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5화
제5편 외전 소피아 (11)
한 번 경험했던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시간은 빨리 흘러갔다.
소피아가 아카데미에서 돌아온 지도 5년.
소피아는 어느덧 17살이 되었다.
아카데미에서 돌아온 뒤, 소피아는 도와달라는 황제의 말대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바로 현업에 뛰어들었다.
저번 삶에서 경험한 일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했기에, 처음에는 국가의 중대사를 제외한 일부터 처리해나갔다.
말단 서기관의 일부터, 행정과 기사단, 군에 관련된 일까지.
황제가 결정할 만한 일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카데미를 갓 나온 소녀가 할 만한 일들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소피아는 맡겨진 일들을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잘 처리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보기에는 십 대 초반의 소녀였지만, 그녀는 저번 삶에서 제대로 아수라장을 겪어보았었다.
황제가 없는 제국을 이끌고 마왕과도 싸워보았는데, 이런 일들이 어려울 리가 없었다.
더구나, 그녀에게는 미래에 대한 경험이 있었다.
저번 삶에서 제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황제 가까이에서 지켜봤기에 남들이 알지 못하는 문제들도 잘 피해 갈 수 있었다.
그렇게 되니 소피아에 대한 칭송은 점점 더 늘어갔다.
거기다가, 황제는 소피아가 아카데미에서 돌아온 뒤부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소피아를 데리고 나갔다.
귀족들과의 면담에서부터, 외국의 사절, 각종 회의 자리까지.
그때마다 황제는 소피아가 앞에 나서서 일을 진행하게 했다.
귀족들을 면담할 때도, 황제 대신 말을 하게 하고, 사절의 접견을 직접 받게 만들고, 회의를 주관하게 했다.
사람들은 놀라고 걱정했지만, 소피아는 또 황제가 시킬 때마다 훌륭하게 해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소피아가 앞에 나서서 일을 진행하는 게 익숙해졌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황제가 벌써 황위를 건네줄 준비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돌아다녔다.
“황위를 이양할 준비를 하고 있다니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미겔 경의 물음에 소피아는 벌컥 화를 냈다.
제국 내에서 공공연하게 도는 소문이었지만, 제국의 검호가 그런 말을 하다니.
아무래도 황제의 전 스승은 나이를 먹을수록 입이 더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아니었나? 난 소피아 황녀에게 황제 자리를 미리 넘겨버리고, 여행을 다닐 생각인 줄 알았는데…….”
잘생긴 중년 남자가 된 미겔은 황태녀의 말에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하는 미겔을 보고, 소피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에요. 저도 말이 심했어요.”
사실, 미겔 경에게 화를 낼 게 아니었다.
그녀 앞에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다들 그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검호이자 황제의 스승이었던 미겔 경 정도나 그녀에게 말할 수 있는 거였고.
미겔 경도 다른 이들을 대신해 그녀에게 물어 봐 준 것일 터였다.
황위 이양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그런 소문이 퍼질 만도 했다.
처음에는 자잘한 일을 맡아 했지만, 5년이 지난 지금은 소피아가 황제가 할 일을 거의 다 처리하고 있었으니까.
국가의 중대사도 그녀가 처리하고 있었고, 다른 귀족을 만나는 것도, 외국의 사절도, 군대의 통솔도 그녀 홀로 해나가고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황제보다 그녀를 훨씬 더 자주 보게 되었다.
아니, 반대로 황제를 볼일이 얼마 없다고 할까.
그러니, 황제가 상황으로 물러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만 했다.
소피아는 그런 소문에 답답했지만,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해 줄 수가 없었다.
소피아가 돌아온 뒤에 다시 활발하게 모습을 보여 주던 황제가 다시 보이지 않게 된 것은 그가 다시금 훈련에 돌입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황제가 소피아와 같이 돌아다녔던 이유는 소피아가 일을 해나갈 수 있게 그녀를 소개하고, 준비시켜 준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충분히 일을 맡길 수 있게 되자, 얼마 전부터 황제는 다시 과거의 훈련을 시작한 것이다.
사실 소피아도 아버지를 많이 보지 못하게 되어 섭섭했지만, 황제의 훈련을 막을 수 없었다.
