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0화
제25편 외전 소피아 (6)
황제와 여왕의 결혼으로 카를로스 왕국과 차르 제국이 합병되었지만, 두 나라가 바로 하나가 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황제는 믿을 만한 사람에게 총독 자리를 줘서 카를로스 왕국을 다스리게 했다.
사실, 황제가 신뢰할 만한 귀족이자 정치인, 거기다 카를로스 왕국의 귀족과 백성들에게 인정받을 만한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마차에서 내린 소피아는 왕궁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년 남자와 여성에게 달려갔다.
“어서 와요. 사랑하는 소피아 황녀님.”
소피아 황녀는 중년 여성의 품에 안겨 얼굴을 비벼댔고, 황제의 어머니이자, 소피아의 할머니인 아만다는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아만다 옆에 서 있던 그레시아 공작, 아니 그레시아 총독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손녀를 바라보았다.
같이 황녀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미소를 띤 총독의 모습에 깜짝 놀라고 있었다.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다시 한번 총독에 대한 소문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 소문은 총독이 황태녀인 손녀를 끔찍하게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잘 각성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축하한다.”
총독의 칭찬에 소피아는 총독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이 너무나도 소피아를 사랑해서였을까.
저번 삶과 달리, 정신은 어른이 된 소피아였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 앞에서는 그녀도 다시 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왕도, 미래에 대한 걱정도 모두 잊을 만한 편안함.
소피아는 할아버지의 미소와 할머니의 품에서 그런 안락함을 느꼈다.
하지만, 소피아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 할머니의 품을 빠져나왔다.
“오늘은 황제 폐하의 특사로 온 거예요. 두 분께 그렇게 봐달라고 부탁드릴게요.”
소피아는 두 부부 앞에 서서 두 손을 꼭 모으고 격식을 갖춰서 두 사람에게 부탁했다.
하지만, 10살짜리 소녀의 정중한 인사는 두 사람에게는 귀여운 손녀딸의 재롱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총독 부부는 소피아의 말을 듣고 한껏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특사님에게 우리가 실수했군요. 접견실로 모시겠습니다.”
“호호, 가실까요. 소피아 황녀님?”
총독 부부도 정중하게 소피아를 안내하기 시작했지만, 두 사람의 웃음 띤 말 덕분에 소피아가 만들어 보려던 격식은 전부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더구나, 소피아를 안내하면서 두 사람이 속삭이는 말은 소피아를 더욱 암담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황태녀라지만, 이런 작은 아이에게 벌써 이런 짐을 맡기다니. 아무래도 알렉스가 너무 한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렇지. 그건 내가 황제에게 따로 말해놓지.”
상황을 보니, 공국과 달리, 이곳에서는 공식적으로 일을 처리하기 어려워 보였다.
그녀가 가져온 일들도 카를로스 지방에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었고, 그녀를 마냥 귀여워하는 두 분이시니, 일을 처리하는 것도 전혀 어렵지 않을 테고.
결국, 이곳에서는 재롱잔치가 될 모양이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소피아의 표정은 밝았다.
그레시아 총독과 아만다 부인.
소피아의 조부모들은 제국 수도로 넘어와 사교계의 큰손이 되신 큰할머니와 달리, 저번 삶에서도 마지막까지 카를로스 왕국에 머물며 소피아를 도와주셨었다.
그녀가 실수하든,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든 간에 그녀를 믿고, 도와주시던 분들이었으니, 이번에는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도 그렇게 아쉽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두 사람이 소피아를 너무 사랑한다는 점이었다.
“참, 아카데미는 여기 황궁에서 다니는 게 어떻겠니. 왕실 마차로 다니면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소피아도 왕궁에서 지내는 게 더 편할 테니까.”
갑자기 꺼내든 두 사람의 말에 소피아는 급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오래 걸리지 않는다니!
막히지 않는다고 해도 왕궁부터 수도의 남문 밖에 있는 아카데미까지는 마차로 한 시간 이상 달려야 하는 거리였다.
거기다, 왕실 마차로 이동하려면 매일 같이 거리의 통행을 막게 될 텐데, 사람들에게 그런 고생을 하게 할 수는 없었다.
소피아의 강력한 반대에 황태녀가 카를로스 왕궁에서 지내는 것은 입학식 전까지 만으로 정해졌다.
그 뒤에 황궁에서 한 회의는 소피아의 예상대로 반 재롱잔치로 끝나고 말았다.
