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8화
제8편 외전 소피아 (14)
상위 귀족 일부만 알고 있었던 제국의 전쟁 준비는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이들이 알게 되어갔다.
그도 그럴 것이 엄청난 재물이 제국의 기사단과 군대에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소피아 여제의 예지에 가까운 훌륭한 정책들로 인해 제국이 더욱더 강성해지는 가운데 벌어진 일이라, 알아차리는 게 늦었을 뿐, 모를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여제의 대륙 통일 전쟁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새로 건립된 신제국은 대륙을 통일했던 고대 제국 뒤에 등장한 대륙에서 가장 강대한 제국이었다.
뛰어난 여제 덕분에 지금도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나라였고.
거기다 그 제국을 세운 초대 황제는 마왕을 쓰러뜨린 용사였다.
그 마왕은 고대 제국을 무너뜨리고, 차르 제국의 초대 황제가 용사들과 함께 겨우 봉인한 마왕이었다.
그런 용사가 세운 제국이 다시 대륙을 통일하겠다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신제국이 전제국이었던 차르 제국처럼 고대 제국의 후계자라고 자처하지는 않았지만, 기반 자체가 차르 제국에서 이어온 만큼, 소식을 들은 제국의 모든 사람은 여제의 결정을 무척이나 환영했다.
여제의 예상대로 기사단과 군대에 돈을 쏟아붓는 일에 반대하는 사람은 드물었고.
몇몇 평화주의자들을 제외한 제국민들은 진심으로 여제가 대륙을 통일해주기를 원했다.
물론, 그런 여제의 행보에 반대하는, 아니 공포에 질린 사람들도 있었다.
제국 밖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미 합병한 카를로스 왕국을 제외한 이피로스와 남반부의 여러 나라들. 그리고, 작은 공국들까지.
모두가 제국의 행보를 무서워했다.
이미 대륙의 반 이상을 차지한 제국이었다.
차르 제국 시절에는 마물이라는 공통의 적이 있었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었지만, 이제 마물로는 신제국의 발목을 잡을 수 없었다.
거기다, 과거 반제국의 구심점이었던 카를로스 왕국이 제국에 합병이 되어버렸으니.
나머지 나라들은 거대한 제국의 전쟁 준비에 사색이 될 뿐이었다.
오죽했으면, 과거 제국의 속국이라고 불렸던 이피로스 왕국이 카를로스 왕국 대신에 새로운 반제국의 구심점이 되었을까.
그들도 나름대로 열심히 군비를 늘리고, 군대와 기사단을 키우기 시작했지만, 제국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했고.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매일같이 제국에 사절을 보내 제국의 관용을 비는 것이었다.
오늘 이피로스 국왕, 막스 이피로스가 신제국을 찾아온 것도 그런 이유였다.
공식적으로는 소피아 여제 직위 7년 차를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긴 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은 이피로스 왕국이 반제국의 구심점이 되어가고 있는데, 그 나라의 국왕이 먼 길을 직접 찾아올 일은 없었을 테니까.
전 황제의 실무적인 방식을 이어받은 소피아 여제라서 그런지, 막스 왕을 맞이하는 수도 차르마니아도 생각보다 차분했다.
“사절을 맞는 것 말고는 큰 행사를 대부분 취소했으니, 분위기가 차분한 게 당연하죠.”
황궁 앞에서 그가 마차에서 내릴 때, 그를 맞이한 이가 그 이유를 왕에게 설명했다.
친절한 설명이었지만, 이피로스 국왕은 자신을 마중 나온 이를 노려보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이피로스의 왕자가 제국 일을 돕고 있다니!”
황궁 앞에서 이피로스의 왕을 맞이한 이는 이피로스의 왕자이자, 왕의 아들인 번즈 왕자였다.
“전 제국 때도 왕세자 말고는 제국에 유학을 오는 일이 많았잖습니까. 그때는 볼모 취급이었겠지만……. 대충 그런 이유로 하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만.”
“그때와는 상황이 다른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구제국의 속국 취급받아왔던 이피로스 왕국은 막스 왕의 노력으로 이제는 다른 나라들로부터 당당한 독립국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문제는 그런 이유로 반제국의 구심점 노릇을 떠맡게 되어, 이렇게 왕이 직접 제국을 찾아오게 되어버렸지만.
