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3화
제3편 외전 소피아 (9)
종업식이 끝나고 방학이 시작되자, 아카데미 안은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종업식이 있었던 강당 앞에도, 기숙사 앞에서 수많은 마차가 서 있었고,
몇몇 화려한 마차 옆에는 여러 명의 수행원과 기사들이 서 있었기도 했다.
그렇게 아카데미가 번잡스러웠지만, 강당 바로 앞은 그렇지 않았다.
강당 바로 앞에 몇 대의 마차가 서 있을 뿐 다른 마차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바쁘게 움직이는 학생들도, 학생들을 마중 온 사람들도 마차 근처로 다가오지 않았다.
마차 주변에는 마차를 호위하는 기사들과 마차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시녀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하기야, 이곳에 있는 사람 중에 황실 문양이 그려진 마차와 그 마차를 호위하는 황실 기사들에게 뻔뻔하게 다가올 만한 사람은 없을 터였다.
그렇게 모두가 멀찍이 떨어져 구경하고 있는 황실 마차에 일단의 학생들이 다가왔다.
이제 막 어른이 된 것처럼 보이는 젊은이들과 그들 가운에 있는 몇 살은 어려 보이는 소녀.
아카데미 학생들 가운데 이들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특히 어려 보이는 소녀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마중 나온 외부인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강당 앞에 서 있는 황실 마차의 주인이자, 제국의 황태녀였으니까.
이들은 황태녀가 떠나기 전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었다.
다들 방학 동안에 집에 갔다가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올 생각이었지만, 소피아는 지금을 마지막으로 아카데미를 떠나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소피아는 3학년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실습 위주인 기사학부와 행정학부의 3학년 수업은 각각 황실 기사단 입단과 제국 궁내부 활동으로 대체하기로 했기에 졸업도 문제없었다.
사실, 실습을 위해 소피아가 따로 하는 일은 없었다.
황실 기사단의 통솔을 위해 소피아는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에 바로 황실 기사단에 소속되기로 되어 있었다.
평기사가 아니라, 지휘관 쪽이긴 했지만.
궁내부 활동도 마찬가지였다. 황태녀인 그녀는 아카데미에 오기 전부터 황실 사무를 총괄하는 궁내부 소속이었다.
물론, 저번 삶과 달리, 가지고 있는 지위와 권력을 신나게 써먹은 것이긴 했지만, 시간이 부족했던 소피아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부모님이 걱정되었던 그녀로서는 한 번 경험했던 3학년을 다시 지낼 생각이 없었다.
결국, 2년간 같이 지낸 친우들과도 여기서 헤어져야 했다.
마차 앞에 멈춰선 소피아는 친우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약속한 대로 수시로 연락해야 해요. 그리고,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알려주시고요. 무슨 일이 있어도 바로 달려갈게요.”
소피아 주변에 모인 신입생 때 사귀었던 친우들과 그 뒤에 사귄 이들.
소피아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눈에 담으며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이 말들은 예의상 한 말이 아니었다.
이들은 그녀가 정성을 들여 아카데미에서 친해진 사람들이었다.
어떻게 만든 인맥인데, 놓칠 수는 없었다.
따로 그녀가 부른 아이노아는 내년부터 제국 수도에서 머물게 되겠지만, 다른 이들은 전부 내년에는 사방으로 흩어질 터였다.
천재기사인 루카스는 투레 백작의 영지로 갈 테고, 번즈 왕자는 이피로스로 돌아갈 것이었다.
그 뒤에 사귀었던 이들도 전부 자기 영지와 나라로 흩어지게 될 터.
연락마저 하지 않게 되면 아카데미에서의 인연은 쉽게 끊어질 게 분명했다.
소피아의 솔직한 심정으로는 모두 제국에 데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저번 삶에서 각자 자신이 있던 곳에서 성공했던 이들이었다.
소피아는 그들을 제국에 데려와서 그만큼 성공하고, 성장시킬 수 있다고 자신할 수가 없었다.
