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4화
제4편 외전 소피아 (10)
벤자민 일등 서기관.
통합 전 카를로스 왕국에서 서기관을 했던 그는 현 황제의 영지였던 샤를 백작 영지에서 일하다가 황제를 따라 제국 정부로 자리를 옮겼었다.
카를로스 왕국에 있었을 때도 뛰어난 정치적 감각과 업무 능력으로 유명했던 그였기에,
샤를 백작가에서도, 제국에서도 계속 황제의 신임을 받아왔었다.
황제의 신임이 얼마나 큰지, 그가 아직 재상이 되지 못한 것은 아직 30대인 나이 때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소피아로서는 아버지가 벤자민 서기관을 이 정도로 신임할 줄은 생각지 못했었다.
“폐하께서 일을 벤자민 서기관님께 일을 전부 맡기고 황궁 밖으로 나가셨다고요?”
“몇몇 사람에게만 알리시고요. 덕분에 이렇게 제가 대신 황제 폐하 역할을 하고 있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냥 일을 맡긴 정도가 아니었다.
“더구나, 폐하가 하셔야 할 결제도 전부 떠넘기고, 국세까지 건네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황제가 자리를 비우다니, 거기다, 본인이 해야 할 일마저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떠맡길 줄이야.
소문으로 들었던 이야기가 사실이었다. 아니, 사실 정도가 아니었다.
얼마나 오래 이렇게 해왔길래 그녀에게 들릴 정도로 소문이 난 것일까.
더구나, 황제 역할을 떠맡은 벤자민 서기관도 정말 하기 싫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2년 만에 만난 소피아에게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다.
어이없는 상황에 소피아가 버럭 화를 냈다.
“황후 폐하나, 프리다 황비님이 이걸 그냥 두고 보셨나요? 설마, 두 분도 모르시는 건가요?”
하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부부끼리 몇 개월에서 몇 년간 서로 얼굴도 안 보는 그런 귀족 집안도 아니었고, 그녀가 없었던 2년 동안 부부가 별거한 것도 아니었을 테니.
“두 분도 알고 계십니다.”
“아니, 왜, 막지 않으셨죠? 어머니야 아버지가 뭘 하신다면 막기보다는 따라가시는 분이지만, 다른 두 분은 현명하신 분들이신데.”
황태녀의 말에 벤자민은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황당하게도 딸인 황태녀가 어머니인 황비를 다른 황후와 황비를 빗대어 욕한 꼴이었지만,
솔직히 빈센트도 그녀의 말에 반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고.
“아버지가 계신 곳에 어머니도 계신 거죠?”
“네. 두 분이 같이 계십니다.”
“어디를 가신 건가요? 서기관님도 알고 계시죠? 아니, 지금도 찾아갈 수 있으시죠?”
이어진 질문에 벤자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말대로 벤자민은 지금 황제와 황비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고, 당장 만나러 갈 수도 있었다.
전부, 황제의 공간 이동 능력 덕분이었다.
황제의 <장비 소환> 능력이 강화되어 만들어진 공간 이동 능력.
그 능력은 황제가 자신의 것이라고 인식한 물건과 사람,
그리고, 그 당사자가 황제로 소속되었다고 생각하였을 때 발동되는 능력이었다.
몇 년 전 황제의 공간 이동 능력이 자신에게도 발휘되자, 벤자민은 넋 나간 얼굴로 좌절했지만, 소피아는 부럽기만 했었다.
아버지만 인정하시면 그녀도 가능할 텐데, 황제는 저번 삶에서부터 지금까지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도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을 터였다.
곧 마왕이 넘어오게 되는데,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황제는 공간 이동 능력 덕분에 벤자민에게 자기 일을 떠넘기고 자리를 비울 수 있었다.
급한 일이 있으면 벤자민이나 아내들이 황제를 찾아갈 수 있었고, 필요하면 황제가 벤자민과 아내들이 있는 곳으로 공간 이동을 할 수도 있었다.
그 덕분에 황제는 오랜 시간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외유가 가능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도 시간이 지나니, 소피아가 들을 정도로 소문이 나버렸지만.