마왕을 막기 위해, 마왕에게 죽지 않기 위해 훈련하는데, 어떻게 막겠는가.
그런 이야기를 다른 이들에게 말할 수도 없으니, 소피아는 속으로 앓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소피아도 요즘은 황제에게 불만이 많았다.
첫 번째 불만은, 황제와 황후가 하는 훈련이란 것을 소피아가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나이를 먹어가며 소피아도 실력이 많이 늘어 황제의 훈련에 충분히 참석할 수 있는데, 황제는 한 번도 그녀를 훈련장소에 데리고 가지 않았다.
사실, 황제가 그녀와 같이 가지 못한 것은, 훈련하는 곳이 황제의 공간 이동 능력을 사용해야 하는 봉인지 안쪽이라는 점이었고,
소피아는 아직도 황제의 공간 이동을 이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충분히 이해되는 이유였지만, 소피아의 불만은 왜 아직도 황제가 자신을 인정하지 않느냐는 점이었다.
그냥 딸이니까, 내 것이다라고 하면 될 텐데.
황제는 아직도 인정을 안 하고 있었다.
딸을 생각해서 그런 것이라는 알고 있긴 하지만, 안다고 불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불만은 황제가 그녀에게 모든 일을 떠맡긴 점이었다.
물론, 행정을 보고, 결정을 내리고, 사람을 만나는 것 같은 것은 충분히 혼자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싸우는 것도 전부 그녀에게 맡길 줄이야.
소피아는 기사단 선두에 서서, 던전 밖으로 쏟아져나오는 마물들을 지켜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와달라는 황제의 말을 듣고, 소피아는 제국을 다스리는 일은 그녀가 담당하고, 황제는 외부의 적이나, 지금 같이 마물을 막는 일들을 할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렇게 되면, 우겨서라도 황제와 함께 싸움터로 나가서 아버지 옆에서 싸울 생각이었는데.
이제까지 그녀가 실력을 키워온 것도 아버지와 함께 싸우기 위해서였다.
소피아는 제국을 지키는 것 이상으로 아버지와 함께 마왕을 쓰러뜨리고 싶었었다.
용사, 영웅인 아버지의 싸움을 직접 보고, 같이 싸우고 싶었는데.
황제는 훈련이라는 이유로 싸움마저 그녀에게 맡겨 버렸다.
마물과 싸우지 않으면 도대체 무슨 훈련을 하는 것인지…….
“마물이 나오기 전에 이렇게 대비할 수 있다니. 역시 소피아 님이십니다.”
속으로 계속 투덜거리던 소피아는 옆에서 들려온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에게 말을 건넨 것은 미겔 경이 아니라, 황실 기사 루카스였다.
아카데미에 다닐 때 천재기사로 이름 높았던 검호 투레 백작의 아들.
5년이 지난 지금, 그는 황실 기사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제국 황실 기사단 최연소 선임 기사.
그는 소피아가 있으니, 절대 최연소가 아니라고 투덜거렸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의 천재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정렬한 황실 기사단 앞으로 마물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평범한 산골 마을 뒷산 중턱에 있는 버려진 던전에서 쏟아져 나온 마물들.
이 마물들이 저번 삶에서는 이곳 영지를 쑥밭으로 만든 원인이었다.
그 던전은 고대 제국 때 마물을 사육하던 실험실이라고 했던가.
입구가 폐쇄된 던전 안에서 생태계가 형성되었고, 수백 년간 그들끼리 지내왔던 마물들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는 사건.
아쉽게도 소피아는 사건이 벌어진 던전 위치를 기억하지 못했다.
저번 삶에서 이 시기에 그녀는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즐거운 청춘을 보내고 있었던 때, 제국의 영지들은 박살 나고 있었다.
그때, 쏟아져나온 마물들을 정리한 것은 황제와 그의 아내들. 그리고, 황실 기사단이었다.
그 뒤에 소피아는 황제가 아니었다면 몇 개의 영지가 쓸려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래도, 소피아는 이 시기에 벌어진 사건만큼은 기억하고 있었기에 사람들을 보내 던전을 찾았다.
그리고, 다행히 시간을 맞출 수 있어, 이렇게 던전 앞에서 기다릴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아니, 마물들이 튀어나왔으니 이미 늦은 거야.’