대신, 그녀는 친우들이 아카데미에서 최대한 성장하는 것을 돕고, 던전을 돌아, 그들에게 여러 유물을 지원했다.
그리고, 그 부채감을 이용해서 마지막 때에 그녀를 돕게 할 생각이었다.
거기다, 부르면 바로 달려간다는 말도 거짓말이 아니었다.
소피아는 이들의 연락을 받으면 번개같이 찾아갈 생각이었다.
당연히 소피아의 친우들도 그녀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도 소피아 덕분에 교단의 공간 이동진을 여러 번 사용했었다.
교단의 공간 이동진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권력이라니…….
그들은 제국 황태녀의 지위와 권력이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소피아는 앞으로 공간 이동진을 이용할 생각이 없었다.
앞으로는 교단의 공간 이동진은 공적인 일에 써야 할 터였다.
대신 그녀는 공간 이동진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부탁할 생각이었다.
결국, 방법은 달랐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기에 이들에게 한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소피아 님의 말을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최대한 자주 연락하겠습니다.”
여유로운 번즈 왕자의 대답에 이어, 다른 이들도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드리겠습니다.”
“저는 자리를 잡으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좀 늦어도 이해해 주십시오.”
“저는 내년에 바로 찾아뵐게요.”
다행히 귀찮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소피아는 안도했다.
2년간의 고생이 잘못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이들과 인사를 하면 떠나기 전에 더 인사할 사람은 없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카를로스 총독과 부인에게는 아침에 인사를 드렸고, 성을 나서면서 거인 기사 엔리케와도 작별 인사를 했다.
소피아는 모두에게 손을 흔들고, 마차에 올라탔다.
시녀들도 각자 마차에 올랐고, 이어서 마부가 소피아에게 물었다.
“출발할까요?”
소피아는 마부의 목소리에 피식 웃었다.
아는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아카데미를 나설 때마다 여러 모습으로 그녀를 따라왔던 남자.
어떨 때는 던전을 안내하는 사냥꾼으로, 다른 때는 짐꾼이나 용병으로,
시내를 구경할 때는 상점 주인으로 변해 있을 때도 있었다.
그는 아카데미로 올 때 한 말을 제대로 지키고 있었다.
그녀가 몰랐지만, 저번 삶에서도 이런 식으로 소피아를 도와주었을 게 분명했다.
어쨌거나, 이번에는 마부가 된 모양이었다.
소피아는 마부의 말에 직접 대답해 주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이번에도 부탁드려요. 목적지는 차르마니아예요.”
그녀의 말에 마부, 레스티가 기운차게 대답했다.
“차르마니아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움직이던 마차들이 길옆으로 붙었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고개를 숙였다.
황실 마차는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아카데미를 빠져나갔다.
아카데미를 왔을 때와 달리, 소피아는 다른 곳을 들르지 않고, 바로 제국 수도로 달려갔다.
마음 같아서는 공간 이동으로 가고 싶었지만, 황태녀의 수도 복귀를 그런 식으로 할 수 없었다.
소피아는 공국을 지나, 제국의 영지들을 지나가는 동안, 주변의 분위기를 살폈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영지들은 그녀가 제국을 떠난 2년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제국은 지금도 평화로웠고,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소피아는 의아했다.
분명 황제와 어머니에게 마왕이 나타난다고 말해놓았었는데, 이렇게 달라진 게 없다니.
아버지도 뭔가 생각이 있으시겠지만, 소피아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이번에는 걱정하지는 않았다.
저번 삶에서 봤듯이 아버지가 하는 일은 전부 이유가 있었으니까.
소피아는 빨리 가서 아버지께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마차는 질풍처럼 달려, 차르마니아에 도착했다.
“소피아 황태녀님이 돌아오셨습니다!”
황실 마차가 보이자, 도시의 외성문을 지키던 기사가 마나를 담아 외쳤고,
성문 위에 설치되어 있는 종이 힘차게 움직였다.
멀리 퍼지는 종소리.
황태녀의 복귀를 알리는 종소리였다.