소피아의 이야기를 총독이 전부 승낙해 버리니, 그녀의 실력을 보여 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피아의 어른스러운 행동에 놀란 신료들도 많이 있었지만, 단지 그 정도일 뿐이었다.
오히려 소피아가 나이를 잊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개학식까지 즐겁게 지냈다.
시간이 지나 개학식 날이 되었다.
소피아는 황실 마차를 타고, 제국에서 같이 온 왕실 기사단과 총독의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아카데미로 향했다.
황태녀의 행차에 놀란 사람들은 길옆으로 물러나 고개를 숙이거나, 땅에 엎드렸고, 황태녀의 행렬은 빠른 속도로 남문을 빠져나와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긴 담장으로 이어진 아카데미 정문에는 많은 사람과 마차들이 차례로 입구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등장한 제국 황실 마차는 모두를 놀라게 했다.
“마차를 호위한 기사가 도대체 몇 명이야. 아카데미에서 저런 인원이 호위할 수 있는 건가?”
“맙소사, 문장을 봐! 신제국 황실 문장이야!”
“올해 황가에서 아카데미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어?”
“황태녀님도 10살밖에 안 되었을 텐데?”
“아니면, 황실 분들께서 입학식 참관을 오셨나?”
“도대체 누구야!”
누구인지 몰랐지만, 어쨌거나 황실 인사의 행차였다.
길을 막고 있던 마차들은 급하게 길 양옆으로 마차를 옮겼고, 길을 걷던 사람들도, 놀라 고개를 숙였다.
소피아의 아카데미행이 결정된 것은 몇 주 전이었다.
소피아의 각성식 뒤에 황제가 급하게 정한 것이었고, 결정된 뒤에 바로 소피아가 출발했으니, 이곳까지 소문이 퍼지기는 시간이 부족했다.
아카데미 관계자들과 소식이 빠른 고위 귀족들은 알고 있었지만, 평범한 귀족들과 평민들은 아직 소피아가 아카데미에 입학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제국 황실 마차가 아카데미 정문을 통과했다.
소피아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카데미 건물들을 배경으로 길가에 세워진 마차들과 황실 마차를 향해 고개를 숙인 사람들.
소피아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조금은 아쉬워했다.
저번 삶에서는 저들과 같이 걸어서 아카데미에 입학했었는데…….
소피아는 저번 삶 때에는 자신이 황태녀라는 것을 알리지 않았었다.
경호는 확실히 했지만, 제국의 작은 지방 영주의 딸인 것처럼 정체를 숨긴 채 아카데미에 입학했던 것이다.
다들 반대했었지만, 딸의 즐거운 아카데미 생활을 위해 황제가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물론,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전에 정체가 들통나기는 했지만, 그전까지는 평범한 아카데미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는데…….
그때를 떠올리니, 다시금 아버지께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이번 삶에는 즐거운 아카데미 생활이 아닌, 황태녀로서의 아카데미 생활을 해야 했다.
앞으로 아카데미에서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소피아는 다시 다짐하고 창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거뒀다.
그날 입학식장에 나타난 어린 황태녀는 모두를 놀라게 했다.
황태녀가 입학하는 것을 몰랐던 사람은 황태녀의 등장에 놀랐고, 입학한다는 것을 알았던 사람들도, 생각보다 어린 황태녀의 모습과 생각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놀라고 말았다.
그녀는 입학식 내내, 정자세로 앞자리에 앉아 있었고, 입학식 대표로 앞에 나가서 또렷한 목소리로 선서했다.
입학식이 끝난 뒤에도 그녀는 입학식에 온 귀족들과 다가오는 학생들 모두에게 미소를 띤 얼굴로 인사했다.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지만, 그녀는 조금도 힘든 표정을 짓지 않고, 모두에게 인사했고, 결국, 그녀는 거의 맨 마지막으로 입학식장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렇게 진이 빠지는 인사를 끝낸 뒤에는 아카데미 학장의 호출로 학장실을 가게 되었다.
그녀는 학장실에 들어간 뒤에 소파 위에 누워버렸다.
“너무 힘들어요.”
소피아가 소파에 누워 칭얼대는 것을 보고, 학장은 혀를 차며 찻잔에 차를 내렸다.
“대충 끝내고 오지 그랬니.”
“황태녀로 왔는데, 그럴 수 없었어요.”
학장은 누워버린 소피아 앞에 찻잔을 올려놓고, 그녀 앞에 앉아 소피아를 바라보았다.
“많이 변했다더니, 정말 변했구나. 네 아빠도 그러더니……. 이것도 집안 내력이려나.”
