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6화
제6편 외전 소피아 (12)
그동안 황제가 황태녀에게 일찍 황위를 이양하게 될 거라는 이야기가 계속 나돌고 있었긴 했지만,
그 이야기가 당장 사실이 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싸움 없이 차르 제국을 이어받고, 결혼이라는 방법으로 카를로스 왕국과 합병했지만, 아직 신제국이 세워진 지도 십여 년이 지났을 뿐이었다.
그런데 벌써 어린 황태녀에게 황위를 이양한다니,
황제 대신 대부분의 정무를 처리하고, 지혜롭기로 소문이 자자한 아름다운 황태녀였고,
그녀의 모습을 보고, 그녀와 함께 일한 사람들은 모습도 잘 보이지 않는 황제보다 훨씬 더 황제 같다고 이야기할 정도였지만,
그게 당장 황위를 이양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사실, 다들 지금 방식이 충분히 만족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용사인 황제가 뒤를 받치고 있고, 정무는 지혜로운 황태녀가 처리하고 있으니,
제국인 모두는 어떤 상황이든 걱정이 없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황제의 독단적인 선언은 귀족들 사이에서는 물론, 제국 전체에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하지만, 막강한 황제의 힘과 훌륭하게 정무를 수행 중인 황태녀 때문에 사람들은 제대로 반대도 못 하고, 혼란스러워할 뿐이었다.
그런 가운데, 시간이 흘러 결국, 소피아의 황제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사람들은 말도 많고 혼란스러웠지만, 즉위식은 훌륭하게 준비되었다.
강성한 제국의 힘을 그대로 보여주는 화려한 행사와 대륙 곳곳에서 방문한 사절들.
각 영지에서 올라온 제국의 귀족들까지.
수많은 사람이 황위를 이어받는 소피아를 축하해 주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소피아는 황제 앞에 나아가 황제가 건네주는 두 개의 검을 바라보았다.
제국의 신물인 단검과 카를로스 왕국의 보검인 기사의 검.
두 검을 받게 되면 그녀는 제국의 새로운 황제가 될 터였다.
소피아는 자신 앞에 들이밀어진 두 검을 보고,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보았다.
나이가 들었지만, 전혀 나이가 든 것 같지 않은 황제,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보며 웃고 있었다.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듯한 모습.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소피아는 심통이 났다.
그녀는 황제에게 물어보았다.
사람들은 황위를 건네주기 전에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는 황제와 딸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너무 빠른 황위 이양이었지만, 이렇게 평화로운 승계를 보는 게 얼마 만인지.
강력한 후대를 세우기 위해 매번 형제들끼리 싸움을 붙이는 세상이긴 했지만,
그걸 실제로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평화롭게 뛰어난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 게 모두의 생각이었으니까.
물론 그게 불가능해서 매번 작위를 잇거나 왕위를 계승할 때, 피를 보는 것이겠지만.
자신의 왕국이나, 영지는 아니었지만, 거대한 대제국의 황위 이양이 이렇게 평화롭게 진행되는 것을 보고, 많은 이들이 진심으로 기뻐했다.
물론, 또 다른 사람들은 지금도 새로운 황제에게 어떻게 줄을 대야 할지 열심히 머릿속으로 계산을 돌리고 있었지만.
그들도 용사인 황제가 죽은 것도 아니고, 저렇게 건강하게 예전 모습 그대로 서 있는 것을 보니, 전과 다르게 행동하기도 쉽지 않았다.
결국, 겉으로나마 모두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며 웃고 있었지만,
사실 당사자들이 하는 대화는 지켜보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말과 전혀 달랐다.
“이 검 받기 싫은데요. 안 받으면 안 될까요?”
“안 돼. 준비하는 데 든 돈이 얼마인데, 여기서 취소할 수는 없어.”
“그 계산도 제가 다 한 거잖아요. 어차피 제가 다 하고 있는데, 그냥 이대로 지내도 될 것 같은데요.”
“안 돼. 너도 내 말에 수긍하지 않았었니. 마왕을 상대할 준비를 하기 위해 네가 황제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마왕을 상대하기 위해 알렉스는 개인적인 무력을 키우고, 소피아는 황제가 되어 제국을 준비시킨다는 계획.
황위를 건네준다면서 알렉스가 꺼낸 이야기였다.