마차들이 옆으로 비켜서서 멈추었고, 상점과 집에서 사람들이 쏟아져나와 길옆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모두 황태녀의 복귀를 환영하는 사람들이었다.
2년 만에 보게 되었지만, 이렇게 자신을 반기는 사람들을 보고, 소피아는 기뻐하는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저번 삶에서 지키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소피아는 기쁜 얼굴로 자신을 반기는 사람들을 보고, 다시 다짐했다.
이번 삶에서는 아버지를 지키고, 가족을 지키고, 이들을 지키기로.
소피아를 태운 황실 마차는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황궁 앞에 도착했다.
황궁 앞에는 소식을 들었는지 황실 집사장과 궁내부원들과 시녀들이 나와 있었다.
이들은 소피아가 마차에서 내리자, 모두 기쁘게 소피아를 맞아주었다.
훌쩍 자란 소피아의 모습에 기뻐하고, 더 아름다워진 소녀의 모습을 놀라워했다.
모두의 환영을 받은 소피아는 고개를 돌려 마부에게 물었다.
“같이 가시는 게 어때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같이 온 이들도, 기다리던 사람들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동안 황제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벌인 일 중에 평범한 일들이 없었다.
황태녀도 다를 바가 없었으니, 다른 이들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일 뿐이었다.
짓궂은 황태녀의 말에 마부 레스티는 급하게 두 손을 내저었다.
“제가 감히 같이 가다니요. 저는 마차를 주차해놓아야 해서……. 말씀만이라도 감사드립니다.”
레스티는 사람들이 다 내린 것을 확인한 뒤에 바로 마차를 몰아 성문을 벗어났다.
황태녀는 냉큼 내빼는 레스티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은 마부 역할을 하고 있으니, 그녀와 같이 성에 들어가는 것은 힘들 터였다.
하지만, 레스티도 아버지께 보고할 일들이 있을 터인데 저렇게 도망치듯 성을 벗어나다니…….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었지만, 소피아는 바로 머리에서 털어버리고, 성안으로 향했다.
아카데미에서 돌아왔으니, 아버지께 복귀를 알려야 했다.
아버지를 본 지도 2년이나 지나버렸다.
매번 보고 싶었지만, 소피아는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열심히 참았었다.
이제는 그동안의 보상을 받을 시간이었다.
소피아는 황궁의 복도를 가로질러, 아버지의 집무실로 향했다.
황궁은 이상하게 어수선했지만, 서둘러 집무실로 향하던 소피아는 그런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다.
빠르게 걸어서 도착한 집무실은 전과 다르지 않았다.
집무실을 지키던 기사도 소피아가 아는 기사였고.
기사는 소피아를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지만, 곧이어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폐하는 안에 계시죠? 제가 돌아왔다고 전해주세요.”
소피아의 말에 기사는 난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황태녀님이 오셨습니다!”
기사의 말이 끝나자, 문 안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소피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2년 만에 들었지만, 이 한숨 소리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집무실에서 다른 사람이 한숨을 내쉬다니.
아버지가 황제치고는 사람을 편하게 대하는 편이라고 하지만, 저렇게 드러내놓고 한숨을 쉬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곳이었다면 <마나 감응력>으로 안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겠지만, 황제가 놓아둔 유물 덕분에 그녀의 능력으로도 안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기사는 문을 열어주었다.
소피아는 의아한 얼굴로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집무실에는 한 사람밖에 없었다.
제일 안쪽, 황제의 책상에 앉아 있는 한 사람.
하지만, 그는 황제가 아니었다.
소피아는 황제의 책상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도 소피아를 보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소피아가 놀란 것 이상으로 좌절한 얼굴.
그 얼굴에는 피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정말 당장이라도 퇴직하고 싶어……. 황제 폐하 대리에다가, 소피아 황녀님을 맞이하는 일까지 하게 될 줄이야.”
황제의 책상에 앉아 있는 남자는 제국의 일등 서기관이었다.
황제의 아카데미 선배이자, 황제가 점찍은 차기 재상감으로 유명한 남자.
벤자민 서기관이 소피아 황태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