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9화
제24편 외전 소피아 (5)
황제의 실용주의 덕분에 인원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신제국 황태녀의 아카데미행 인원은 적지 않았다.
호위하는 수십 명의 황실 기사와 병사들. 십여 대의 마차, 열 명이 넘는 시녀들까지.
원만한 영주의 이동보다 훨씬 큰 규모의 행렬이었다.
하지만, 대제국 황태녀의 행렬이니,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그 행렬은 빠른 속도로 제국 남부를 관통해서 구 왕국 카를로스와 경계에 있는 공국에 도착했다.
과거, 제국과 카를로스 왕국의 무역을 독점해서 번성했던 공국.
지금은 두 나라 무역의 중간 지대가 아니라, 제국 남부의 거대 상권의 중심지로서 과거보다 더 큰 부흥을 이루고 있었다.
곳곳이 무너져서 보강했던 제국과의 성벽은 이제 관광지로 보일 정도로 정리되어 있었고,
검문소를 세워 철저하게 검문했던 제국과의 통로들은 검문소들이 치워져서 자유롭게 지나다닐 수 있는 대로가 되었다.
전부터 유명했던 공국 중심도시의 시장은 이제 거대한 상업지대로 변해서 수많은 사람과 마차로 북적이고 있었다.
황태녀는 그 북적이는 시장을 피해 공국의 왕궁에 도착했다.
“여기 시장이 그렇게 볼 게 많다던데……. 소피아 님은 보고 싶지 않으세요?”
마차에서 내리기 직전까지 소피아의 직속 시녀인 사마라는 계속 소피아에게 칭얼댔다.
시녀장 플로라와 수도 방위 사령관 후안의 딸인 사마라는 어렸을 때부터 소피아의 시녀 겸 친구로 같이 지내왔었다.
황제가 어렸을 때부터 플로라가 그를 수발하고, 후안이 황제를 지켜온 것처럼 황제는 두 사람의 자식이 소피아를 보필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소피아도 그녀를 좋아했고, 무척이나 친했었지만, 아쉽게도 각성식 이후 소피아는 그녀가 조금은 귀찮아졌다.
몸은 10살이었지만, 정신은 20대 중반이었기에 사마라와 지내는 것은 친구 겸 시녀의 수발을 받는 게 아니라, 애를 보는 기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저번 삶에서 마지막까지 그녀의 옆을 지킨 친우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소피아는 저번 삶에서 보았던 사마라의 헌신을 보상하는 기분으로 어린 사마라의 말을 막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들어준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공국의 수도는 저번 삶에서 충분히 구경했었다.
더구나 이번에는 몇 년 빠르게 와보게 된 것이니, 새롭게 볼 만한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소피아는 사마라의 말에 고개를 젓고는 마차 밖으로 내려섰다.
“어서 와요.”
내려선 그녀를 반갑게 맞이한 사람은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었다.
“어, 둘째 어머님이 먼저 와 계셨네요?”
그녀 앞에는 떠날 때 황궁에서 보았던 프리다 황비가 서 있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프리다를 보던 소피아는 문득 아버지 황제의 능력이 떠올랐다.
“아……. 설마.”
소피아의 표정을 보고, 프리다가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소피아가 여행을 가는 걸 보고, 알렉스 님이 신경 써 주셨어요.”
소피아가 열심히 마차로 이동하는 사이, 프리다 황비는 알렉스 황제의 능력으로 공국의 왕궁으로 공간 이동된 것이다.
황비의 말에 소피아는 뚱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저도 그렇게 이동시켜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각성식 이후에는 보여 주지 않았던 표정이었지만, 프리다 황비는 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그건 알렉스 님이 소유한 이들만 가능한 거예요.”
프리다 황비의 말대로였다.
황제의 공간 이동 능력은 사실 공간 이동 능력이라고 보기에는 제한이 심한 능력이었다.
원래는 장비 소환 능력이 발전해서 공간 이동 능력처럼 변해 버린 능력.
