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6화
제21편 외전 소피아 (2)
신제국 황제 알렉스.
원래 그는 차르 제국의 귀족이나 황족이 아닌 남왕국 카를로스의 백작이었다.
그런 그에게 차르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10년 전 황위를 넘겨 주었었다.
황위를 넘겨준 제국의 황제는 몸이 쇠약했고, 의욕도 없는 황제였다.
더구나 그는 후계도 둘 수도 없었다.
심지어 황위에 오르는 내전 중에 형제들이 모두 죽어 버린 상황.
아직 제국에는 옅은 피가 남아 있는 황족이 있긴 했지만, 놀랍게도 그는 황위를 이국의 귀족에게 넘긴 것이었다.
모두 놀랐지만, 반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제국의 초대 왕 때부터 제국은 무를 숭상하는 곳.
더구나, 마왕을 대비하고 막는 것을 제국의 사명으로 삼고 있었으니, 마왕을 쓰러뜨린 용사가 새 황제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짧은 마지막 황제의 제위시기에 제국의 내로라하는 권문세가들 태반이 실종되어 버렸으니, 사람들은 반대하기도 전에 구심점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조금의 무력도 사용되지 않고, 기존의 황조가 새 황조로 넘어갔고, 새로 황제가 된 용사는 순식간에 제국을 안정화했다.
그는 남아 있는 마물들을 직접 쓸어 버리고, 새 황제의 아내, 발레아 황비는 제국 수도의 치안을 틀어잡아 버렸다.
그리고, 이어진 황제의 새 결혼식들.
카를로스 왕국과 제국 사이에 있는 공국의 대공녀가 새 황비가 되었고, 몇 년 뒤에는 카를로스 왕국의 여왕마저 새 황제의 아내가 되어버렸다.
일국의 여왕이 황제의 아내가 되었으니, 두 나라 사이의 관계를 제 정립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두 나라는 원래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제국인들은 카를로스 왕국이 새 왕을 뽑을 거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카를로스 왕국은 냅다 제국과 합병을 추진해 버렸다.
그건, 카를로스 왕국에서 새 황제, 용사 알렉스의 인기가 제국 이상으로 높았기 때문이었다.
원래부터 왕국의 모든 이들이 여왕의 부군으로 생각했던 상황.
그들로서는 제국의 새 황제가 되었다고, 마왕을 쓰러뜨린 용사를 놓아 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뒤에서 정치적인 이야기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카를로스 왕국과 차르 제국은 하나의 나라가 되었고, 하나가 된 나라는 차르 제국이 아닌 신제국으로 선포되었다.
황조가 달라지고, 나라의 모습도 달라졌으니, 과거의 이름을 유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나라는 차르 제국의 의지를 이은 나라가 아닌, 고대 제국을 다시 세운 신제국으로 명명되었다.
그렇게 마왕을 쓰러뜨리고, 신제국을 세운 황제.
소피아 황녀의 아버지는 인자한 얼굴로 딸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피아는 황제, 그녀의 아버지를 본 순간 다시금 긴장했다.
어머니와 투덕거린 덕분에 긴장이 다 날아가 버렸는데, 이렇게 다시 긴장해 버리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를 보게 되니 각성에 대해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
객관적으로 봐도 다시 없을 대영웅이었지만, 단지 딸로서 보아도 다시 없을 훌륭하고 소중한 아버지였다.
“어서 와라. 내 사랑하는 딸.”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황제는 말과 함께 안으로 들어서는 소피아를 안아 주었다.
황제로서, 아니 평범한 귀족 가주도 이런 자리에서는 할 수도, 하지도 않을 행동.
하지만, 황제는 외부의 소문과 예의에 개의치 않았고, 언제, 어디서나, 소피아 자신을, 가족을 사랑해 주었다.
이런 사랑을 받는데, 어찌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있을까.
소피아는 아버지의 품 안에서 아버지의 보탬이 되는 능력을 얻기로 다시 다짐했다.
그렇게 다짐하고 있는데 대주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식을 진행해야 하니까요. 당사자 외에는 물러나 주세요.”
황제는 안고 있던 소피아를 놓아 주고는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각성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넌 내 딸이니까.”
아버지의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피아는 얼굴을 펴고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할 필요가 없었다.
아버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었다.
황족, 아니 귀족답지 않은 황제의 모습에도 각성식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오랜 시간 황제 옆을 지키던 사람들.
