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어려서부터 영특했고, 정신적으로도 성숙했다.
그렇기에 이 집이 아닌 다른 곳이라면, 혼자라면 출세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를 판 것이기도 했다.
게다가 오늘은 왠지 모르게 위엄까지 느껴졌다.
비록 아들이지만 거역할 수 없는 그런 위엄이…….
“그, 그럼 같이 가자꾸나!”
“안 돼요. 제가 이곳에 없으면 잠잠해진 뒤가 아닌 지금 바로 우릴 죽일 거예요. 아마 지금쯤이면 감시하는 자가 붙었을 테니까요.”
아들의 말에 부친은 망연자실했다.
아들과 가족들을 위한 자신의 선택이 모두를 죽게 만들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제가 이곳에 있으면 최소한 시간은 벌 수 있을 거예요. 그들도 시간과 돈을 들인 저를 그냥 포기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그들이 준 돈만 가지고, 가족들과 조용히 떠나세요.”
“…….”
“어머니와 동생들까지 죽일 생각이세요? 저는 괜찮아요. 그러니까 떠나세요. 제발요.”
“…정말 미안하구나. 이 애비가 못나서 미안하구나.”
그는 눈물을 흘렸다. 어린 아들만 두고 도망쳐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가슴 아팠다.
그런 아버지에게 이현성은 쪽지 두 개를 건넸다.
부친은 얼떨결에 두 개의 쪽지를 건네받았다.
“큰 쪽지에는 우리 가족이 가야 할 곳과 가는 방법이 적혀 있어요. 그리고 작은 쪽지는 그곳의 주인에게 드리세요. 그러면 살 수 있을 거예요.”
“너는 정말…….”
아버지는 이를 악물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소년은 밖으로 나와 마루에 걸터앉았다.
자신은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시자에게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잠시 후, 부친은 소년의 조언대로 잠이 든 두 동생을 안고 어머니와 함께 떠났다.
어머니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슴이 아려왔지만, 그는 이를 악물었다.
더 이상 약해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아무런 무공도 익히지 않은 상태였지만 알 수 있었다.
자신을 감시하는 눈이 그대로라는 사실을.
가족들을 따라나서지 않았다는 것을.
‘뒷정리를 담당하는 추살조(追殺朝)가 움직이는 것은 보통 보름에서 한 달.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이니… 운이 좋으면 살 수 있을 거야.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랍니다. 사실 수 있다면… 부디 살아주세요.’
그의 예상대로 이현성을 감시하는 눈이 있었다.
‘재미있는 녀석이군.’
그는 어린아이나 데려올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잠시 일이 틀어져서 지원을 나온 것이다.
그런 그가 촌무지렁이들이 도망친 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러나 그는 굳이 이현성의 가족들을 죽이지 않고 방관했다.
아이의 행동에서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상부에 보고해야 하나? 뭐, 굳이 내가 보고할 필요는 없지. 촌무지렁이들의 정리는 추살조의 임무니까 알아서 하겠지. 그보다 저 녀석… 조금 특이하군.’
그와 이현성은 그렇게 밤을 새웠다.
그리고 드디어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
* * *
“…오셨군요. 감사합니다.”
소년의 인사에 그는 당혹스러웠다.
자신에게 왜 감사 인사를 한단 말인가?
이어진 소년의 말이 그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제 가족이 떠날 시간을 주셨잖아요. 그냥 죽이실 수도 있었는데… 이 집안의 장남으로서 감사 인사를 드린 거예요. 그런데 저는 뭐라고 불러야 하죠?”
“…교두님이라고 불러라. 어차피 곧 그렇게 부르게 될 테니까.”
“예. 교두님.”
‘역시… 검귀 교두님이셨어. 저분이라서 다행이네.’
보통은 부교두 급의 인물이 아이들의 인도를 맡는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교두 중 한 명인 검귀가 자신과 이 일대에 있는 아이들의 인도를 맡았다.
그의 이름은 물론 진짜 별호도 모른다.
그저 그를 검귀(劍鬼)라고 부를 뿐이다.
