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1화
제11편 외전 소피아 (17)
마왕이 넘어온 뒤, 문 너머로 다른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게이트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모두 게이트에 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는데, 그 게이트에서 보이던 다른 세계의 모습이 다시 또렷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또 무슨 일인지.
마왕이 등장했을 때의 모습을 저번 삶에서 보지 못했기에 그때도 이런 일이 있었는지 소피아는 알지 못했다.
소피아는 게이트의 모습도 다음 삶을 위해 시간을 두고 살펴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게이트가 변하는 순간, 가만히 있던 마왕이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크아아아앙!”
마왕이 괴성과 함께 피와 살점을 토해내며 인간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소피아에게 달려오고 있는 마왕은 아버지가 싸웠다는 전 마왕과는 닮은 점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원래 인간이었던 전 마왕과 달리, 소피아의 눈앞에 있는 마왕은 인간과 조금도 닮지 않았다.
마왕은 오히려 저 강대한 마나가 아니었다면 평범한 마물로 생각되었을 정도로 평범해 보였다.
사람보다 대여섯 배나 큰 거대한 덩치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마물이 또 없는 것도 아니었고.
출렁이는 살들과 함께 피부가 벗겨지고, 곳곳에 고름이 흘러나올 정도로 흉측한 모습이었지만, 이 마물보다 더 보기 힘든 마물도 많았다.
그래도 따로 모습을 설명하자면, 이 마왕은 소피아의 아버지가 오랫동안 싸우셨다는 누더기 거인 마물왕과 조금은 닮아 있었다.
그 마물왕처럼 거대한 크기도 아니었고, 살까지 흘러내릴 정도로 망가진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소피아는 이 마왕이 아버지가 설명했던 마물왕과 닮았다고 느껴졌다.
좀 더 압축되고, 단단해져서 완성된 모습이랄까.
그리고, 닮은 점은 외형만이 아니었다.
마왕의 능력도 아버지가 말한 마물왕과 많이 닮아 있었다.
“모두 피해요! 마왕의 공격을 막지 말아요!”
소피아는 달려오는 마왕을 보고, 모두에게 마나를 실어 외쳤다.
소피아로서는 영역 선포로 마왕의 전진을 막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마왕에게 영역을 쓸 수 없었다.
영역 선포는 마왕의 마나에게서 병사들을 지키기 위해 쓰고 있었다.
아직 병사들이 마왕의 마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 그들에게서 영역을 거두어들인다면, 병사들 태반이 죽거나 미쳐버릴 것이었다.
더구나, 그렇게 해서 영역을 펼친다 해도, 저번 삶에서 경험해 보았듯이 마왕의 움직임을 제한하기에 역부족이었다.
한 번은 막을 수 있겠지만, 그 뒤는 소용이 없을 터.
저번 삶에서도 그녀의 영역은 마왕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정도밖에 효과가 없었다.
물론, 소피아의 실력도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마왕의 움직임을 막기에는 아직 부족했다.
여제의 명령에 기사 대부분과 검호들은 바로 흩어졌다.
소피아도 바로 옆으로 몸을 피했지만, 아쉽게도 피하지 못한 기사들이 있었다.
아니, 피하지 않은 기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지방 영주들의 기사로 훈련에 참여한 젊은 기사들이었다.
마물왕과 마왕에 대해 전해 듣기만 했던 혈기 왕성한 젊은 신제국의 기사들.
제국이 대륙을 통일하는 일에 참여해서 실력을 뽐내 여제의 마음에 들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던 기사들이었다.
마지막 대규모 훈련에 와서 마왕이라는 뜬금없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지만, 그들에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여제는 눈앞에 있었고, 대륙을 통일하는 대신 그들이 마왕을 쓰러뜨리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거기다, 마왕이라고 부르는 마물은 다른 마물과 다른 것 같지도 않았다.
저런 마물 때문에 이런 난리를 피우다니.
그들에게는 마물왕 때문에 전 제국이 휘청거렸다는 늙은 기사들의 말도, 마왕을 쓰러뜨렸다는 선황제의 이야기도 전부 허풍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한순간에 눈을 맞춰 앞으로 나서기로 했다.
마왕과의 첫 격돌에 나서서 여제의 주목을 받기로 한 것이었다.
기백의 기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가운데, 수십의 기사들이 남아 달려오는 마왕을 막아섰다.
그들은 자신 있었다.
자신들은 강대한 신제국의 기사들이었고, 마물과의 싸움도 여러 번 경험해 보았었다.
