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8화
제23편 외전 소피아 (4)
황태녀 소피아가 각성 후에 갑자기 어른스러워졌다는 소문이 황궁 안팎으로 퍼져나갔다.
황태녀답지 않게 활달했던 소피아인지라 많은 이들이 그녀의 어른스러워진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다른 이들은 조금 걱정되는 얼굴로 달라진 소피아를 지켜보았다.
그렇게 황태녀가 어른스러워졌다는 소문 덕분인지, 각성 축제가 끝난 뒤, 바로 이어진 소피아 황태녀의 아카데미 행에 생각보다 반대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가 제국의 황태녀를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아카데미로 보낸다는 이야기에 많은 이들이 의문을 느꼈다.
그것도 황도에 있는 구 제국 아카데미가 아니라, 얼마 전에 합쳐진 전 카를로스 왕국의 아카데미로 보낸다는 이야기에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지금은 제국 소속의 아카데미였고, 황제는 물론, 황후와 황비들이 모두 나온 아카데미였으니, 황태녀가 가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던 황태녀를 10살에 아카데미로 보내다니.
황후도 10살에 아카데미에 가기는 했지만, 그렇게 품에 감싸던 소피아를 벌써 아카데미로 보낸다는 말에 몇몇 사람들은 황제에게 크게 화를 냈다.
“소피아 누님은 아직 10살밖에 안 되었습니다! 벌써 아카데미라니요! 누님은 아직 각성한 능력에 적응하지도 못했단 말입니다!”
“가지 마! 가지 마! 소피아 가지 마!”
가족끼리 모인 황제의 저녁 식사.
다른 귀족들이나, 황실 식사답지 않던 포근한 저녁 식사가 무척이나 험악해져 있었다.
몇몇 사람들, 특히 황제의 자식들이자, 소피아의 동생들이 전에 없이 황제에게 화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말은 안 했지만, 황태녀의 두 어머니, 프리다 황비와 황후마저 불만 어린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당사자인 소피아도 음식을 들지 않고, 의아한 얼굴로 황제를 보고 있었다.
오후에 들은 그녀의 아카데미 행은 소피아로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저번 삶에서 이미 한번 다녀온 아카데미였다.
분명 황제에게도, 어머니인 황비에게도 전부 말했었는데, 또 가라니.
더구나, 이렇게 빨리 가게 되면 전에 다녀온 경험마저 전부 쓸모없어질 게 분명했다.
소피아는 황제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황제는 자식들의 분노도, 황비들의 불만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식사 자리에서 소란을 부리는 아이들을 꾸짖지도, 모두에게 사과하지도 않았다.
발레아 황비는 한술 더 떴다.
그녀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로 아이들을 한 명씩 바라보았고, 아이들은 그녀가 바라보자 입을 꼭 닫았다.
“이유가 있으셔서 하신 거니, 우선 식사를 먼저 하렴.”
발레아 황비의 말에 두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식사를 시작했다.
소란이 멈추자, 황제는 소피아를 보며 말했다.
“소피아는 식사가 끝난 뒤에 집무실로 와라.”
“……네.”
황제의 말에 소피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처음 보게 된 소란스러운 식사 시간이 끝난 뒤 소피아는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소피아 황태녀님이 오셨습니다.”
황실 기사가 마나가 담긴 목소리로 작게 말을 한 뒤에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집무실 문이 열리자, 소피아는 안으로 들어섰다.
현실주의자인 현 황제 알렉스의 성향대로 전 제국 황제의 집무실을 그대로 이어받아 쓰고 있는 집무실은 화려했던 과거와 달리, 무척이나 담백하고 정갈했다.
창문과 가까운 안쪽에 서류가 가득 쌓여 있는 큰 책상이 있고, 그 앞 집무실 중앙에는 화려하지 않은 소파들과 탁자가 놓아 있었다.
그리고, 한쪽 벽에는 크지 않은 책장이 있고, 다른 쪽 벽에는 화려한 장식물 대신 두 개의 검이 걸려 있었다.
흰색 검과 검은색 검.
‘기사의 검과 수련 검이었지?’
전 카를로스 왕국의 국보인 기사의 검과 저주받은 검으로 유명한 수련 검.
그런 검들이 집무실의 벽 장식 마냥 걸려 있었다.