소피아는 고개를 들어 아카데미 학장인 카트리네를 쳐다보았다.
귀족의 딸이자, 아이샤 여왕의 이모, 거기다 스스로 작위까지 받은 귀족이었지만, 항상 용병처럼 자유로운 소피아의 이모할머니.
그런 카트린이라서 그런지, 소피아는 어렸을 때부터 저번 삶의 마지막까지, 카트린 앞에서는 모든 예의와 가식을 풀고,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나이답지 않게, 아니, 따지고 보면 그렇게 나이를 먹은 것도 아닌가?
아무튼 아직도 젊고 아름다운 이모할머니를 향해 소피아가 물었다.
“카트린 이모는 왜 결혼을 안 하세요?”
저번 삶에서도 그녀가 결혼을 피하는데, 카트린 도움을 많이 받긴 했지만, 항상 궁금했던 문제였다.
죽을 때까지 카트린에게 이유를 듣지 못했었고.
뜬금없이 생각나서 묻긴 했지만, 솔직히 이유를 들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소피아의 어린 모습 덕분일까?
카트린은 풀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애가 확 바뀌었잖아.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고.”
그녀는 눈을 들어 벽을 바라보았다. 마치 과거를 회상하는 것 같은 얼굴.
다만 그녀의 입에서는 특별한 말은 나오지 않았다.
“쓸 만한 남자가 없어서 그랬지. 마음에 드는 남자는 놓쳐버렸고, 결혼 때도 지나버렸으니까…….”
별다른 바 없는 말이었지만, 소피아는 카트린의 표정과 말에서 한 사람을 떠올릴 수 있었다.
용병인 카트린과 같이 모험을 했던 남자. 이미 결혼했고, 카트린과 나이 차이가 나는 남자.
소피아는 그런 남자를 한 명 알고 있었다.
“설마, 아버지를 좋아하셨나요?”
“말도 안 되는 소릴!”
소피아의 말에 카트린은 버럭 소리쳤다.
하지만, 화를 내는 카트린의 모습을 보고 소피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카트린도 아버지를 좋아했었다고.
하지만, 그래봤자,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어머니의 진짜 성격을 잘 아는 카트린 이모할머니가 그 사실을 말할 리도 없고.
소피아는 단지 오랫동안의 의문이 풀린 것에 만족할 뿐이었다.
그런 소피아의 모습에 카트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곤란한 아이가 되어버렸구나. 그보다 아이샤도 그렇고, 너희 집안은 전부 10살에 아카데미에 들어올 생각인 거니?”
10살에 아카데미에 들어온 것은 소피아가 처음이 아니었다.
예전에 아이샤 황후가 10살에 아카데미에 들어왔었다.
소피아가 부모님께 들었던 아버지와 어머님들의 파란만장했던 아카데미 생활.
그때 아이샤 황후의 입학 나이가 10살이었다.
“저만이에요. 동생들은 늦게 올 거예요.”
소피아는 동생들은 늦게 보낼 생각이었다.
동생들은 마왕을 없애고, 평화로운 세상에서 공부할 수 있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것보다, 널 부른 건 학부 결정 때문인데…….”
“기사학부로 갈 거예요.”
“넌 다중 각성 아니니? 거기다, 능력 하나는 발레아 황비님의 <영역 선포>라면서. 그럼 상속 능력 학부가 좋을 텐데.”
카트린의 말대로였다.
저번 삶에서 그녀는 <영역 선포>를 주력을 키웠고, <영역 선포>는 그녀에게 큰 도움이 되었었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서 마지막까지 제국 수도를 지켰던 것도 그녀의 <영역 선포>였다.
하지만, <영역 선포>는 더 이상 배우고 훈련할 게 없었다.
이제는 다른 것을 배울 차례였다.
그녀의 말을 들은 카트린이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곤란한데. 네 아버지한테 따로 공문이 왔거든.”
“네?”
놀란 소피아가 몸을 일으켰다.
“뭘 배우고 싶어 하든 간에 행정학부는 이수하라고 하더라고.”
“네?”
“옆에서 도울 생각이라면 행정학부는 졸업하라고 연락이 왔어.”
소피아는 카트린의 말에 멍한 얼굴이 되었다.
황제의 말은 분명 이해가 되는 말이긴 했지만…….
“……설마 중복 수강이 가능한가요?”
“……글쎄 되려나?”
소피아의 물음에 카트린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소피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카데미를 즐겁게 보낼 생각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생각보다 더 힘들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