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2화
제12편 외전 소피아 (18)
소피아가 보기에는 이번 삶의 마왕은 분명 저번 삶에서 보았던 마왕보다 약해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마왕과 싸우고 있는 검호들에게는 지금의 마왕도 결코 죽일 수 없는 적이었다.
회복하는 힘이 이 정도라는 것을 몰랐을 때는 다들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었지만.
마왕의 말도 안 되는 회복 능력을 확인한 지금은 의아해했던 여제의 퇴각 명령이 이해가 될 지경이었다.
마왕의 회복 능력과 독 능력은 나쁜 쪽으로 상성이 좋았다.
독에 중독될까 봐 함부로 접근하기도 어려운 데다, 겨우 접근해서 상처를 내도 바로 회복되어 버리니, 모두 시간이 지날수록 지칠 뿐이었다.
더구나, 검호가 아닌 다른 기사들은 마왕에게 접근할 수도 없었다.
실력에 자신이 있어 끼어들었던 몇몇 기사들은 독에 중독되어 죽거나 운이 좋아 스스로 중독된 팔다리를 잘라서 겨우 살아났다.
그런 광경을 보고, 다른 기사들은 마왕과의 싸움에 가담할 수가 없었다.
사실 소피아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저번 삶에서 본 마왕의 힘은 평범한 기사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일반 병사는 일정 거리 안으로 접근할 수도 없었고.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말과 함께 마왕이 제국의 수도까지 멈추지 않고 진격해온 것도 바로 마왕의 이런 강대한 힘 때문이었다.
그래서, 처음에 소피아의 친우들과 작전관들이 지금과 같은 작전을 짜왔을 때, 소피아는 바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작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작전을 거부하지 않았다.
저번 삶에서 마왕과 싸웠었다는 것을 알리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무슨 작전을 쓰더라도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왕이 이 정도로 약해진 것을 알았다면 다른 작전을 들고 왔을 텐데…….
그래 봤자 이기지는 못했을 테니, 큰 상관은 없었다.
그래도, 상황이 달라졌고, 계획도 달라졌으니, 소피아는 그들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검호들을 제외한 기사들은 전부 물러서요. 마왕은 검호들과 내가 붙잡고 있겠습니다!”
이번 삶에서는 마왕에 대해 최대한 정보를 얻기로 했으니, 헛된 목숨을 낭비할 수 없었다.
저 정도로 약해진 마왕이라면 싸우다가 몸을 빼는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마침, 병사들도 마물들을 데리고, 상당히 멀리까지 퇴각하는 중이었으니, 이제는 마왕과의 싸움에 영역 선포를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소피아는 기사들을 물러서게 하고, 바로 싸움에 참여하려 했다.
아직도 일렁이는 게이트가 걱정이 되긴 했지만, 지금은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할 때였다.
소피아는 검은색 검을 뽑아 들고, 검호들과 싸우는 마왕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아직 남아있는 마물들이 그녀 앞을 막아섰지만, 평범한 마물들이 그녀의 검과 영역 선포를 막을 수 없었다.
마물들은 그녀가 다가와도 도망치지도, 덤비지도 못했다.
땅이, 바람이, 공기가 전부 자신들을 공격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건 환상이기도 하고, 현실이기도 했다. 소피아가 펼친 영역 선포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마물들이 그 환상을 겨우 빠져나왔을 때는 이미 그녀의 검이 마물들을 지나간 뒤였다.
마물들은 채 영역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몸이 잘려 바닥에 흩어졌다.
소피아가 달리며 그녀를 막아서는 마물들이 굳어버리고, 차례대로 피 보라가 되어 흩어지는 가운데, 소피아가 마침내 마왕 앞에 도착했다.
“지금부터 제가 지원하겠습니다! 모두 제 마나를 받아들여 주세요.”
그녀는 정신없이 움직이는 검호들 사이에 뛰어들면서 모두에게 들리도록 외쳤다.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여제의 지휘를 보게 되는 건가!”
소피아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능력을 다 가지고 있는 대단히 뛰어난 기사이자 능력자였지만, 그녀가 싸우는 방식은 부모님과 달랐다.
부모님 양쪽의 능력을 물려받았지만, 소피아는 두 사람의 능력을 모두 물려받은 것은 아니었다.