더구나 지금 달려오는 마물의 마나가 대단하긴 했지만, 버티기 어려운 정도는 아니었고.
물론, 강대한 신제국의 기사라고 전부 강한 기사가 될 리가 없었다.
그들이 싸웠던 마물들은 알렉스 선황제가 정리하고 남겨놓았던 마물이었고.
지금 그들이 느끼는 마왕의 마나는 소피아 여제가 영역으로 억제하고 있는 마나의 잔재일 뿐이었지만.
공명심에 눈이 먼 그들은 그 사실들을 전부 외면해 버렸다.
그래도 나름 그들은 그동안 훈련받았던 대로, 진형을 갖추고 마왕을 맞이했다.
방패를 들고, 어깨를 맞대고, 서로의 마나를 엮어 강력한 벽을 만든 것이다.
얼마 전에 새로 만들어진 마물 떼마저 막아설 수 있는 새로운 마나 사용법이었다.
신제국이 세워지면서 만들어진 이런 기술들 때문에 젊은 기사들이 기세등등해진 것이었다.
사실, 이런 기술들은 전부 선황제인 알렉스와 저번 삶에서 마왕을 경험한 소피아가 배포한 기술들이었지만, 더 이상 신격화 대상이 되기 싫었던 부녀는 이 기술들을 자신들이 만들었다는 것을 숨겼다.
동료의 마나가, 서로의 힘이 합쳐지는 것을 느끼자, 그들은 달려오는 마물이 더 가소롭게 느껴졌다.
차라리, 병사들에게 달려들고 있는 마물들 쪽이 더 무서워 보일 정도였다.
그들은 자신 만만한 얼굴로 마물을 막아섰고, 마물, 아니 마왕이 그 벽에 부딪혔다.
콰아앙!
폭음이 울리고, 동시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악!”
벽을 만들어 마왕의 진격을 막아섰던 기사들의 비명이었다.
기사들은 한순간도 마왕을 멈춰 세우지 못했다.
수많은 마물을 막아섰던 마나의 벽은 마왕의 마나와 부딪치는 순간, 바로 허물어졌다.
기사들은 집채만 한 마물의 육체와 바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고, 모두 사방으로 수십 미터 이상 튕겨 나갔다.
일반인들이었으면, 폭죽처럼 터져버렸을 상황.
그래도 강대한 기사들이라 육체를 보전할 수 있었다.
팔다리가 부러지고, 몇몇 기사들은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보였지만, 다행스럽게도 모두 팔다리가 붙어있는 채로 살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지만, 사방에 널브러진 기사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 갑작스러운 통증에 온몸을 뒤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파!”
“커억. 컥. 이게…. 무슨….”
“내장이 녹는 것 같아.”
“살려줘….”
그나마 괜찮아 보이던 기사들은 사실 괜찮지 않았다.
그들은 부러진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사방으로 피를 쏟기 시작했다.
입과 코, 눈과 귀, 항문과 모든 구멍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피뿐만이 아니었다. 그 피와 함께 살점과 내장 부스러기가 같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기사들의 피부도 보라색으로 변하면서 허물어져 갔다.
마왕을 피했던 기사들이 그들을 도와주려 했지만, 소피아가 그들을 막았다.
“그들을 만지면 안 됩니다! 독에 같이 당하게 됩니다! 이미 늦었어요!”
소피아가 괜히 피하라고 한 게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마물과 비슷해 보이는 마왕이었지만, 마왕은 마왕이었다.
마왕의 힘은 그 육체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귀족들이 마나를 이용한 다양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마물도 오염된 마나로 각종 능력을 발휘했다.
당연히 마왕도 그만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마왕의 주 능력은 바로 독이었다.
“마왕의 공격은 전부 독이 담겨 있습니다! 마왕의 공격에 닿지 않아야 합니다.”
평범한 독이 아니었다.
마왕의 오염된 마나가 만들어내는 독이었다.
웬만한 독은 버텨내는 귀족들과 기사들이라도 한순간을 버티지 못하는 강력한 독.
기사들이라 몸에 닿아서 독에 당한 것이지,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근처에만 가도 떼로 몰살당하게 될 터였다.
저번 삶에서 마왕의 공격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그때도 마왕이 쓸고 지나간 곳은 독이 담긴 핏물만 가득했었다.
제국의 수도 차르마니아 성벽 앞은 그래서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전부 마왕을 막아서다가 죽은 병사와 기사들이 남긴 피들이었다.