공간 이동진 없이 어디서건 사람까지 이동시킬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이었지만,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공간 이동이 가능한 것은 황제 당사자와 그의 소유물뿐이었고, 공간 이동이 가능한 장소도 그의 소유물이 있는 장소밖에 없었다.
그의 소유인 유물들과 그의 소유라고 인식된 이들에게만 가능한 능력.
당연히 딸인 소피아는 황제의 능력으로 이동할 수 없었다.
‘그래서 원하는 건데…….’
편한 공간 이동보다, 황제의 소유물이라는 점이 더 중요했던 소피아였다.
하지만, 한 번 삶을 살아 보았던 소피아로서는 그런 말을 소리 내 말할 수는 없었다.
저번 삶에서도 20대 중반까지 결혼을 안 해서 주위 사람들이 얼마나 걱정했었는지.
그렇지만, 소피아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아버지를 발끝만큼이나 쫓아가는 사람을 한 명도 보지를 못했는데, 누구랑 결혼한단 말인가.
소피아는 둘째어머니를 부러운 얼굴로 바라보았고, 프리다 황비는 소피아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사람들을 세워두었네. 공국왕께 안내하마.”
어리둥절한 얼굴로 소피아를 보던 황비는 정신을 차리고 소피아를 안내했다.
다른 일행은 공국의 집사들이 나서서 쉴 곳으로 안내했고, 황실 기사들은 공국 기사들의 안내에 기사단 숙소로 향했다.
공국과 제국의 기사들이었지만, 기사들은 서로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새 황제가 황위에 오른 뒤, 전 카를로스 왕국과 제국, 공국의 기사들의 인력 교류가 무척이나 활성화되었기 때문이었다.
황제와 황비들이 전부 세 나라의 수장들이었고, 황제가 적극적으로 기사단의 교류를 장려하니, 친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세 왕국의 왕실 기사단이 같은 왕국의 기사단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모두 짐을 풀고 숙소로 향하는 동안 소피아는 프리다 황비의 안내를 따라 접견실로 향했다.
황비는 복도를 걷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소피아를 쳐다보았다.
“괜찮겠니? 도대체 알렉스 님은 무슨 생각이신지…….”
소피아는 황비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고, 왜 황비가 공국으로 먼저 온 것인지 알게 되었다.
프리다 황비는 자신이 처가에 놀러 온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 소피아가 걱정되어서 먼저 온 것이었다.
소피아는 걱정하는 프리다 황비의 얼굴을 보고 가슴이 따뜻해졌다.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었다. 친딸도 아니면서 이렇게 진심으로 걱정해 주시다니.
조금이라도 아버지와 가깝게 지내면 진심으로 질투하는 친어머니에 비하면 다른 두 어머니는 분명 천사였다.
이런 천사분들을 지키려면, 자신을 쉴 수 없었다.
“괜찮아요. 그리고, 이건 제가 아버지께 부탁드린 거예요.”
소피아는 몸은 어린아이지만, 정신은 어른이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정치를 경험한 황태녀였고, 마왕이 나타난 뒤에 필사적으로 마왕을 막아 냈던 제국의 지도자였다.
결국, 실패했지만.
그런 소피아였기에 자신 있었다.
“신제국 황태녀 소피아 디 샤를 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접견실 앞에 도착하니, 집사가 그녀의 도착을 알렸고, 이어서 접견실 문이 활짝 열렸다.
접견실 안에는 젊은 공국왕과 공국의 신료들이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프리다 황비의 오빠이자, 얼마 전 왕위를 넘겨받은 안토니오 공국왕.
그는 어린 외조카를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와라.”
반가워하는 공국왕을 보고, 소피아는 문 앞에 서서 격식을 차려 인사했다.
“오랜만에 인사드리겠습니다. 공국왕이시어.”
공국왕은 정중한 소피아의 인사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그녀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소피아 황태녀, 방문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소피아가 고개를 들고, 공국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식적인 자리니, 그 인사가 맞긴 하겠지만……. 그래도 한 번은 편하게 불러주지 않겠니.”