우선, 진정한 용사로 불리는 아버지의 능력 중에 일부만 물려받았었고, 두 번째 삶을 사는 지금도 현실 조작에 가까운 어머니의 능력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홀로 우뚝 선 부모님들과 달리,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싸우는 법을 익히고 키워왔다.
바로, 영역 선포를 이용해서 일정 공간을 그녀만의 전투 공간으로 만들어, 그 안에서 동료들과 함께 적과 싸우는 것이었다.
영역 선포로 적을 약화시키고, 아군을 강하게 만들고, 그들과 함께 마나를 공명해서 적을 물리치는 방법.
그녀가 황실 기사단과 함께 전국을 돌아다닌 것도 그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황실 기사단이 영역을 펼치기에는 제일 편했지만, 숙련이 된 지금은 누구라도 상관없이 영역 안에 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온 이가 강한 사람일수록 그녀의 능력은 더욱 빛을 발했다.
당연히 제국에서 제일 강하다는 검호들이라면 그녀의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소피아가 마나를 퍼트려 다시금 영역을 펼치자, 마왕과 싸우던 검호들은 한순간에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모두 고갈되어가던 마나가 가득 차고, 갑갑하던 마음이 평안해졌다.
그녀의 능력을 처음 겪어본 검호들은 절로 감탄을 토해냈지만, 뒤에 이어진 감각은 감탄조차 나오지 않았다.
영역을 받아들인 검호들의 머릿속에 수많은 이미지가 밀려들었던 것이다.
‘지금, 발목에 검을!’
모두가 검호 미겔이 틈을 보아 마왕의 발목에 검을 찔러 넣은 것을 보고 느꼈고.
‘등에 밀어 넣은 검이 너무 얕았나?’
마왕의 등을 스쳐 지나가는 루카스 기사단장이 보는 광경을 동시에 같이 볼 수 있었다.
검호들의 빠른 움직임에 화염 마법을 쏟아부을 타이밍을 잡지 못하는 ‘마법사’의 고뇌를 느낄 수 있었고, 투레 백작이 통증을 느끼는 것을 모두 알게 되었다.
“맙소사. 설마, 모두의 감각을 공유하는 건가?”
뒤늦게 놀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감탄사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모두의 머릿속에 소피아의 음성, 아니 이미지가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나이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독에 취약할 겁니다. 투레 백작님은 지금 물러나십시오.’
‘마법사님이 공격할 수 있게 모두 한순간에 물러섭니다. 바로 지금!’
‘루카스! 바로, 미겔 경이 만든 상처를 더 공격해요!’
분명 소피아가 한 지시가 각자에게, 모두에게 들려왔지만, 그 지시는 긴 음성이 아니라, 한순간에 전해졌다.
한순간도 아니었다.
한순간을 수백 개로 쪼갠 그런 찰나에 내려진 지시였다.
검호들은 쏟아지는 이미지에 놀랐지만, 그 이미지에 허둥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제국 최고의 반사 신경과 마나 활용이 가능한 검호들인 만큼, 그들은 그 지시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마치 톱니바퀴가 정교하게 돌아가듯이, 초인에 가까운 검호들이 한 몸처럼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영역을 만들어 아군을 강화하고, 적을 약화하는 한편, 그 안의 아군을 한 몸처럼 움직이게 하는 소피아의 기술.
기사의 반사 신경과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마나 감응력, 그리고 어머니에게서 얻은 영역 선포로 만들어낸 그녀만의 능력이자 기술이었다.
물론, 아쉽게도 마왕의 능력이 독과 회복력인 만큼 다른 적들에 비해 그 효과가 크지 않지만, 그녀의 능력을 보게 된 검호들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아졌다.
소피아는 모두에게 지시를 내리며 마왕에게 검을 휘둘렀다.
그녀가 가세하자, 마왕의 상처는 훨씬 더 늘어났다.
치료되는 속도가 그대로라, 아직도 앞길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흉물스러운 마왕의 얼굴에 낭패감이 어리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질 것 같아서 겁을 먹은 것이 아니라,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은 표정.
그 표정을 보고, 직접 싸움에 참여해보니, 마왕을 상대로 검호들이 잘 버티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검호들이 잘 싸워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마왕이 전보다 약해져서만도 아니었다.
지금 마왕은 검호들과 진심으로 싸우지 않고 있었다.