사실, 지난 삶을 실제로 겪은 소피아로서는 지금도 황태녀의 위치로는 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앞으로는 국력을 모아 마왕을 대비해야 했다.
귀족의 반대와 백성들의 반대도 이겨내야 하는 상황. 개인적인 훈련으로 잘 보이지도 않는 아버지에게 매번 말해서 해결하기도 쉽지 않았다.
소피아는 아버지의 말이 맞는다고 인정하긴 했지만, 그건 이성적인 면일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 즉위식이 다가올수록, 이성적인 생각은 점점 작아지고, 불안한 마음만이 점점 커졌다.
그리고, 즉위식이 열린 오늘, 그 불안감은 이성적인 면을 전부 날려버릴 것 같았다.
“그래도 싫은걸요. 저번 삶에서는 아버지가 안 계셔서 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아버지가 계시잖아요. 그냥 아버지가 계속 황제를 하시면 안 되나요?”
소피아는 애처롭게 황제를 바라보았고, 황제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미안한 얼굴이 되었다.
“항상 너를 위하고자 노력했지만, 그게 오히려 너를 고생시키는 모양이구나.”
두 사람에게는 황제라는 자리는 제국을 다스리는 존귀한 자리가 아니었다.
그것보다 고생스러운 일을 떠맡게 되는 자리에 가까웠다.
얼마 안 있으면 마왕이 쳐들어오게 될 테니까.
황제는 소피아를 안쓰럽게 바라보았지만, 그래도 이대로 식을 중단시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게 최선이란다. 미안하다.”
황제로서는 이게 최선이었으니까.
소피아도 이해하긴 했다.
그냥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
“미안하다는 그 말은 반칙이에요.”
하지만, 아버지의 사과를 듣고, 더 우길 수는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건네준 두 검을 손에 쥐었다.
그 순간, 그녀 주변에 펼쳐져 있던 방음벽이 사라졌고, 모두의 환호가 들려왔다.
“축하드립니다!”
“제국의 영광을!”
“소피아 여제님께 축복을!”
박수와 함께 모두의 함성이 홀을 에워쌌다.
황궁 밖에서는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어서, 기뻐하는 가족들이 보였다.
그녀가 황제가 되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어머니들과 동생들.
소피아는 그런 어머니들을 보며 감사하면서도 조금은 신기하게 여겨졌다.
친어머니만큼은 아니었지만, 프리다도 아이샤도 똑똑하고 욕심이 적지 않은 분들인데.
아이샤 황후님은 일국의 왕이셨고, 프리다 황비님도 대공녀이신데다가, 가장 귀족적인 분이셨고.
아버지의 능력이든, 친어머니의 책략이든 간에, 그동안은 참으로 평화로운 황실이었지만, 그래도 다들, 자식이 황제가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었을 텐데…….
모두 소피아가 황제가 되는 것을 기뻐하고 있었다.
소피아는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많은 이들이 걱정했던 새 황제의 즉위식 이후, 제국은 모든 이들의 생각보다 훨씬 잘 굴러갔다.
즉위식과 함께 벌어진 축제도 무사히 끝나고, 생업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모두 황제가 된 소피아를 조심스럽게 지켜보았었다.
황태녀일 때는 잘했지만, 황제가 된 뒤로 바뀌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소피아는 그런 황제들과 달랐다.
그녀는 전처럼 겸손했고, 그때처럼 지혜로웠다.
그리고, 황제의 권위를 이용해서 여러 가지 큰 사업을 시작했다.
그동안 미뤄왔던 기사단과 군대의 개편과 방관에 가까웠던 봉인지의 정비, 거기다, 전 카를로스 왕국과의 협력까지.
황제가 된 소피아의 행보 덕분에, 너무 일찍 황제가 되었다는 말이 사라져 버렸을 뿐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안심하고, 소피아도 황제의 자리에 적응하게 된 여러 달 뒤 어느 날이었다.
소피아는 평상시와 달리, 집무실에 앉아 아픈 머리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황제 자리가 힘들어서 생긴 두통이 아니었다.
아침부터 황궁 지하에서 일어난 거대한 마나 때문이었다.
프리다 선 황비께서 황궁 창고에서 유물을 가지고 실험한다고 미리 알려왔기는 했지만, 이렇게 강력한 마나가 터져 나올 줄이야.