그런 왕의 입장으로 왕자가 되어서 제국의 녹을 먹고 있는 번즈를 보니, 속이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제국을 달래기 위한 볼모라고 말하기도 하고, 일종의 스파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일국의 왕자가 자기 나라를 침공할 준비를 하는 나라의 녹을 먹고 있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었다.
결국, 이피로스 왕실은 번즈 왕자를 내놓은 자식 취급을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마중 나온 아들을 보고 있자니, 막스 왕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버지께 죄송합니다만, 전에도 말했다시피 소피아 여제에게 코를 꿰여버려서요.”
막스 왕은 아들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카를로스 아카데미로 유학을 보내지 않았어야 했는데.
괜히 소피아 여제에게 엮여서 아들을 빼앗겨버렸다.
그때, 같이 다녔던 이들 모두가 지금은 소피아 여제 옆에서 그녀를 돕고 있다고 하니, 아들만 욕하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건 아버지 입장이었고, 왕으로서는 화가 날 뿐이었다.
“너 때문에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시달리는지 알고 있느냐. 지금도 귀찮은 일을 맡게 되어, 힘들어 죽겠는데, 너라도 도움이 되어야지.”
“그건……. 죄송합니다. 그래도 형님도 계시고, 동생들도 있으니…….”
아들의 말에 막스 왕은 한숨을 쉬며 손을 내저었다.
그의 손에서 피어오르는 마나.
황궁을 향해 걷고 있는 그와 아들 주변에 방음벽이 펼쳐졌다.
막스 왕은 멋지게 펼쳐진 방음벽을 보고 혀를 찼다.
이것도 알렉스에게 배운 거였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왕이 아들에게 말했다.
“네 형도, 동생들도, 내 앞에서 매일 제국을 성토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건 귀족들도, 백성들도 마찬가지고, 다들 진실을 모르니 어쩔 수 없겠지.”
지쳐 보이는 왕의 말에 번즈 왕자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들에게 뭐라 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이피로스에서 진실을 아는 것은 너와 나밖에 없으니까.”
푸념 섞인 왕의 말에 아들이 위로의 말을 꺼냈다.
“지금도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선황제 폐하의 주변 분들과 여제 폐하의 측근분들밖에 없으니까요.”
소피아 여제도 처음에는 부모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대륙 전쟁을 핑계로 큰 틀만 만들어두었지만, 언제까지고 모두에게 계속 비밀로 한 채로 일을 진행할 수는 없었다.
소피아 여제의 권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다른 이들에게 비밀로 한 채로 마왕을 상대할 준비를 하기는 어려웠다.
인간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것과 마물을 대비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고.
대륙을 차지할 전략을 짜는 것과 마왕과 싸울 전략을 짜는 것은 아예 다른 일이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 마왕을 직접 상대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소피아는 가까운 이들에게 차례로 사실을 이야기해주었다.
지금 제국이 준비하는 것은 대륙 통일이 아니라, 마왕을 상대하기 위한 것이라고.
물론, 자신의 회귀 능력을 말해준 것은 아니었다.
다행히 제국에는 예언 능력이 있는 가문이 남아있었다.
실제로는 선황제인 알렉스가 가문 전부를 쓸어버렸지만, 남아있다고 우겨버리면 그만이었다.
소피아는 예언 능력으로 마왕이 다시 쳐들어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고, 부모들은 여행이 아니라, 마왕을 막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아버지 선황제 폐하의 측근들은 그녀가 말하기도 전에 알고 있었고.
그녀가 끌어들인 친우들도, 늦지 않게 사실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렇게 알게 된 이들 가운데 막스 왕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피아 여제가 막스 왕에게 부탁한 것은 이피로스가 반제국의 구심점이 되어 다른 나라의 군사력을 키워달라는 것이었고.
막스 왕은 투덜거리면서도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
“정말이지……. 내가 알렉스 황제가 아니었으면, 이런 귀찮은 일을 맡는 게 아니었는데.”
아들에게 한참 동안 투덜거리는 막스 왕이었지만, 알렉스 황제에게 코를 꿰인 것은 막스 왕이 먼저였다.
알렉스가 눈앞에서 그의 나라를 구해준 기억이 남아있는데, 도와달라는 말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것도 새로 등장하는 마왕을 막기 위한 도움이라니.