마왕이 인간을 봐주거나 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왕은 다른 곳에 신경이 팔려있었다.
마왕은 의아하게도, 이곳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려는 것처럼 보였다.
검호들과 싸우는 것도 그들을 죽이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마치 앞길을 막는 하루살이들을 쫓아버리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도대체 왜?
소피아의 머릿속에 다시 의문이 떠오를 때였다.
덜컥.
덤벼오는 검호들을 향해 팔을 휘젓던 마왕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크아아아앙!
마왕은 하늘을 향해 괴성을 지르더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 순간.
소피아는 저번 삶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의 마지막 기억.
저 숨을 내뱉는 순간, 수도가 멸망했고, 수도가 독에 허물어지는 것을 보며 소피아도 죽었었다.
죽음의 숨결.
마왕이 가지고 있는 독을 사방으로 퍼트리는 마왕의 필살기.
그녀와 수도에 모인 제국인이 합심으로 수일 동안 마왕과 마물들을 막아서자, 분노한 마왕이 마지막으로 펼친 공격이었다.
‘설마, 필살기가 아니었었나?’
소피아는 그때의 능력을 다시(?) 쓰려는 마왕을 보고, 낮게 신음을 흘렸다.
죽을 때 마지막으로 봐서 쉽게 쓸 수 없는 필살기로 여겼었는데…….
그래서 그에 대해 대비도 하지 않았었고.
하지만, 그게 아니었나?
그러면 지금이 아니라, 그때 마왕이 수도에 남은 우리를 가지고 놀고 있었던 건가?
그렇다면 마왕은 소피아의 생각보다 더 강할지도 몰랐다.
마왕을 우습게 여기는 기사들을 보고, 소피아가 혀를 찼었는데, 그녀도 다를 바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모두 도망쳐요! 마왕이 독을 살포할 거예요!’
“모두 도망쳐요!”
소피아는 이미지와 함께 모두에게 고함을 쳤지만, 검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의 능력 때문이었다.
그녀도 영역 안에 있었기에 모두 그녀의 진심을 알아버렸던 것이다.
마지막까지 남아 영역으로 모두를 지키겠다는 그녀의 결심을.
소피아는 망해버린 삶이니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일 뿐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자신을 희생해서 모두를 구하려고 한다고 느낀 것이었다.
사실 다르지 않았다.
그녀에게 회귀가 있다고 하지만, 모두를 구하려 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회귀가 있으니, 그녀는 이들을 구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없었던 일이 될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모든 삶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그리고, 소피아는 언제나 아버지의 말을 지키려 하는 착한 딸이었다.
거기다, 그녀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은 검호들만이 아니었다.
물러서던 기사들이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마왕에게 달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여왕님을 구해라!”
일찌감치 도망치지 않고, 천천히 물러서더니, 이럴 때만 번개같이 달려오는 이유가 뭔지.
하나같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버리려 하는 이들을 보며, 소피아는 기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그보다 소피아는 아쉬웠다.
이번에는 좀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알아낸 것이 없었다.
그나마 한 가지 알아낸 것은 저번 삶에서 본 것보다 마왕이 강했다는 정도일까.
원치 않은 정보에 소피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다음에는 그래도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소피아는 마왕이 숨을 내뱉는 것을 바라보았다.
칼에 찔리고, 불에 구워지면서도 마왕은 배를 부풀리며 숨을 들이마셨고.
이윽고 입을 벌려 숨을 내뱉으려 했다.
그 모습에 소피아는 눈을 감으려 했다.
그녀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이번에는 고통이 좀 덜해지기를 빌었다.
그 순간.
번쩍.
일렁이던 게이트에서 섬광이 번쩍이더니.
“쿨럭!”
벌어지던 마왕의 입이 덜컥 다물어졌다.
마왕의 뒷머리를 그 빛이 강타한 것이었다.
검호들의 공격에도 꿈쩍도 안 하던 마왕이었는데.
마왕은 뒷머리를 잡으며 게이트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는 마왕의 눈에는 분명 공포가 담겨있었다.
소피아도 마왕처럼 게이트로 고개를 돌렸다.
게이트를 보는 그녀의 눈에는 마왕과 달리, 눈물이 흘러내렸다.
일렁이는 게이트를 통해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알렉스와 발레아.
여제의 부모가 돌아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