이어진 공국왕의 말에 소피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소피아는 다시 한번 인사를 했다.
“……네, 이모부.”
“음. 그렇지.”
공국왕은 인사하는 소피아를 보고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소피아는 무척이나 우울해졌다.
역시, 쉽지 않았다.
어린 외모, 아니 실제로도 어린 나이였기에 상대는 자신을 귀엽게만 바라보았다.
이래서야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긴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아버지에게 졸라서 만든 자리.
아카데미 행과 함께 제국의 외교관으로서 소피아가 처음으로 나서는 공식적인 자리였다.
그녀가 가진 미래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자리이자, 미래를 대비할 첫 단추였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아버지처럼 천재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했다.
소피아는 탁자 뒤에 늘어선 공국왕과 신료들 앞으로 걸어갔다.
공국왕은 다가오는 소피아를 보고, 탁자 앞에 있는 의자에 앉게 했다.
공국왕은 딸아이의 소꿉장난을 보는 표정이었고, 공국왕의 신료들도 그녀를 귀엽게 보거나, 조금은 인상을 쓰며 보고 있었다.
소피아는 그런 시선을 전부 무시하고, 발이 닿지 않는 의자에 앉아 준비해온 서류를 펼쳤다.
“환영에 감사드립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아카데미를 가는 도중에 들려서 시간이 많지 않으니,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어……. 그래.”
갑작스러운 소피아의 말에 공국왕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우선 주요 안건으로 무관세 협정의 갱신과 기사단 교류의 확대 건을 결론 냈으면 합니다. 우선 보내드린 문건의 첫 페이지를 보시면…….”
이어진 그녀의 말에 화급히 서류를 살펴보았다.
정신없이 서류를 보기 시작한 것은 다른 신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소피아를 사람들이 귀엽게 보던 표정이 바뀌는 것은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1시간 뒤.
공국 신료들은 그들 앞에 있는 이가 어린 소녀라는 것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공국에 너무 부담이 가는 내용입니다!”
그들 앞에 있는 이는 어린 소녀가 아니라, 신제국의 무시무시한 협상꾼이었다.
“그만큼 제국도 추가로 부담을 지고 있으니, 문제 될 게 없을 텐데요.”
“하지만, 당장 여기서 결정하기에는…….”
“시작할 때 죄송하다고 미리 말씀드렸는데요. 제가 시간이 없다고. 여기서 결정을 내야 합니다.”
더구나 그녀는 제국의 황태녀였다.
“하지만, 너무 많이 달라져서, 쉽게 결정을 내리기가…….”
“아니, 공국왕께서 여기 계시는데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니요. 저는 이번 안건의 결정권을 황제께 받아왔습니다. 설마, 기존 협정도 무효화 하자는 건가요? 원한다면 그렇게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황제에게 모든 결정 권한을 받아온 권력자였다.
“이건 꼭 해내야 해요. 이모부, 제발 부탁드릴게요.”
거기다, 소피아는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활용할 줄 아는 발레아 황비의 딸이었다.
두 손을 모으고 불쌍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조카의 모습에 공국왕은 혀를 차고 말았다.
제국의 황태녀는 황제만큼이나 천재이자 괴물이었다.
제국의 황태녀는 단 하루 동안에 공국과의 협상을 끝내버렸고, 이틀 뒤에 전 카를로스 왕국으로 떠났다.
협상이 끝난 뒤, 다음날에는 소피아 황태녀는 공국의 사촌들과 즐겁게 다과를 나누고, 귀족들과 신료들에게 어린아이다운 천진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제국인들에게 사랑받는 귀엽고 천진난만한 황태녀의 모습을 왕궁과 공국 사람들은 반갑게 받아들였지만, 협상장에서 그녀를 만났던 사람들은 첫날의 모습을 잊지 못했다.
그렇게 새로운 소문이 사방으로 흘러가는 사이,
황태녀 일행은 카를로스 왕국의 수도, 기사의 성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