황궁 창고라면 유물을 숨기기 위해 웬만한 마나는 다 가두어둘 수 있을 텐데.
그걸 뚫고, 지상까지 마나가 뻗어 나오다니.
마왕을 상대할 방법을 찾기 위한 실험이라고 하긴 했지만, 이 정도의 마나가 뻗어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
그래도, 소란이 없는 것을 보니, 알아차린 것은 마나에 예민한 소피아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사실, 강력하기는 했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알아차리기 어려운 마나였으니까.
마나에 예민한 소피아만 강력한 마나에 놀랐을 뿐이었다.
아버지와 친어머니도 그러더니, 도대체 무슨 비밀이 이렇게 많은지.
여제가 된 지금도 어린 딸 취급을 받는 것 같아, 소피아는 많이 속상했다.
소피아가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는 사이, 집무실에 프리다가 찾아왔다.
방금 전 실험에 대해 말해 줄 모양이라, 소피아는 바로 그녀를 맞아들였다.
하지만, 프리다는 피곤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소피아에 편지를 건네주었다.
아버지의 인장으로 봉인되어 있는 편지.
소피아는 놀라 프리다를 바라보았다.
“네 아버지가 남긴 편지란다. 먼저 읽어보렴. 읽고 나서 내가 설명해 줄 테니까.”
불길한 생각에 소피아는 바로 인장을 뜯어 편지를 확인했다.
편지 안에 적혀 있는 필체는 아버지 알렉스의 필체. 아버지의 편지가 맞았다.
소피아는 편지를 바로 읽어 내려갔다.
[ 이렇게 편지로 남기게 되어 미안하구나.
직접 말해 주고 싶었지만, 직접 말하면 네가 가지 못하게 막을 것 같아, 이렇게 편지를 남긴다.
우선 그동안 너를 속여 왔던 것을 사과해야겠다.
사실, 수년간 이어온 재활 훈련은 재활 훈련이라기보다 적응 훈련이었다.
네 엄마와 내가 마왕이 사는 세상에 적응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시간이자, 네 엄마의 능력으로 저쪽 세상의 오염된 마나를 막을 수 있을지 확인하는 시간이었지.
그래도 다행히, 늦지 않게 성공한 것 같구나.
너도 훌륭하게 자라 주어서 제국을 맡길 수 있게 되었고.
그 덕분에 우리는 뒤를 걱정하지 않고, 마왕과 싸우러 갈 수 있게 되었다.
알고 있겠지만, 네 엄마와 나는 항상 네게 고마워하고 있단다.
물론 너는 내 계획에 반대하겠지.
마왕이 넘어온 뒤에 같이 싸우던가, 아니면 우리를 따라오려 했을 테지.
아니, 이 편지를 보는 지금 뭔가 방법을 찾으려 하려나?
하지만,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
어차피, 우리가 이렇게 차원을 넘게 된 것도 프리다가 오랫동안 모아온 유물을 전부 사용한 것이니까.
당연히 너는 몰래 떠나 버린 우리에게 화를 내겠지만, 자식들을 위험에 처하도록 놔두는 부모는 없단다.
너도 알다시피, 마왕이 넘어와 버리면 아무리 잘 막는다고 해도 피해가 없을 수가 없다.
그 와중에 너와 다른 아이들이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고.
물론, 너는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겠지만, 그 당시의 고통과 외로움이 어떤 것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단다.
발레아와 다른 아내들이 없었다면 나도 버티지 못했을 테니까.
그래서, 우리는 적의 땅에서 적과 싸울 생각이란다.
마왕이 준비되기 전에 싸우게 될 테니, 승산도 더 올라갈 테고.
오랜만에 모험가 느낌도 낼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랄까.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우리 아이들을 지키는 김에 대륙도 다시 한번 구하게 될 테고.
나머지 이야기는 프리다에게 들으렴.
그럼, 우리는 멋진 모험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갈 테니, 그동안 동생들과 제국을 잘 부탁한다.
끝으로,
나와 네 엄마는 항상 너를 사랑한단다.]
소피아의 손에서 편지가 떨어져 내렸다.
소피아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프리다를 바라보았지만, 프리다는 지친 얼굴로 다시금 사실 확인을 해주었다.
“조금 전에 알렉스와 발레아가 마왕을 잡기 위해 내가 만든 게이트를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