교두(敎頭) 중에서 검을 제일 잘 다루며, 그 솜씨가 귀신과 같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가장 냉혹해 보이지만 의외로 인간미를 가진 인물이기도 했다. 그들 중 유일하게.
다른 교두 혹은 부교두였다면 자신의 가족이 도망치려는 즉시 죽이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아는 검귀 교두라면 지켜볼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그런 자였으니까.
그렇기에 가족들에게 도망치라고 한 것이다.
자신이 전해준 쪽지대로만 하면… 어쩌면… 살 수 있을지 몰랐다.
다행히 예상이 맞았다. 감시자가 검귀 교두였다.
“따라오거라. 멀지 않은 곳에 마차가 있으니 그걸 타면 된다.”
“예.”
‘검귀 교두님. 이 빚… 절대 잊지 않을게요.’
검귀는 기분이 이상했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어디로 가는지, 얼마나 가는지 꼬치꼬치 캐물을 텐데 소년은 전혀 묻지 않았다.
흡사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다른 아이들과는 너무도 다른 반응에 당혹스러우면서도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저 녀석 때문에 한동안 지루하지는 않겠는데?’
그는 일개 교두로 지낼 자가 아니었다.
상부에서도 인정받는 고수였으니까.
다만 모종의 이유로 교두가 되었다.
그에게 일상은 매우 지겨웠다. 그런 그에게 즐거움을 선사해줄 소중한 존재가 등장했다.
‘부디 오래만 살아 있거라. 내가 복귀할 때까지 말이야.’
* * *
덜커덩. 덜커덩.
마차 안에는 십여 명의 아이들이 쪼그려 있었다.
모두 이현준과 같은 처지였다.
부모에게 버림받거나 아니면 애초부터 고아였거나, 몇몇은 납치당했을 것이다.
물론 납치는 흔치 않다. 납치된 아이의 부모가 울고불고 난리를 치면 흔적이 남기 때문이다.
“흑흑… 집에 가고 싶어…….”
“흑… 흑흑…….”
대부분 7, 8살 소년들이었다. 아무리 많아도 9살이 넘지 않았다. 이 상황이 두려운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들의 울음에 되돌아오는 것은 호통뿐이었다.
“조용하지 않으면 때릴 것이다. …죽을 때까지.”
“히끅! 히끅!”
사내의 차가운 눈빛과 목소리에 아이들을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소리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다.
결국 사내가 비수를 쥐었다.
그 모습에 아이들의 공포심이 극에 달했다.
“그만. 그쯤이면 되었다. 어차피 훈련을 버티지 못하면 죽는다. 벌써부터 수를 줄일 생각인가.”
“죄, 죄송합니다. 교두님.”
검귀의 말에 부교두가 재빨리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다.
검귀가 아이들을 데려올 동안 마차를 지키던 자였다.
그가 이를 악물었다.
마차 한 대당 부교두 서너 명이 담당한다.
그는 그중에서도 선임급에 해당된다.
검귀만 아니면 고개를 숙일 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계급이 깡패인 것을…….
이현성이 숨죽여 울고 있는 아이 중 한 명을 다독였다.
“앞으로 울 일이 많을 거야. 벌써부터 울면 버틸 수 없어. 강해져야 해. 살아서 가족들을 보려면 말이야. 아, 난 이현성이라고 해. 앞으로 내 이름으로 부를 일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저, 저는 초, 초운비예요. 혀, 현성이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소년은 추후 혹독한 훈련에서 살아남는 살수 중 한 명이다. 그리고 이현성이 뒤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의동생 중 한 명이기도 하였다.
이현성의 말 때문인지, 숨죽여 울던 아이들이 두려움을 꾹 참고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진정했을 뿐만 아니라 희망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살아남는다면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그런 이현성을 보며 이를 갈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이놈들은 모두 내 부하가 될 텐데, 네가 감히 까불고 있어? 어디 두고 보자.’
소년들을 보지 않을 뿐 이현성 역시 그를 의식했다.