이런 황제의 행동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2 황비인 프리다 황비만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쉴 뿐.
황제는 그렇게 딸의 어깨를 두들겨 준 뒤에 가족이 모인 자리로 걸어갔다.
그가 걸어간 곳은 1 황비, 발레아 황비의 옆.
황비는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소피아는 그 미소가 조금 굳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가 황비의 손을 잡아 주자 굳은 미소는 바로 풀려버렸다.
그리고, 황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렸다.
극소수 사람들만 아는 진심 어린 미소.
그 모습을 보고 소피아는 속으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소피아는 저 위험한 어머니가 날뛰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아버지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얻어야 했다.
소피아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응원하는 가족을 보고 앞으로 나섰다.
앞으로 나선 그녀의 전면에는 조아나가 서 있었다.
자애의 어머니로 불리는, 교단의 대주교.
마왕이 죽었으니, 더 이상 다른 신을 믿는 것을 탄압할 필요가 없다며 다른 종교의 탄압을 멈춘 성자.
대신 교단의 모든 힘을 사람들, 귀족이 아니라 일반인을 돕기 위해 쓰게 해서 교단은 전보다 더 사람들에게 우러름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칭송을 진심으로 싫어해서 더 존경받는 대주교.
그리고, 대주교 옆에는 사제인 고모가 서 있었다.
“원래 가문의 가주가 하는 일이지만, 황제께서 내게 부탁하셔서 하는 겁니다. 괜찮겠습니까?”
대주교 조아나가 황녀에게 물었다.
그녀의 말대로 지방의 영주들은 영주가 직접 자식의 각성을 도와주었다.
하지만, 어차피 마나를 부어 능력을 일깨우는 것일 뿐이었으니, 누가 하던 상관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신이 내려준 능력이라는 이유로 능력을 갖춘 추기경이 상주하고 있는 각국의 수도의 귀족들은 추기경들에게 부탁하는 경우도 많았다.
차르 제국의 황가는 대대로 교단의 대주교에게 각성식을 맡겼었고,
신제국의 황제도 그 뜻을 이었을 뿐이었다.
다만, 황제가 다시 없을 용사라 대주교 조아나는 그게 걱정되었다.
더구나, 자신은 제대로 된 대주교도 아니었으니.
그렇다고 황제가 시키는데 거절할 수도 없었다.
황제는 황제이기 전에 그녀가 믿는 신의 성기사였으니. 그녀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네, 아버지가 정하셨으니까요.”
소피아의 말에 대주교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기야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대주교답지 않은 투덜거림을 끝으로 조아나는 소피아 황녀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지금부터 소피아 황녀의 각성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두가 듣게 큰 소리를 말한 조아나는 이어서 소피아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선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능력을 일깨우겠습니다. 고통스러워도 참으세요.”
“네!”
황녀의 대답과 함께 대주교의 손에서 마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흘러나온 마나는 바로 황녀의 머리에 스며들었고, 황녀의 입에서 신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크윽.”
비명 같은 신음.
“참으세요. 움직이면 안 돼요.”
황녀는 양손을 쥐며 이빨을 깨물었다.
황녀의 얼굴이 벌겋게 변해갔다.
그리고, 황녀의 몸에서 마나가 확 퍼져 나왔다.
푸아아악.
바람이 이는 듯이 퍼져나오는 마나.
붉게 달아오르던 황녀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각성에 성공한 것이다.
걱정하는 얼굴로 지켜보던 사람들이 그녀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녀에게는 보이지 않으려 했지만, 다들 긴장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잘될 거라고 알고 있었지만, 사랑하는 황녀의 각성식이니 다들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너무 빨리 긴장을 푼 것일까.
편안해졌던 황녀의 표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 어?”
뭔가 어리둥절한 표정,
“아, 악, 아파.”
그리고, 황녀는 온몸을 부여잡고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 순간, 황녀는 누군가 자신을 품에 안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통증 속에서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황제, 아버지.
황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황제는 황녀를 안고, 그녀를 위로했다.
“이제 돌아온 거냐. 고생했다.”
황제의 뜬금없는 말.
하지만, 황녀는 눈이 커지더니, 소리 내 울었다.
“응, 응, 돌아왔어요. 정말 돌아왔어요. 정말 보고 싶었어요. 정말…….”
그렇게 소리 내 울던 황녀는 곧 기절하듯 잠들어버렸다.
