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7화
제7편 외전 소피아 (13)
소피아가 편지를 보게 된 그 시간에 알렉스는 다른 세계로 넘어와 있었다.
마물들이 사는 차원.
인간 대신 마물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곳이고 정명한 마나가 아닌 오염된 마나가 대기를 채우고 있는 세상.
황량한 붉은 땅 위에 서서 알렉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늘도 붉고, 땅도 피처럼 붉었다.
숨은 쉴 수 있었지만, 공기는 탁했고 냄새도 좋지 않았다.
그래도 예상대로 숨은 충분히 쉴 수 있었고 그리 춥지도 덥지도 않았다.
처음 와본 섬뜩한 세상이지만,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 세상은 아니었지만, 마왕과 싸울 때 알렉스는 발레아의 도움으로 비슷한 경험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발레아가 자신이 펼친 영역을 이곳과 같게 느껴지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이 세계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마왕조차도 현실로 생각했었으니, 따지고 보면 알렉스는 처음 온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래도 마왕과 싸울 때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알렉스는 몸을 확인해보았다.
어디에도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그 당시 마왕은 이 세상에서 있을 때 계속해서 오염된 마나에 고통받아 왔었다.
그의 몸에는 화상이나 산에 눌어붙은 것 같은 흉터가 가득했었고.
마왕과 마지막 싸울 때 발레아가 영역으로 펼친 가짜 세상 안에서도 마왕은 물론이고 그도 오염된 마나에 고통받았었다.
그나마 짧은 시간이라 치유 능력으로 버텨냈을 뿐.
새로운 마왕을 상대하기 위해 이 세상으로 넘어오기로 했을 때,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바로 이 세상에 가득한 오염된 마나였다.
알렉스는 몸속에 있는 마나를 움직여 보았다.
몸을 휘돌던 마나가 피부 밖으로 조금씩 확장되어나갔다.
웅웅웅.
마나를 펼쳐 자신의 주변을 본인의 영역으로 만드는 숙련된 기사들의 기본기.
이 세상에서도 문제없이 펼쳐졌다.
원래는 오염된 마나 때문에 불가능했겠지만.
알렉스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발레아를 바라보았다.
발레아는 지팡이를 든 채로 조금씩 능력을 조정하고 있었다.
이런 오염된 마나 속에서 이렇게 고통을 받지 않는 것도, 자신의 마나가 문제없이 펼쳐진 것도 모두 발레아 덕분이었다.
전 마왕과 싸울 때 발레아가 짧은 시간 안에 이 세계를 영역으로 흉내를 내었던 것은 정말로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짧은 시간 동안만 유지하면 되는 일이었고, 발레아도 그 짧은 시간 동안을 버티는 것조차 힘들어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예 마물들이 사는 세상으로 넘어가 마왕을 찾아다녀야 했다.
그동안 발레아는 그때와 반대로 그녀의 영역을 이용해서 이 세상의 오염된 마나를 평범한 마나로 위장해야 했다.
마왕을 찾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무슨 상황을 맞이할지 알지 못하는 상황.
그녀는 밥을 먹을 때나 싸울 때나 잘 때까지 항상 영역을 유지해야 했다.
사실 재활 훈련 대부분은 이 세계의 마나를 위장하는 발레아의 영역 훈련이었고 알렉스는 그동안 실험체 역할을 해 온 것이었다.
알렉스는 지팡이를 쥐고 고민하는 듯한 발레아에게 물었다.
“힘들지 않아?”
발레아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예상 내의 부하예요. 이 정도면 잘 때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요.”
걱정 없다는 듯이 말을 하는 발레아였지만, 알렉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둘은 같이 산 지 십여 년이 지난 부부였다.
알렉스는 그녀의 표정과 말의 뉘앙스만으로도 발레아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쉽다고 말하지 않는 것을 보니, 준비한 것보다 빠듯한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발레아의 말대로 감당할 정도라는 것이었고.
하지만, 감당할 수 있다고 해도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미안하네. 이런 고생을 시키고.”
알렉스의 말에 발레아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요. 나도 당신처럼 소피아와 다른 아이들을 위해서 온 거니까요. 더구나 소피아는 내가 낳은 딸이에요. 날 닮은 게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발레아의 말에 알렉스는 쓰게 웃고 말았다.
서로 닮은 꼴이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모녀라니.