수도 차르마니아도 결국 그 독에 무너졌고.
마왕의 살이 벗겨진 것도, 고름이 덕지덕지 나 있는 것도, 전부 마왕이 가진 독 때문이었다.
마왕 자신마저 피해를 주는 강대한 독.
그런 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저렇게 강대한 힘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마왕의 무지막지한 회복 능력 때문이었다.
소피아의 아버지, 알렉스가 오랫동안 싸웠다는 좀비 거인의 회복 능력처럼, 마왕은 정말 끊임없이 회복했다.
그래서, 소피아는 마왕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었고.
그런데, 이번 삶의 마왕은 조금 이상했다.
저번 삶 때 보았던 마왕의 독은 이렇게 약하지 않았었다.
그때는 마왕의 손에 닿은 기사들의 몸이 바로 녹아내렸었는데.
그때의 마왕은 비명을 지를 시간도 주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번 삶의 마왕에게 당한 기사들은 아직도 살아 있었다.
물론, 내장을 모두 쏟아낸 채로 살아만 있는 거지만.
당한 기사들에게는 안 좋은 일이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좋은 소식이었다.
소피아는 기사들을 막아선 뒤, 지나쳐간 마왕을 확인했다.
지금 마왕은 검호들이 상대하고 있었다.
구 제국 때 살아남았던 검호들과 신제국에서 세워진 새로운 검호들.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누구보다도 빨리 마왕에게 달려들었다.
“생각보다 빠르다! 독이 있다니까 반응하기 어려운 녀석들은 원거리로 빠져!”
미겔이 노련하게 움직이며 마왕의 틈을 찾아내고 있었고.
“아버지도 빠지세요! 걸리적거립니다!”
황실 기사단장 루카스가 천재 기사라는 이름답게 본능적으로 마왕의 공격을 피하며 검을 휘둘렀다.
“이런 놈이 아들이라니. 아직 멀쩡해!”
투레 백작은 아들의 말에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조금은 위험해 보였지만, 백작은 아직까지도 마왕의 공격을 잘 피해 다녔다.
그렇게 기사 출신의 검호들은 안정적으로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다른 능력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젠장, 이번에도 내 마법은 안 먹히는 건가!”
마나를 이용해서 마법처럼 능력을 사용하는 ‘마법사’ 검호가 인상을 쓰며 뒤로 물러섰다.
마나를 이용한 마법을 쓰는 그였기에 더 강한 마나를 가지고 있는 마왕에게는 효과가 거의 없었다.
그건 다른 능력을 쓰는 검호들도 마찬가지였다.
강대한 마왕의 마나에 휘말려 다른 능력들은 거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마왕의 움직임이 빨라, 기사 출신이 아니고서는 마왕의 공격을 피하기도 어려웠고.
“피부라도 태워! 그럼 조금은 독에서 안전해지겠지.”
그래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공격은 먹힌다! 이길 수 있어!”
우려와 달리, 검호들의 공격이 통했기 때문이었다.
마왕의 피부는 그렇게 질기지 않았다.
검호들의 검에 살이 잘리고, 근육이 끊어졌다.
검호들은 그 모습에 환호했지만, 그 환호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 맙소사! 상처가 바로 회복되잖아!”
그건 검호들이 만든 상처가 점점 사라져간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만든 상처도 사라졌어요!”
얼마 전에 만든 상처는 벌써 보이지 않았고.
“뭐 이리 빨라!”
“이렇게 회복해대는데 마나도 줄지 않고?”
마왕은 회복하는 동안 마나가 변하지도, 지치지도 않았다.
“설마 무한히 회복하는 건가?”
그 말대로였다.
저번 삶에서 마왕은 수많은 공격을 받고도 모두 회복해냈다.
저 상처 이상으로 몸이 잘리고, 갈려 나가도, 순식간에 회복해 낸 것이었다.
아예 부활을 해버렸다는 전 마왕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무한 회복만으로도 소피아는 두 손을 들고 말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왕은 조금 이상했다.
독이 약해진 것처럼 회복도 저번 삶 때처럼 빠르지 않았다.
그때는 검이 지나가는 순간, 다 회복해버렸었는데.
지금은 조금이나마 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확실했다.
분명, 저번 삶과 달리 마왕이 약해져 있었다.
그렇다고 바로 이번 삶에서 마왕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반복하는 삶의 횟수를 많이 줄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소피아는 고개를 돌려 일렁이는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설마?”
마왕이 약해진 것을 보니, 저 마물 세상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