이렇게 소문까지 나버렸으니, 소피아는 더 기다리지 않고, 부모를 만나기로 했다.
“그럼 지금 가서 제가 왔다고 전해주시겠어요?”
소피아의 말에 벤자민은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했다.
“이맘때쯤 오신다는 것은 알고 계시긴 합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가는 것은 조금……. 제가 가기에는 위험한 곳이라서요.”
“네? 위험한 곳이라뇨? 설마 봉인지라도 가신 건가요?”
설마, 마물과 싸우기라도 하시는 건가? 소피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도 그렇긴 하지만…….”
소피아의 말처럼 황제와 황후는 봉인지에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벤자민의 표정을 보니, 봉인지라서 위험한 게 아닌듯했다.
“설마, 봉인지에 있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을 하시는 거예요?”
사실, 마왕이 나타나지 않는 한, 황제와 황비가 같이 있는데, 대륙 안에서 위험할 만한 곳은 없었다.
소피아도 두 사람을 믿고 있었지만, 딸인 만큼,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두 분은 무슨 일을 하시는 거죠?”
“그건 저도 자세히는 모르는…….”
“알긴 아시잖아요!”
소피아의 말에 벤자민은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폐하가 오시면 물어보십시오. 저도 정확한 내용은 모릅니다!”
소피아는 열심히 손을 내젓는 벤자민을 보다가 문득 깨닫게 되었다.
자신은 자금, 벤자민 서기관과 대등한 위치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황태녀와 서기관 사이의 지위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
그쪽이라면 오히려 지금 너무 격이 없이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다른 것보다, 소피아는 지금 너무 편하게 벤자민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치, 저번 삶 마지막에 황궁에서 벤자민과 이야기를 나눌 때처럼.
생각해 보니 지금 벤자민은 소피아를 완전한 어른으로 대하고 있었다.
분명, 아카데미를 가기 전, 아니 각성 전에는 예의를 갖추면서도 그녀를 무척이나 귀여워해 주었었는데,
2년 만에 만난 벤자민은 어린 그녀를 보고도, 성인으로 대하고 있었다.
소피아가 그 이야기를 꺼내니, 벤자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그동안 레스티 님에게 계속 연락받았으니까요.”
벤자민은 황제의 심복이었고, 이렇게 황제 역할까지 하고 있으니, 레스티가 황제에게 보낸 보고서는 벤자민의 손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예상은 했지만, 레스티는 소피아의 생각보다 훨씬 더 자세히 보고를 올린 모양이었다.
“황제 폐하도 황후와 황비님들도 황태녀님의 활약에 모두 기뻐하셨습니다.”
벤자민의 칭찬에도 소피아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소피아는 그 칭찬을 아버지에게 직접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소피아는 이 자리에 없는 아버지에게 화를 내는 대신, 너무 성실하게 일한 레스티를 입에 올렸다.
“레스티 님이 그랬다고요…….”
“레스티 님은 잘 도망갔겠죠?”
소피아의 말에 벤자민은 부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왜 그렇게 빠르게 달아났는지 의문이었는데, 레스티도 이 상황을 전부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소피아의 표정이 더 안 좋아졌다.
레스티도 알고 있었다면, 결국, 몰랐던 것은 소피아밖에 없었다는 소리였다.
자신만 쏙 빼놓다니.
소피아는 울적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다른 어머니들에게 가서 하소연이라도 해야 속이 풀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몸을 돌린 소피아의 표정은 한순간에 달라졌다.
몰을 돌린 그녀의 앞에 두 사람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제와 황비.
소피아의 부모가 미안한 얼굴로 소피아를 보고 있었다.
“미안, 우리가 너무 늦었나 보네.”
황후가 소피아에게 사과했고,
“그동안 고생했다. 어서 와라.”
황제가 웃으며 그녀를 환영해주었다.
소피아는 우울했던 표정을 모두 벗어버리고, 부모님께 달려갔다.
“다녀왔어요!”
조금 늦게 공간 이동으로 넘어온 황제와 황비는 딸을 힘껏 안아주었다.
