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2화
제2편 외전 소피아 (8)
시간이 흘러, 소피아 황태녀가 카를로스 아카데미에 들어온 지도 2년이 지났다.
어린 황녀의 아카데미 행으로 흥분했던 사람들은 아카데미에 다니는 그녀의 모습에 익숙해졌고,
소피아 황태녀도 남들보다 힘든 아카데미 수업에 충분히 적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이 익숙해졌다고 사람들의 관심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신제국의 황태녀였고, 아카데미에 들어온 뒤 2년간 한 번도 1위를 놓치지 않은 성적 우수자였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 성적은 그녀가 황태녀이기 때문에 얻은 성적이 아니었다.
사실 행정학부 쪽은 황제나 제국의 입김이 충분히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아카데미를 한 번 경험했던 소피아였다.
더구나, 저번 삶에서 황제를 돕고자 다년간 제국 정부에서 일도 했었고, 마지막에는 황제 대신에 제국을 움직여 마왕과 싸우기도 했다.
그런 소피아에게 아카데미 행정학부는 너무 쉬운 곳이었다.
다만 과제가 너무 많았을 뿐.
또 하나, 기사학부는 그녀의 첫 실전 수업 뒤로 뒷말이 전부 사라지게 되었다.
사실, 봉인지에서 펼쳐진 첫 실전 수업에서 소피아는 그녀가 가진 두 가지 능력을 모두 보여주었다.
<마나 감응력>과 <영역 선포>.
소피아는 세상에 몇 없다는 다중 능력자에다가, 그 다중 능력은 아버지인 황제와 어머니인 황비의 주력 능력이었다.
과거 카를로스의 왕이 되기 위한 능력이라는 <마나 감응력>과 제국 초기, 발레아 황비가 불순분자를 처리하기 위해 제국 수도 전체를 능력으로 통제했다던 <영역 선포>.
<영역 선포>는 봉인지 실전 수업에서 소피아가 처음으로 펼친 것을 보고, 상속 능력 학부의 교수들이 최고의 학생을 놓쳤다고 한탄을 했다는 소문이 퍼졌을 정도였다.
주변의 동료들은 물론,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의 능력을 올려주었고, 마물들의 첫 진격을 모두 봉쇄했던 그녀의 능력에 교수들은 물론, 학생들도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그 수업에서 사람들이 진정 놀랐던 것은 그녀의 능력이 아니라,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펼친 그녀의 검술이었다.
황제인 아버지의 검술과 꼭 닮은 검술.
초대 카를로스 왕의 검술을 현 황제가 복구하고 완성한 그 검술을 어린 그녀가 그대로 펼친 것이었다.
아직은 미숙하고, 황제가 보여 주었던 이적 같은 힘은 없었지만, 그녀가 펼친 것은 제대로 된 황제의 검술이었다.
아카데미 지하 수련실 가운데 제일 크고 튼튼한 수련실.
지난 2년간 소피아가 거의 전용하는 중인 수련실 안에서 두 사람이 대련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아카데미에 입학한 지 2년이 지난 12살의 소피아였다.
그동안 열심히 마나를 키우고 운동한 덕분인지, 지금은 2년 전과 달리 어린아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본 나이보다 일이 년은 더 나이 든 것처럼 보이는 조금은 어린 소녀 같달까.
하지만, 소피아는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하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싸움, 아니, 대련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번개같이 휘두른, 검은 거대한 기둥 같은 검이 바로 튕겨 나왔다.
이어서, 거대한 검만큼이나 큰 팔이 검을 휘둘렀다.
부우우우웅.
거대한 크기에 맞지 않는 엄청난 움직임.
질겁한 소피아가 정신없이 수련검을 기울여 대검을 흘려보냈다.
끼기기기긱.
최선의 각도와 있는 마나를 모두 움직여 검을 흘려보내는 데 성공했지만, 소피아는 그 순간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대련일 뿐인데, 이런 느낌이라니, 실전이라면 이렇게 흘려보내는 게 불가능할 터였다.
이어진 공격도 마찬가지였다.
소피아의 공격은 앞에선 거인의 방어를 뚫지 못했고, 소피아는 거인의 공격을 막는 것에 급급할 뿐이었다.
2년간 그토록 열심히 훈련을 해왔는데, 앞에 선 상대를 이길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소피아는 더욱 검을 휘둘렀지만, 결국, 먼저 지친 것은 소피아였다.
소피아가 지쳐 주저앉자 거인은 검을 거뒀고, 대련이 끝나게 되었다.
대련이 끝나자, 앞에 선 거인이 그녀를 칭찬했다.