왜냐하면 자신과 악연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혈검(血劍)… 네놈도 이 마차에 타고 있었구나. 두고 보자. 개자식아.’
나중에야 알게 되었으나 자신들은 혈천(血天)이라는 무림세력에서 은밀하게 키우는 살수들이었다.
훈련이 끝나 정식으로 살수가 되었을 때, 혈살객(血殺客)이라고 불렸다.
혈살객이 되기 위해 수많은 아이들이 훈련을 받았고, 정식으로 혈살객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았을 때 살아남은 수는 고작 백여 명에 불과했다.
못해도 수백, 그 이상은 되었던 아이들 중에서 말이다.
혈살객 중에서도 두각을 보인 다섯 혈살객에게만 특별한 칭호를 주었다.
혈살오객(血殺五客).
그들은 각기 혈검(血劍), 혈수(血手), 혈독(血毒), 혈비(血飛), 혈영(血影)이라 불렸다.
이현성을 노려보는 소년은 추후 혈검살객(血劍殺客), 혈살오객의 수좌이자 혈살객의 수장이 된다. 그리고 자신은 혈영살객(血影殺客), 혈살오객의 말석에 불과했다.
‘…대호법의 손자라고 했지.’
혈천에서 대업을 위해 혈살객 양성을 추진했다.
혈살객의 가치는 생각보다 크다.
그렇기 때문인지 혈천에서도 손꼽히는 권력자인 대호법이 자신의 입지를 위해 손을 써 그의 손자를 은밀하게 혈살객 후보로 집어넣은 것이다.
만약 손자가 혈살객의 수장이 되면 자연스럽게 그들을 자신의 휘하에 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이지 않게 대호법의 지원을 받은 혈검살객이 누구보다 빠르게 강해져서 혈살객의 수장이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혈살오객들 역시 누군가의 후원을 받았다.
결국 혈살객은 혈천 내 작은 정치판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바뀔 것은 없어. 네놈이 날 죽이기 전, 기필코 내가 먼저 널 죽이고 말겠어.’
이현성의 눈빛이 번쩍였다.
회귀하기 전, 마지막 임무를 완수하기 직전에 독침을 맞았다. 그리고 독침을 쏜 자를 똑똑히 봤다.
변장하긴 했으나 그 눈빛이 누구의 것인지 잘 알았다.
혈검살객의 측근 중 한 명이었다.
결국 자신을 함정에 빠트린 것은 혈검살객이란 뜻이었다. 몰랐으면 몰라도, 알면서 당할 자신이 아니었다.
‘나와 동생들의 복수를… 기필코…….’
며칠 뒤 아이들은 마차를 갈아타야 했다. 그것을 몇 번이나 반복한 후에야 알 수 없는 모종의 장소에 도착했다.
혈천이 혈살객 양성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이현성의 가족들은 우려대로 추살조에게 쫓기고 있었다.
* * *
“헉… 헉헉…….”
아들의 조언대로 돈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도망쳤다.
짐이 많으면 많을수록 도망칠 때 불리하기 때문이다.
아들이 준 쪽지 중 큰 쪽지를 펼쳤을 때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들이 가야 할 장소만 적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는 길은 사람이 많은 관도(官道)를 이용하고, 산이나 계곡처럼 인적이 드문 장소에 들어갔을 때 흔적을 지우는 방법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마지막으로 다 외운 뒤 큰 쪽지를 태워 없애라는 말도 적혀 있었다.
아무리 아들이 영특하다고 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가 아니었다.
“조금만 가면 되니 힘을 내자꾸나.”
“헉헉… 네…….”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었다.
벌써 열흘 이상 쉬지도 못하고 움직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이들을 업고 움직였으나 지금은 그럴 여력이 없었다. 결국 아이들까지 걷게 했다.
그래도 부지런히 움직인 보람이 있었다.
드디어 이 산만 지나면 아들이 적어준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늘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이, 이런!”
그는 도망치는 와중에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신들을 쫓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두려움에서 비롯된 무의적인 반응이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