아름다워 보이는 상봉이었지만, 아쉽게도 딸을 안은 부모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딸의 포옹이 꽤나 아팠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에게서 기감을 이어받은 딸이 그걸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바로 포옹을 푼 딸은 놀란 얼굴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살펴보았다.
옷은 멀쩡하고, 싸운 흔적도 보이지 않았는데, 옷 밖으로 드러난 두 사람의 피부는 드문드문 열상을 입은 듯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마치 이상한 문양이 그러진 것 같은 열상.
놀란 소피아가 황제에게 물었다.
“설마, 다치신 거예요?”
소피아의 물음에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피부만 조금 상한 거다.”
그는 딸의 어깨를 두들겨 주더니, 허리에 차고 있던 검에 손을 올렸다.
부우우웅.
손을 올린 순간, 검에서 마나가 일어나고, 황제와 황비의 몸에 난 열상이 빠르게 사라져갔다.
“이제 없어졌잖니.”
“그건 그 검이 신검이라 그런 거잖아요.”
칼에 썰려도 팔다리가 잘려도 바로 회복시켜주는 신의 검.
황제가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은 그런 검이었다.
덕분에 황제와 황비의 몸은 전처럼 깨끗해졌지만, 소피아는 그걸 보고 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황제의 자기 치유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고 있었다.
검이 없더라도, 웬만한 상처는 빠르게 낫는 황제라는 것을.
거기다, 신검을 가지고 있으면서, 상처를 지닌 채로 공간을 넘어오다니.
도대체 어디서 뭘 하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피아는 묻지 못했다.
그녀가 묻기 전에 황제가 먼저 말했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마나를 움직여 작은 방음벽을 펼친 뒤, 소피아에게 말했다.
“그동안 발레아와 재활 훈련을 하고 있었단다. 저번 삶에서 마왕에게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놀고 있을 수는 없지 않니.”
재활 훈련이라니. 소피아는 생각도 못 한 이유였다.
하지만, 듣고 보니 이해가 되었다.
저번 삶에서 두 사람이 마왕에게 죽었다는 것을 소피아는 물론, 많은 사람이 쉽게 믿지 못했었던 것은 전 마왕을 죽이고, 봉인지를 정리한 황제의 힘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황제가 제국을 다스리느라 실력이 줄었었다니.
소피아는 이제야 그 당시의 의문을 푼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알리셨어야…….”
말을 하면서도, 소피아는 황제가 비밀로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마왕이 또 나온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황제가 훈련으로 외유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을.
황권이 강하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제국은 새로 만들어진 지 몇 년 되지 않은 나라였다.
귀족이나 다른 이들이 흠잡을 만한 건수를 만들어 줄 수는 없었다.
소피아는 황제의 결정을 이해했지만, 그래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몰랐어도, 그녀에게는 알렸으면 했으니까.
“미안하다. 걱정할까 봐 그런 건데. 오히려 더 걱정시킨 모양이구나.”
“그래도 알리지 않은 게 잘한 거예요. 알았으면 틈나는 대로 왔을걸요?”
어머니의 말에 소피아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틀리지 않은 말이었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움직여 보니, 확실히 죽었을 게 당연했다. 몸이 굳어서 정말 예전만 못해. 이대로 훈련을 계속해야 할 것 같구나.”
황제가 계속 훈련을 해서 제 실력을 발휘해 준다면, 저번 삶처럼 마왕에게 쉽게 당하지 않을 터였다.
당연히 소피아도 바라는 일이었고.
하지만, 이어진 황제의 말에 소피아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소피아도 바로 아버지의 일을 도와주었으면 좋겠구나.”
어느새 방음벽을 없앤 황제의 말에 벤자민은 반색했지만, 소피아는 난감한 기분이 되었다.
분명 아버지를 돕기 위해 아카데미를 다녀온 것이었지만, 직접 듣고 있으니, 뭔가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재활 훈련이라는 것도 뭔가 그녀의 생각과 다른 것 같았고.
하지만, 소피아는 황제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어쨌거나 그녀는 황제의 착한 딸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