“처음 봤을 때도 나이에 맞지 않는 실력이라 놀랐었는데, 성장하는 속도는 더 믿기 어려울 정도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거인의 말에 소피아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봤자, 제대로 공격도 못 한걸요.”
그녀의 말에 거인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
“검술만 써놓고, 그런 소리냐?”
“여기서는 <영역 선포>를 못하잖아요.”
“그걸 하면 달라지고?”
“이렇게 쉽게 나가떨어지지는 않겠죠.”
소피아의 표정을 보고, 거인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제대로 붙으면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네 아버지도 아카데미에 다닐 때는 나를 못 이겼어. 그런데 이제 12살인 네가 나랑 맞먹을 생각이냐?”
거인, 엔리케 전 왕실 기사단장은 황제의 딸을 향해 짐짓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그의 검과 달리, 우락부락한 그의 얼굴은 소피아에게 소용이 없었다.
“거짓말 마세요. 그때도 아버지가 이기셨을 거예요. 그래서 저도 졸업하기 전에 단장님을 이겨야 해요.”
“아니. 내가 왜 거짓말을 한단…….”
황당한 얼굴로 소피아에게 말하던 엔리케는 결국 고개를 젓고 말았다.
“그래, 내가 너한테 뭘 말하겠냐. 알렉스 이야기를 한 내가 잘못이지.”
한숨을 쉬는 엔리케를 보고, 소피아는 입을 다시 삐죽 내밀었다.
아무래도 괜히 자신의 본성을 알게 한 모양이었다.
매번 이렇게 놀리다니.
대련에서 이길 수 없으니, 소피아는 그가 놀리는 것을 막기도 어려웠다.
그는 아버지와 친한 지인이자, 큰어머니의 기사단장이시기도 했지만, 그녀는 엔리케에게도 언제나처럼 가면을 쓰고 상대하려 했었다.
하지만, 몇 주도 되지 않아 그녀가 쓰던 가면이 박살 나고 말았다.
엔리케가 눈치가 좋거나, 비범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그와의 대련이 미친 듯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제국과의 합병으로 기사단장직을 내려놓고, 은퇴한 그를 대련 상대로 청한 것은 소피아였다.
그녀에게는 젊었을 때의 아버지를 상대할 수 있는 수련 검이 있었지만, 계속 한 사람과 싸울 수는 없었다.
거기다, 마물과 싸우는 것은 사람과 싸우는 것과 다른 점이 많았고.
결국, 소피아는 싸워볼 다른 사람이 필요했다.
물론, 아카데미에는 기사를 지망하는 학생이 많았고, 동료 중에는 천재기사로 이름 높은 이도 있었지만, 소피아가 볼 때는 모두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아버지는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이자, 검술가였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그런 검술을 보아왔고, 지금도 매일같이 젊은 아버지와 대련하고 있었기에, 아직 어린 기사 지망생들은 눈에 차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소피아는 결국,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도움을 청했고, 두 사람은 은퇴해서 유유자적하게 사는 전 왕실 기사단장을 그녀의 대련 상대로 붙여 준 것이었다.
소피아는 언제나처럼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소녀의 가면을 쓰고, 거인을 맞이했었다.
아쉽게도 전 기사단장은 그런 소피아의 모습을 시큰둥하게 바라보았고, 훈련도 가차 없이 진행했다.
물론, 그건 소피아도 바란 것이었지만, 거인 기사단장과의 대련은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그녀가 썼던 가면이 박살 날 정도로.
결국, 대련 몇 번 만에 그녀의 본성이 전부 들통나 버렸다.
그녀의 어머니인 발레아 황비라면 가능하실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표정을 감추고, 거짓을 연기하면서 그와 제대로 싸울 수 없었다.
어이없던 점은 저 거인 기사단장은 가면을 쓰고 상대했던 소피아보다, 가식 없는 지금의 소피아를 더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그녀가 아카데미에서 사귄 친우들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던 본성이었는데.
소피아는 그 덕분에 편해지긴 했다.
학장실 말고도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 생겼으니까.
문제는 지금처럼 저 거인에게서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된 것이었다.
딸이 아버지를 존경하는 게 뭐가 문제라고, 자신에게 저런 엉뚱한 소리를 하다니.
그래도, 아버지에 대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게 아닌 이상 화를 낼 생각은 없었다.
지금은 그녀에게 큰 도움을 주는 사람이었으니까.
소피아가 주저앉아 숨을 가다듬자, 전 기사단장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번 겨울 방학 때는 어떻게 할 거냐. 전처럼 던전 탐사를 떠날 거냐?”