그 닮은 점도 자신에 관련된 문제라 알렉스는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예상보다 짐이 하나 더 늘어나서 조정하는 데 시간이 걸렸어요.”
발레아는 지팡이를 내리며 그녀의 반대편에 서 있는 아이샤를 가리켰다.
아이샤는 알렉스 오른편에 서서 놀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신기한 광경에 넋을 놓고 있던 아이샤는 발레아의 말에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달려왔다.
“설마 나 때문에 많이 힘드나요?”
발레아 앞에 선 아이샤는 제대로 훈련받은 아름다운 여기사였다.
전 마왕과 싸울 때도 보긴 했지만, 아직 어렸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성인 기사의 모습이 여실히 보였다.
그런 기사가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발레아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발레아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영역은 공간 자체를 장악하는 기술이었다. 사람 숫자는 상관없었다.
그녀는 도움이 되고자 따라온 사람이었다. 거짓말을 해서 미안한 감정을 지니게 할 필요는 없었다.
“아뇨. 출발하기 전에 말했듯이 일정 거리만 벗어나지 않으면 상관없어요.”
출발하기 전, 같이 가도 괜찮다는 말에 같이 떠나온 아이샤였다.
아직 어린 딸이 있어 둘만 올 생각이었는데 아이샤는 발레아의 말에 뒤도 안 돌아보고 세상을 넘어왔다.
알렉스가 아이샤에게 아이 이야기를 해보았지만,
“프리다 언니가 키워주시기로 했어요. 그 아이도 이제 8살인데 혼자 설 때가 되기도 했어요.”
아이샤는 알렉스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했다.
생각해보면 아이샤도 10살에 카를로스 왕궁을 떠나 아카데미에 입학했었다.
그곳에서 알렉스를 만나 내전을 거쳐 왕이 된 것은 10대 초반이었다.
그런 아이샤에게 8살이면 다 큰 것일 터였다.
그녀의 말을 들은 알렉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단한 아내들을 얻긴 했는데, 그 아내들의 기준이 너무 높았다.
회귀 능력이 사라진, 전생을 기억하는 알렉스에게는 지금처럼 가끔 아내들이 무서워질 때가 있었다.
하지만 아내들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십 대인 딸에게 황제 자리를 넘겨준 당신이 할 말인가요?”
분명 이런 말이 나올 테니까.
원죄가 있었던 그는 한숨을 내쉬며 출발 준비를 했다.
가지고 왔던 유물 가방과 유물 주머니도 문제없었다.
안에 넣어둔 몇 년 치 식량과 물, 각종 생활용품도 전부 문제없었고.
각종 유물들도 잘 들어 있었다.
이 세상으로 와서 마왕을 잡으려 한 것은 이 유물 가방과 주머니 덕분이었다.
무게와 부피에 상관없이 바리바리 짐을 챙길 수 있는 가방과 주머니를 믿고 알렉스는 이 세상으로 넘어올 생각을 한 것이었다.
알렉스는 황제의 권력을 이용해서 이 안에 많은 물건을 채워 넣었다.
제국의 식량창고를 털고, 황실 금고에서 유물을 빼내 가방과 주머니를 채웠다.
마물들의 세상에 오긴 했지만, 알렉스는 전 마왕처럼 고생할 생각은 없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싸우는 데 있어서 보급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보급의 치트키가 있는데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다들 기다릴 테니, 빨리 마왕을 잡고 돌아갈까?”
“얼마나 걸릴까요?”
“글쎄, 이 세상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없으니……. 그래도 용사들의 기억에서 본대로라면 아예 무지막지하게 큰 곳은 아닌 것 같으니까.”
커도 원래 세상의 대륙 정도의 크기일 거라고 예상했다.
“1년 안에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알렉스도 두 부인도 그들이 마물들에게 죽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마물들의 세계를 통일해서 인간 주제에 마왕이 된 전 마왕을 쓰러뜨린 알렉스와 부인들이었다.
전 마왕도 죽였고 어쨌거나 재활 훈련도 제대로 했는데 이 세계의 마물들에게 당할 리가 없었다.
다만, 모두 너무 늦게 마왕을 찾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1년 안에, 늦어도 마왕이 힘을 얻어 그들의 세상으로 넘어가기 전에 마왕을 찾아야 했다.
실패하더라도 소피아의 회귀라는 비책이 있긴 했지만, 그 회귀를 하지 않도록 부모들이 이곳에 온 것이었다.