그녀의 아버지, 황제였으면, 마물들이 튀어나오기도 전에, 던전 안으로 들어가 마물들을 정리했을 터였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이 흘러 지나가는 사이, 산 중턱 던전에서 튀어나온 마물들이 이제는 기사단 앞까지 내려와 있었다.
소피아는 정렬한 기사단원들을 둘러보았다.
검호인 미겔 경은 물론, 우고 기사단장과 루카스 그리고 다른 기사들까지, 두려워하는 기사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자신들을 믿기 때문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자신들과 같이 있는 소피아를 믿기 때문이었다.
소피아는 기사단을 둘러본 뒤에 기사단 뒤쪽을 바라보았다.
평화로운 산골 마을이 보였다.
사람들이 없어 무척이나 고요한 마을이었다.
당연하게도 기사단이 준비하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대피시켜 놓았었다.
이제는 사람도 없어 텅 빈 마을이었지만, 소피아는 빈 마을이라도 꼭 지킬 생각이었다.
평범한 마물들에게 시골 마을 하나를 지키지 못한다면 마왕에게서 제국을 지켜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황제가 없고, 어머니도 없었지만, 소피아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기 위한 준비였고, 그러기 위한 실전들이었다.
“이제 시작합니다!”
소피아는 모두가 듣도록 마나를 담아 소리쳤다.
이어서 그녀는 손에 든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여러 가지 보석이 박혀 있는 아름다운 지팡이.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나무 지팡이보다는 아랫급이지만, 그래도 제국 보물 창고에 모셔두던 유물이었다.
그녀가 계속 끌어모아 두었던 마나가 지팡이를 통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땅으로, 수풀로, 나무로 퍼져 나가는 마나.
마나는 앞으로는 달려오는 마물들을 지나고, 뒤로는 긴장한 기사단을 감쌌다.
그리고 이어지는 소피아의 음성.
“여기서 나 소피아가 선포한다. 이곳은 내 황국이며, 내 영토다. 내 백성은 이곳에 승리할 것이고, 적은 죽을지어다!”
그녀의 선언과 함께 영역이 선포되었다.
기사단의 육체에 힘이 깃들고, 마물들의 육체가 약해졌다.
땅이 움직여 마물들을 흔들었고, 풀과 나무가 움직여 마물들의 발을 묶었다.
아직 어머니의 수준만큼은 아니었지만, 소피아가 미리 준비한 <영역 선포>는 일정 지역 안에서는 이적에 가까웠다.
소피아는 마물이 밖으로 나오기 전에 막지 못해서 안타까워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마물이 나오기 전에 충분히 영역을 구축해 놓을 수 있었다.
몸에 힘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자, 기사단은 검을 치켜들고 소피아를 높이 외쳤다.
“소피아 황태녀께 영광을!”
매번 소피아의 선언과 함께 힘을 받아왔던 기사단에게, 숙녀가 된 황태녀의 이름을 높이 드는 것은 어려울 게 없었다.
아니, 사실 기사단의 젊은 기사단원들 태반이 소피아를 사모하고 있었다.
아카데미를 나온 지 5년이 지난 소피아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소피아도 제국 제일의 미녀로 이름 높은 발레아 황비와 견줄 만한 미인이 되었고,
더구나, 어머니를 닮아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을 연기하는 소피아였기에,
기사단원들에게 소피아는 모두에게 황태녀 이상의 여신이 되어 있었다.
그런 여신이 같이 있는데 두려울 게 없었다.
“돌격! 황태녀께 승리를 바치자!”
기사단은 달려오는 마물들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고, 소피아도 검을 치켜들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소피아의 본모습을 아는 우고 기사단장과 미겔 경은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기사단원들을 보니, 제국의 앞날이 어두웠기 때문이었다.
그날 또 한 번의 위기가 소피아의 손에 사라지게 되었고, 수도로 돌아온 소피아는 황제에게서 뜻밖의 말을 듣게 되었다.
“나 없이도 잘해 나가는 것을 보니 미루지 않아도 될 것 같군, 올해 너에게 황위를 이양하겠다.”
그건, 분명 헛소문이었을 텐데.
소피아는 멍하니 황제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