2학기 기말고사도 끝났고, 이제 곧 겨울 방학이었다.
그리고, 소피아는 아카데미 2년 동안, 틈만 나면 던전을 찾아 돌아다녔다.
파견 수업 때도, 방학 때도 그녀는 여러 가지 이유를 만들어 친우들과 함께 던전을 탐사했다.
소피아 황태녀의 던전 탐사는 2년간 무척이나 유명해져 있었다.
어린 학생들답지 않게, 짧은 기간 동안 많은 던전을 찾아냈기 때문이었다.
다들 놀라워했지만, 소피아로서는 어려울 게 없는 일이었다.
우선 대륙 곳곳에 흩어져 있어 찾아가기 어렵다는 점은 교단의 공간 이동진을 써서 해결했다.
교단이 중요시하는 공간 이동진이었지만, 소피아에게는 항상 열려있는 곳이었다.
그녀가 황태녀이기도 했지만, 대주교에게는 그녀가 셀린의 성기사인 황제 딸이라는 게 더 큰 이유였다.
어쨌거나, 아버지와 달리, 그녀는 거리와 상관없이 던전을 찾아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남들이 몰랐던 던전 위치는 저번 삶에 그녀의 아버지에게 들었었다.
마왕을 저지하기 위해 봉인지로 떠나는 날, 황제는 그녀에게 평생 찾아온 던전 위치가 적힌 문서를 건네주었다.
능력을 써서, 권력을 써서, 찾은 던전들.
황제는 던전 탐사라는 젊었을 때 꿈을 위해 찾아 놓은 것이라고 했지만, 소피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마왕과 싸우러 떠나면서 딸에게 던전 위치가 적힌 문서를 건네준다니.
마왕이 코앞에 왔는데 던전을 언제 찾으라는 건지.
아니면, 죽으러 가면서 유산을 남겨놓으려는 것인지.
아버지를 사랑하는 소피아로서도 그 당시에는 아버지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소피아는 다시 살아난 뒤에 아버지의 뜻을 알게 되었다.
황제는 소피아가 과거로 돌아간 뒤에 던전을 찾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의심했던 자신을 꾸짖고, 소피아는 아카데미를 다니는 동안 열심히 던전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그 던전 탐사는 소피아의 대련 상대인 전 기사단장까지 휘말리게 했다.
제국의 황태녀가 던전을 찾아다닌다는데, 가족들이 그냥 보내줄 리가 없었다.
그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전 기사단에게 소피아의 호위를 맡겼던 것이다.
엔리케가 지금 물어본 것도 그런 이유였다.
엔리케는 몇 번이나 구시렁거렸지만, 던전 탐사를 거절하지 않았다.
어린 황녀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늦은 나이에 모험다운 모험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탐사 때마다 소피아를 도와주던, 경매장을 운영하는 용병과도 친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소피아는 엔리케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던전 탐사는 더 안 할 생각이에요.”
엔리케는 소피아의 말에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그래? 그럼 여행이라도 가려고?”
“아뇨. 집에 돌아갈 거예요.”
엔리케는 의아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
“제국 수도로 간다는 거냐? 그동안 한 번도 안 갔다고 들었는데?”
아카데미에 있던 2년 동안 그녀는 한 번도 황궁으로 돌아가지 않았었다.
솔직히 매번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녀의 기억이, 밤마다 꾸는 꿈이, 그녀를 집으로 가지 못하게 했다.
소피아는 아카데미에 온 이상, 제대로 준비해서 돌아갈 생각이었다.
잠시 의아해하던 엔리케가 머릿속으로 날짜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제 2학년이 끝나는 거지? 3학년 때는 실습 위주라 수업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그럼 아예 돌아가는 건가?”
“그렇게 될 거예요.”
기사가 되거나 취업이 된 3학년생들은 더 이상 아카데미에 나오지 않았다.
수백 년간 내려온 전통이었고, 그녀의 친우들도 내년 초반에 다들 아카데미를 떠날 계획들이었다.
다만, 그녀는 벌써 떠날 생각이 없었다.
눈앞에 있는 거인과의 싸움도 끝나지 않았고, 아직 아버지가 주신 던전들도 다 돌지 않았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제국에서 들려오는 소문 때문에 여기서 더 있지를 못하게 되었다.
황제가 일을 주변에 맡기고 수시로 잠적한다는 소문.
그녀의 귀에까지 들려올 정도였으니, 분명 단순한 소문이 아니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아버지에게 일이 생겼다는데 안 가볼 수가 없었다.
소피아는 방학이 되는 순간, 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