알렉스와 아내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에서 마왕을 잡을 생각이었다.
그날 알렉스와 두 부인은 전 마왕에 이어 인간으로서는 두 번째로 마물의 세상에 나타났고, 그 세상을 흔들어놓았다.
몇백 년 만에 또다시 벌어진 외계인의 침공으로 마물들의 세상은 소란스러워졌다.
* * *
부모들이 마물 세상을 휘젓기 시작했을 때, 소피아는 전보다 더 맹렬하게 정무에 빠져들었다.
처음 이야기를 듣고 부인도 하고 화를 내보기도 하고 침울해지기도 해보았지만 계속 그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가 제국을 움직이는 황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녀를 위해 마물들의 세계로 떠난 부모, 아버지 때문이었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위험한 세상으로 가셨는데 자신을 떼어놓았다고 여기서 낙담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낙심했던 소피아는 이번 삶에는 처음으로 술을 진탕 마시고, 다음 날 업무에 복귀했다.
그녀가 다시 업무에 복귀한 것은 며칠 동안 기다렸는데도 나타나지 않은 저장 시점 메시지 때문이기도 했다.
“저번 삶에서 많이 죽어서 레벨업이라는 것을 해봤어야 했나…….”
그녀가 회귀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아버지 알렉스는 그녀에게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중간 저장 시점이라는 있어서, 죽지 않아도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면 중간에 저장 시점이 생겼다고 하셨었는데.
그녀는 <시점 회귀> 능력을 각성한 각성식 외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아카데미를 갔을 때도, 이번에 부모님들이 마물들의 세상으로 갔을 때도 아무런 메시지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아기 때 많이 죽어서 레벨업을 한 것이 아닌가 하셨지만, 솔직히 소피아는 그 말을 쉽게 믿기가 어려웠다.
아기 때부터 계속 죽다니.
아기 때부터 그것을 기억하고 해결책을 찾아냈다는 소리가 아닌가.
설마 현직 용사는 그런 것도 가능한 건가.
소피아의 <사자회귀>를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소피아를 보고 다시 없을 천재라고 소리를 높였지만, 아버지를 보고 자란 소피아로서는 진정한 천재는 따로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끝까지 메시지가 나오지 않자 소피아는 포기하고 업무에 복귀했다.
중간 저장 시점이 있다면 조금 실수하거나 잘못해도 중간중간 수정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죽거나 실패하면 다시 10살 각성식으로 돌아갈 터.
자신을 위해 10년을 준비한 뒤에 다른 세상으로 가신 부모님의 노력을 없는 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녀는 업무에 복귀한 뒤에 하나하나 일을 처리해나갔다.
우선 다른 세상으로 떠난 부모님들은 젊었을 때 꿈꾸었던 모험을 떠난 것으로 해두었다.
매번 노래를 불렀던 일이었기에 사람들도 쉽게 수긍했다.
동생들은 프리다 선황비께서 잘 키워주셔서 걱정이 없었다.
그렇게 새로운 황제를 맞이한 제국의 정비가 어느 정도 끝나자, 소피아는 제국에 폭탄을 터트렸다.
소피아 황제 1주년.
대귀족이 모인 기념회의 시간.
소피아는 귀족들 앞에서 선언했다.
“제국은 이제부터 전시 준비를 시작합니다. 목표는 10년. 그때 대륙을 하나로 만들 겁니다.”
마왕을 대비하기 위해 전시 준비를 한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대륙을 통일하기 위해 군대와 기사단을 강화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을 수 있지만, 마왕이 등장할 거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줄 뿐이었다.
공포는 사람들의 힘을 합치게 해주기보다, 좌절과 분열을 만들 뿐이었다.
거짓말이기에 사람들에게 비난을 듣겠지만, 상관없었다.
폭정을 한다는 소리가 나와도, 다른 나라들이 공포에 질려 항의해도 괜찮았다.
어차피 마왕이 등장하면 소용없어질 일이었고, 부모님이 무사히 돌아오신다면 비난을 이유로 아버지께 황위를 돌려드리면 될 뿐이었다.
뭐, 아버지께서 모아놓은 기사단으로 겸사겸사 대륙을 통일해도 되는 일이었고.
소피아의 선언을 들은 귀족들은 그녀의 예상대로 흥분한 얼굴로 그녀에게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소피아는 전쟁에 환호하는 귀족들을 보고 부모님이 보고 싶어졌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