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5화
제20편 외전 소피아 (1)
신제국 서력 3년.
제국의 수도, 차르마니아에서 몇 년만의 대축제가 시작되었다.
8년 전 새로운 황제 등극 때의 축제만큼이나, 3년 전 신제국 선포 때 만큼이나 대단한 축제였다.
작은 광장마다 악단이 공연을 벌였고, 대륙의 음유시인들이 몰려들고, 거리에는 끝없이 꽃가루가 쏟아졌다.
그리고, 대륙 각지에서 모여든 여행객들이 수도에 모여 축제를 즐겼다.
축제를 즐기는 이들은 모두 이 축제의 주인인 제국의 황태녀, 소피아 황녀를 축복했다.
“소피아 황녀님이 최고의 능력을 각성하시기를!”
술꾼들의 합창이 수도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그 시간, 제국의 모든 이들이 축복을 빌고 있는 소피아 황녀는 자신의 응접실에서 두근거리는 얼굴로 각성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녀가 긴장된 얼굴로 대기하고 있는 황태녀의 응접실은 무척이나 화려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실용적인 것을 좋아하는 황제였지만, 10년 동안 쌓아온 제국의 국력은 화려한 황태녀의 응접실이 낭비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긴장한 얼굴의 소피아 황녀도 응접실의 화려함 만큼이나 귀엽고 예뻤다.
아직은 어려서 그런지, 얼굴에 조금은 말괄량이 같은 모습이 남아 있었지만, 이대로만 자라준다면 제국 제일 미인으로 추앙받는 발레아 황비 같은 미인이 되기에 충분해 보였다.
이 응접실에는 각성식을 기다리는 그녀 외에도 황실의 시녀들과 황비의 시녀장인 플로라가 자리하고 있었다.
평민 출신으로 황비의 시녀장이 되어 작위까지 받은 플로라.
평민 출신이라 정통 귀족들의 자녀들인 황실 시녀들의 시샘을 받기에 충분했지만, 궁내부원 중에 그녀의 권위에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지금도 황비가 총애하는 시녀였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황제의 어린 시절 시녀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활발한 성격의 소피아 황녀도 딱딱한 다른 황실의 다른 시녀들보다, 플로라 시녀장을 더 좋아했다.
플로라는 표정이 굳어 있는 황녀 앞에 찻잔을 놓으며 말했다.
“우리 황녀님도 긴장되시는 일이 있으시네요.”
소피아 황녀는 플로라의 말에 크게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하지만 긴장될 수밖에 없잖아. 그 각성식인데.”
알아서 긴장을 풀려고 노력하는 소녀를 보며 플로라는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소피아 황녀님은 황제 폐하와 발레아 황비님의 따님이시니까요.”
“힝, 그게 더 걱정이잖아.”
제국의 황녀답지 않은 투덜거림에 뒤에 서 있던 시녀들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제국민 모두가 사랑하고, 그녀들도 사랑하는 귀엽고 똑똑한 황녀였지만, 가끔 보이는 저 예의 없는 모습은 그녀들의 속을 끓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황녀 옆에는 황비의 시녀장이 있었고, 저 위대한 황제 폐하부터 예의를 매번 무시하고 있으니, 그녀들로서는 황녀에게 차마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시녀들은 황비 전하만을 믿을 뿐이었다.
그녀들의 예상대로 플로라 시녀장은 황녀에게 주의를 주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황녀에게 황제 폐하의 어릴 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기야 폐하께서도 각성식 날에는 엄청나게 긴장하셨지요. 거기다 폐하의 상속 능력도 엄청 특이하셨으니…….”
플로라의 말에 황녀가 귀를 쫑긋 세웠다.
대신 시녀들은 급하게 마나를 움직여 귀를 틀어막았다.
그녀들도 듣고 싶었지만, 감히 황제 폐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을 용기가 없었다.
“아, 폐하의 첫 상속 능력이 <육체 최적화>였었지?”
“그 이름은 폐하가 정해 주신 이름이었고, 그 당시에는 육체 강화의 한 종류로 알았었죠.”
“정말? 그렇다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했을 텐데?”
“그 이상이었습니다. 가문의 고용인들까지 뒤에서 수군거렸으니까요.”
맙소사. 황제 폐하의 가문 뒷이야기라니.
슬쩍 마나를 낮춰 이야기를 엿듣던 시녀들은 창백한 표정으로 마나를 끌어올렸다.
창백해진 시녀들과 대조적으로 소피아 황녀는 놀란 얼굴이 되었다.
“말도 안 돼! <육체 최적화>는 정말 좋은 능력이잖아!”
“그러니까, 어떤 결과가 나와도 황녀께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으신 거죠. 그 황제 폐하의 따님이신걸요.”
“그럴까요?”
이제는 완숙한 여인의 모습을 한 플로라의 말에 소피아 황녀의 긴장이 조금씩 풀려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플로라는 그 모습에 다시 미소를 지었고, 때마침 밖에서 문을 지키는 황실 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샤 황후님과 프리다 황비님이 황자, 황녀분들과 오셨습니다.”
기사의 말에 소피아 황녀는 환한 얼굴로 외쳤다.
“들어오시라고 해.”
그녀의 말에 문이 소리 없이 열렸고, 응접실로 사람들이 들어왔다.
“소피아 누님!”
제일 먼저 대여섯 살 정도의 남자아이가 응접실 안으로 걸어와 소피아에게 고개를 귀엽게 숙였다.
“소피! 소피!”
그리고, 그 뒤로 젊은 여성의 품에 안긴 귀여운 아이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며 외쳤다.