고통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황녀가 잠들 때까지 안고 있던 황제는 두 손으로 그녀를 들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는 우고 기사단장에게 말했고,
“외부에 각성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나머지는 입단속을 시키도록.”
“알겠습니다.”
이어서 아이샤 황후에게 부탁했다.
“소피아는 긴장이 풀려 잠든 것이니, 황궁 내에도 그렇게 알려 주시시지요.”
“네.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황자에게도 부탁했고,
“이 아이는 나와 발레아가 보살필 테니, 너희들은 어머니들과 있어 주겠니?”
황자는 아이답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할게요.”
“고맙다.”
황제는 만족한 얼굴로 말한 뒤에, 두 부인에게 부탁했다.
“잠시, 뒤를 부탁하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그는 아이샤, 프리다 두 부인의 대답을 듣고, 마지막으로 전 스승인 미겔을 보며 말했다.
“미겔 경은 검호들에게 잠시 더 수도에 머물러 있으라고 말해 주십시오.”
“각성식 기념으로 검호들을 모아달라고 한 게 이것 때문이었습니까?”
검호 미겔의 말에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대비 차원이니, 좀 더 축제를 즐기는 정도면 될 터.”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미겔에게 지시를 내린 뒤, 그는 황녀를 안은 채로 발레아 황비와 함께 영웅묘를 나섰다.
지시를 받은 사람들은 바로 사방으로 흩어졌다.
황제 옆에 있으면서 이해 못 할 일이 있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지만, 언제나처럼 황제의 말을 따르는 게 먼저였다.
황제는 직접 딸을 안아, 딸의 침실로 향했다.
놀란 시녀들과 궁내부원들이 뒤를 따랐다.
잠시 뒤, 황제는 딸을 그녀의 침대 위에 누였다.
침실 안에는 침대에 누워 있는 황녀와 그녀의 부모뿐.
황제는 대기하고 있던 시녀 모두를 밖으로 내보냈다.
황제와 발레아 황비는 침대 옆에 앉아 잠든 딸을 바라보았다.
평안한 얼굴로 잠든 딸.
하지만, 그 어린 얼굴에는 각성 전에는 보이지 않던, 어딘가 모를 세월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안쓰러운 딸의 모습. 황제가 딸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밖에서 보면 이런 기분이군.”
황제의 말에 황비가 딸의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제 아셨나요? 그동안 제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황제는 딸의 손을 잡은 황비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미안, 다시 한번 사과하지.”
“제국의 황제는 그렇게 쉽게 사과하면 안 돼요.”
“난 제국의 황제이기 전에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야. 당신과 가족에게는 항상 사과할 수 있어.”
황제의 말에 황비는 만족한 얼굴로 웃었지만, 동시에 침대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요?”
황제는 고개를 돌려, 눈을 뜬 딸에게 말했다.
“너에게 사과하기 위해 기다린 거란다. 미안하다 내 사랑하는 딸아. 너에게 미리 알리지 않은 것을.”
황녀는 사과하는 황제를 보며 다시 물었다.
“정말, 아버지는 알고 있었던 거였나요? 내가 죽어도 과거로 돌아올 수 있다는 걸?”
눈을 뜬 황녀의 눈과 표정은 각성 전의 어린 소녀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소녀의 모습에 어른이 들어있는 것 같은 모습.
뭔가 어긋난 것 같은 모습에도 황제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나도, 네 어머니도 알고 있다. 원래 그 능력은 내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니까.”
황녀는 놀란 눈으로 황제를 보며 다시 물었다.
“하지만, 왜 알려 주지 않으셨나요?”
분한 듯한 목소리로 묻는 황녀.
황제는 그런 황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처음 삶은 회귀 능력에 메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였단다.”
황제의 말에 황녀의 표정이 변했다.
이해가 되는 듯한, 감사하는 듯한, 그러면서도 억울한 표정.
딸의 복잡해진 얼굴을 보며, 황제가 물었다.
“그래서, 처음 삶은 잘 즐긴 거냐?”
황제의 물음에도 황녀의 얼굴은 더욱 복잡해질 뿐이었다.
황제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질문을 바꿨다.
“말하는 것을 보면, 늙어서 죽은 것 같지는 않고, 무슨 일이 일어나서 네가 죽은 거니?”
황제의 물음에 황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대답했다.
“마왕이 나타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