소피아의 눈은 두 검을 지나, 반대편 책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저 책장 아래 비밀 통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번 삶에서 아버지가 알려 준 비밀 통로. 하지만, 그녀는 그 비밀 통로를 쓸 수 없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소리를 듣고, 아버님의 나라, 이 황도를 버릴 수 없었으니까.
소피아는 책장을 눈에 담은 뒤에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황제, 알렉스는 소파에 앉아 소피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앉아라.”
황제의 말에 소피아는 그의 앞,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집무실 구석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레스티 삼촌”
“하하, 황태녀님의 눈썰미는 정말 날카로우시네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던 어두운 집무실의 구석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한 사람이 모습을 보였다.
낡은 가죽 갑옷을 입은 중년 남자.
닳디 닳은 용병으로 보이는 남자가 황태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뒤에 남자는 손가락에서 반지 하나를 빼내며 투덜거렸다.
“코앞에서도 들키지 않는다는 물건인데 이렇게 들킬 줄은 생각도 못 했네요. 황제 폐하가 미리 알려 주신 것 아닙니까?”
“헛소리 말고 이리 내놔.”
황제는 투덜거리는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니, 폐하가 항상 말하는 벼룩의 간을 내먹는 것도 아니고. 이 가난한 용병 물건을 뺏어가시다니요.”
그는 고개를 저으면서도 황제의 손에 반지를 올렸다.
황제는 반지를 받아, 황태녀 앞에 내려놓았다.
“아카데미 가는 기념 선물이다. 내기에서 내가 이겼으니, 이건 내 선물이지.”
황제에게 한껏 따지려 했던 소피아는 두 사람의 장난에 풀썩 웃고 말았다.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보았던 황궁 밖 아저씨.
그는 그녀와 동생들에게는 가끔 찾아와서 황궁 밖 이야기와 여러 선물을 주는 편한 아저씨였고, 몇몇 사람들만 아는, 황제와 가까운 상인이자, 유물 경매장의 큰손인 레스티아도였다.
하지만, 소피아는 저번 삶에서 레스티 아저씨의 다른 얼굴도 알게 되었다.
그는 민간에 퍼져나가고 있는 셀린 교단의 총주교이자, 황제의 검은 손, 제국 정보조직의 수장이었다.
그런 비밀을 안 뒤에도, 편해 보이는 두 사람을 보면 미소를 띨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남들이 모르는 진정한 아버님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일 터.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지자, 소피아는 다시 황제를 노려보았다.
가족을, 아버지를 지켜야 하는데, 한번 다녀온 아카데미에서 다시 쓸데없는 시간을 보내라니.
그녀는 이 이상한 결정을 고쳐야 했다.
하지만, 당장 이 집무실에는 황제 말고도 다른 사람이 있었기에 그녀는 말을 꺼내지 않고, 황제를 노려보기만 했다.
황제는 소피아가 노려보는 것에 개의치 않고 입을 열었다.
“3년간 레스티가 네 아카데미 행을 도울 거다. 수행원과 기사도 딸려 보내겠지만, 공식적이지 않은 일들은 전부 레스티에게 말하면 될 거다.”
황제의 말에 경매장 주인은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대부분의 일은 황태녀님을 수행하시는 분들에게 말씀하시면 될 겁니다. 저는 그 외에 귀찮은 일이 있을 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소피아는 눈썹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황제는 결정을 바꿀 생각이 없는 듯했다.
저번 삶, 소피아는 남들처럼 15살에 아카데미를 갔었다.
그때에도 황제는 레스티에게 소피아를 부탁했었다.
소피아는 레스티의 진짜 모습을 알지 못했고.
레스티를 마음씨 좋은 상인 정도로 알고 있었던 소피아는 그에게 몇 가지 자잘한 부탁만 했었었다.
여행 때 도움을 받거나, 친구의 선물을 구해주는 정도.
생각해 보면 누구보다 안전하고 편했던 그녀의 아카데미 생활은 그의 도움 때문이었겠지만.
그 당시 그녀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레스티의 다른 모습을 알고 있었고, 황제의 말도 전과 다르게 들렸다.
여러 가지 작은 도움을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공식적이지 않은 일들, 어두운 일들을 맡기라는 소리였다.
거기다, 황제는 레스티에게 저번 삶에서 안 했던 말을 더했다.
