 혈천의 존재가 드러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추살당이 반파된 책임을 누가 지겠는가.
바로 자신의 몫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필사적으로 이 일을 덮으려는 것이다.
“애새끼 한둘 살려 보냈다고 무슨 문제 생기는 것은 아니니까.”
그의 이런 결정이 훗날 혈천을 무너뜨릴 가장 큰 이유가 될 줄은 이때는 미처 몰랐다.
* * *
“흑… 흑흑…….”
의식을 되찾은 이현영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부모님에 이어서 남동생까지 잃었다.
이제 유일한 가족은 큰오빠인 이현성뿐이었다.
문제는 그조차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슬픔을 참을 수 있겠는가.
“미안하구나. 내가 조금만 더 일찍 발견했다면…….”
“흑흑흑…….”
한천마녀의 위로에도 이현영은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세 시진을 더 울다가 지쳐서야 잠이 들었다.
한천마녀가 그런 그녀의 곁을 지켜주었다.
다시 몇 시진이 지난 뒤 이현영이 깨어났다.
여전히 슬픔에 잠겨 있었으나 더 이상은 울지 않았다.
하도 울어서 이제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줌마가 절 구해주신 건가요.”
“그래. 이 아줌…….”
“감사해요. 아줌마.”
인사하는 이현영이 더욱 안쓰러운 한천마녀였다.
작고 귀여운 아이가 그런 험한 일을 당했으니 말이다.
“아줌마는 화옥령이라고 한단다. 너는 이름이 뭐니?”
“저는 이현영이라고 해요.”
화옥령.
무림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한천마녀의 본명이다.
그녀가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갈 곳이 있니?”
“갈 곳이요? 아……!!”
이현영은 아버지가 준 쪽지를 찾기 위해 옷을 뒤졌다.
하지만 떨어뜨린 쪽지가 나올 리가 없었다.
그녀는 곧바로 또 울상이 되었다가 이내 크게 외쳤다.
“오, 오빠! 이현성! 우리 큰오빠가 있어요!”
“그렇구나. 오빤 어디에 있니?”
“그, 그게…….”
이현영은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울먹거렸다.
울먹이며 대답했기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적지 않았으나 파악한 부분만으로도 심상치 않았다.
“이 아줌마가 너희 큰오빠를 찾아주마.”
“저, 정말요?”
“그럼.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구나.”
이현영은 이현성을 찾아주겠다는 말에 기뻐하다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말에 다시 슬퍼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