결국, 그는 아들과 달리 진짜로 제국의 스파이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그가 오늘 이곳에 온 것도 공식적으로는 소피아 여제의 7년 차 축하 사절이었고, 다른 이들이 알기로는 제국의 관용을 비는 일이었지만.
사실은 소피아 여제와 앞으로의 일을 조율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상황인데, 네가 제국에서 일하고 있으면, 다들 사람들이 의심하게 되지 않겠냐!”
막스 왕이 화를 내는 이유는 아들이 적국인 제국에서 일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들 때문에 자신의 비밀이 들킬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남들이 볼 때는 열심히 아들에게 화를 내는 것이었고.
그렇게 복도를 걸어가며 다른 이들이 알지 못하는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곧 축하연이 벌어지는 홀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활짝 열린 거대한 문과 그 안에 모인 수많은 사람.
황제가 된 지 7년이 지났음에도 아직 젊은 여제가 그녀의 가족과 함께 단상 뒤에 앉아 안으로 들어오는 막스 왕을 보고 있었다.
* * *
거대한 홀에 모인 수많은 사람이 소피아 여제의 등극 7주년을 축하해주었다.
수많은 축하객이 소피아에게 선물을 건네고, 이피로스의 막스 왕도 소피아에게 다가와 축하 인사를 했다.
소피아는 그에게 따로 할 말이 있었지만, 당장 이 자리에서는 그의 축하에 담담하게 감사를 전할 뿐이었다.
그렇게 선물을 전달하는 시간이 끝나고, 이제는 모두에게 감사 인사를 할 시간.
소피아는 단상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홀에 꽉 찬 그녀를 축하하기 모인 사람들.
귀족들과 영주, 외국의 사절까지.
초청장을 많이 보내서 그런지, 예전보다 많은 사람이 찾아온 것 같았다.
하지만, 저들 가운데에 부모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황위에 오른 지도 벌써 7년째.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저번 삶과 다른 일들이 일어나 처리하는 데 고생한 일도 많았고.
기사단과 군대를 강화하는 일에 사건 사고도 자주 일어났었다.
반란을 막기도 하고, 암살을 하러 오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일들을 이겨냈고, 이 시각,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어차피 이번에 마지막 축하연이었다.
올해는 마왕이 나타날 해.
결국, 부모님은 돌아오지 못하셨다.
그 사실에 소피아는 지금도 울고 싶었지만, 겉으로 보이는 얼굴에는 언제나처럼 옅은 미소만 보이고 있었다.
그래도 소피아는 절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부모님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저번 삶에서 마왕과 싸웠던 그녀가 볼 때는 이번 삶에도 마왕을 쓰러뜨리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동안 열심히 준비했지만, 마왕과의 싸움은 많은 병력이 아니라, 특출난 강자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소피아에게는, 제국에게는 그런 강자가 없었다.
그녀 자신도 뛰어난 능력자였지만, 7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는 아버지 수준은 물론이고, 어머니 실력도 따라잡지 못했다.
그런 소피아가 제국의 최강자였으니까.
물론, 같이 쏟아져 나올 마물들은 막아낼 수 있게 준비했지만, 마왕을 막지 못한다면 전부 의미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소피아는 아쉽지 않았다. 어차피 이번 삶에서 마왕을 막을 생각도 없었다.
부모님이 돌아오지 못했는데, 마왕을 막아낼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마왕을 막아내면 문제였다.
마왕을 막아낸다면 소피아가 부모님을 뵙기 위해 자살을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문제는 자살하면 벌칙이 장난이 아니라고 들었으니.
그냥 마왕에게 죽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부모님이 노력한 만큼,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다음 삶에서 부모님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그래서 그녀는 축하를 하러온 사절들에게 선언했다.
“축하를 해주신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그 답례로 제국은 내일부터 기동 훈련을 시작합니다. 위치는 고대 제국의 수도입니다. 제국의 전 기사단과 전군이 모이는 이번 행사에 모두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갑작스러운 여제의 말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사람들 대부분은 여제의 말을 듣고, 드디어 제국이 대륙 통일을 위한 마지막 담금질을 하려 한다고 생각했고.
그녀의 측근들은 이제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이번 훈련은 훈련이 아니었다.
훈련이 아니라, 실전이었고,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마물, 마왕을 상대하는 것이었다.
이제 제국은 마왕과 싸울 시간이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