“레스티도 일이 벌어지면 소피아에게 상황을 알려 주고.”
“어……. 그럼 황태녀님도 저에 대해서 아시는 겁니까?”
놀란 레스티의 말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스티는 감탄한 얼굴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인가 보군요.”
레스티의 말에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소피아는 나보다 발레아를 더 닮았지.”
소피아는 황제의 말에 울컥했지만,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그녀도 자신이 엄마를 닮았다는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럼, 레스티는 잠깐 자리를 비켜주면 좋겠군.”
“네, 저는 오랜만에 황자, 황녀님들을 뵙도록 하겠습니다.”
레스티는 황제와 황녀에게 고개를 숙인 뒤,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나간 뒤, 이제야 집무실에는 둘만 남게 되었다.
바로 소피아가 입을 열었다.
“왜 아카데미로 보내시려는 거죠?”
각성 전과 달리, 단도직입적인 딸의 말에 황제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경험했고, 예상하고, 각오한 일이었지만, 바뀐 딸의 모습을 보니 안타깝고, 안쓰러웠다.
귀여웠던 아이가 저렇게 바뀌다니.
어른이 되면서 달라지기도 했겠지만, 저 날카로운 모습은 시련을 겪어서 변한 게 분명했다.
발레아처럼 가면을 쓰지도 못하는 모습.
소피아는 그만한 고생을 겪은 게 분명했다.
황제는 딸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황태녀인 너는 아카데미를 가야 하니까. 최대한 빨리 다녀오도록 한 거란다.”
소피아도 귀족의 대표로서 자신이 아카데미를 가는 게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을 또 가야 한다니.
마왕이 곧 나타날 거라는 것을 아는 소피아로서는 시간 낭비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이미 한 번 다녀왔어요. 저는 아카데미에서 배울 것은 다 배웠어요. ”
황태녀의 반박에 황제는 다시 물었다.
“설마, 지금 아카데미를 가게 되면 그때와 똑같은 것을 배울 생각이니?”
“그건……. 아니지만…….”
황제의 말에 소피아는 차마 그렇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저번 삶에서의 아카데미 생활은 차마 치열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황태녀로서 나름대로 처신을 잘했다고 여겨지긴 했지만, 그녀는 단지 즐겁고 평화로운 아카데미 생활을 보냈을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쉽기 그지없었다.
배우지 못한 것들과 사귀지 못한 실력 있는 사람들.
“그러면 차라리, 그 나이에 다시 가는 게…….”
그때 다시 간다면 놓친 사람들을 사귈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황제는 소피아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황제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죽는 게 아니라면……. 네 말대로 반복할 필요는 없지. 오히려 성공한 사람들을 선점하려면 최대한 빨리 만나두는 게 좋아.”
황제는 어두워진 얼굴을 되돌리며 말을 이었다.
“이미 한번 아카데미에서 만난 사람들을 다시 만날 이유도 없고. <사자 회귀> 선배로서의 조언이지.”
이번에도 소피아는 황제의 말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소피아가 계속 얼굴을 찌푸리자, 황제는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무엇보다, 네가 하루라도 빨리 나를 도우려면 교육 과정을 최대한 당겨야 해. 솔직히 나로서는 전부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만, 제국의 신료나 백성들을 이해시키려면 어쩔 수 없지.”
황제의 말에 소피아는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말대로 그녀가 어린 나이에 황제를 돕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시켜야 했다.
소피아는 그들에게 보여줄 게 필요했다.
“네. 알겠어요. 누구도 뭐라 하지 못할 성과를 가져올게요.”
수긍하는 것을 넘어 각오를 단단히 한 소피아의 표정을 보고 황제는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고 고맙다. 우리도 여기서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있으마.”
“아뇨. 제가 제대로 깨닫지 못해서 죄송해요.”
소피아는 고개를 숙인 아버지를 보고 어쩔 줄을 몰라 했지만, 황제는 정말로 딸에게 미안했다.
이리저리 핑계를 댔지만, 이렇게 빨리 소피아를 아카데미로 보낸 것은 다른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소피아를 모두에게 인정받게 하려는 이유는 자신 옆에서 일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권위가 하늘을 뚫고 있는데, 딸을 남들에게 인정받게 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를 아카데미에 보내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게 하려는 것도, 전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황제는 하루라도 빨리,
소피아를 다음 대 황제로 세울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