소피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를 안은 여성과 그녀와 함께 들어온 현숙해 보이는 여성에게 고개를 숙였다.
“찾아 주셔서 감사드려요. 어머니들께 인사드립니다.”
그녀의 인사에 아이를 안고 있던 젊은 여성, 아이샤 황후가 한 손을 빼내 손을 흔들었다.
“그런 인사는 안 해도 돼요. 우린 걱정돼서 찾아온 거니까.”
그런데, 이렇게 아이샤 황후, 황제의 정실이 한 손으로 아이를 안고 있는데, 아이를 받으려는 시녀나,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황후 아이샤는 황후이기 전에 대단한 기사였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그녀는 얼마 전까지 카를로스 왕국을 다스렸고, 지금도 제국과 합병이 된 카를로스 지역의 정신적 지주인 여장부였다.
그런 황후가 직접 아이를 안고 다닌다고 뭐라 할 사람은 이 황궁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다가온 아이샤 황후는 그녀의 아이를 소피아 황녀에게 안겨 주었다.
“소피! 소피!”
아이는 환한 얼굴로 소피아 황녀의 얼굴을 만졌고, 황녀도 아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황후는 그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반대편 의자에 앉았고, 그녀 옆에는 다른 황비와 어린 소년, 황자가 앉았다.
황자는 앉기 전에 황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리 각성식을 축하드립니다.”
정중한 황자의 말에 시녀들은 소년에게 선망하는 시선을 보냈다.
말괄량이 황녀에게 시달리던 시녀들로서는 저 예의 바르고 착실한 황자는 손에 닿지 않는 이상향이었다.
인사하는 모습 그대로 말괄량이인 소피아 황녀와 반대로 황자인 레온은 황자의 어머니인 프리다 황비를 닮아 무척이나 차분했다.
도서관에서 살았던 어렸을 때의 황제와 닮았다는 말이 돌 정도로 차분하고 똑똑한 황자.
귀족 중에는 말괄량이 황녀보다 레온 황자가 다음 대 황제에 더 어울려 보인다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물론, 이 제국에서 그런 말을 공공연하게 내뱉는 귀족은 없었지만…….
물론, 모두의 생각과 다르게, 황제의 자식들, 배다른 황녀와 황자는 무척이나 친했다.
소피아 황녀는 두 동생을 사랑했고, 황자와 아기인 막내 황녀도 소피아 황녀를 좋아했다.
그렇게 배다른 자녀들끼리 사이가 좋은 것은 당연하게도 황제의 아내들이 사이가 좋기 때문이었다.
아이샤 황후가 자신의 딸을 안고 있는 소피아 황녀를 보고 미소를 짓고 있는 것처럼, 프리다 황비도 평소의 엄격한 모습과는 다르게 아이들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황제의 세 아내.
전 카를로스 왕국의 말단 귀족의 딸인 1 황비 발레아부터, 공국의 대공녀인 2 황비 프리다. 그리고, 세 번째로 아내가 되었지만, 황제의 정실 아내, 황후가 된 아이샤 황후까지.
황제의 세 아내는 신기하게도 무척이나 사이가 좋았다.
그 뒤로 응접실은 즐거운 담소가 이어졌다.
성격도 다르고, 취향도 달랐지만, 모두 기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덕분인지 플로라의 이야기에 풀려나가기 시작한 소피아 황녀의 긴장은 가족들과의 대화 중에 모두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다시 문을 지키는 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레아 황비님이 오셨습니다!”
기사의 말에 시녀들이 반사적으로 허리를 바짝 세웠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1 황비, 발레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황비는 아름다웠다.
결혼 때의 젊은 아름다움이 조금도 감소 되지 않은 상황에서 원숙한 아름다움이 더해진 모습은 제국 제일의 미녀라 불릴 만했다.
언제나처럼 옅은 미소를 띤 얼굴로 방 안으로 들어오던 황비는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세상에! 다들 소피아를 위해 와 주셨군요!“
발레아 황비의 인사에 모두 웃으며 그녀를 환영했다.
발레아 황비가 다가오자, 프리다 황비가 자리를 둘러보더니, 아이샤 황후에게 말했다.
“이런, 자리가 부족하네요. 두 분이 이야기를 나누시도록 우리는 먼저 일어날까요?”
“아, 그렇네요. 우리는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프리다의 말에 황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자, 발레아 황비가 놀란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저 때문에 일어나시지 않아도 돼요.”
발레아의 말에도 프리다 황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두 분이 따로 하실 말도 있으신 것 같은데요. 저희는 먼저 가 있을게요.”
그녀의 말에 발레아는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드려요.”
그렇게 먼저 왔던 이들은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응접실을 빠져 나갔다.
발레아 황비는 가족을 배웅한 뒤에 황녀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는 시녀들에게 부탁했다.
“플로라만 남고 모두 잠깐 자리를 비워 줄래요?”
그녀의 말에 시녀들은 바로 고개를 숙이고, 방을 빠져나갔다.
황비답지 않은 부드러운 부탁이었지만, 방을 떠나는 시녀들의 표정은 긴장으로 가득했다.
발레아 황비는 황비가 된 뒤로 한 번도 큰소리를 내지 않은 자애롭기로 이름 높은 황비였지만, 어째서인지 그녀의 지시를 받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긴장하곤 했다.
모두가 방을 나서자, 발레아 황비가 입을 열었다.
“알아서 자리를 비켜 주시다니, 프리다 님은 언제나 봐도 눈치가 빠르신 분이야. 황후님도 어렸을 때와 달리, 정치로 단련되어 쉬운 분이 아니시게 되었고.”
조금 전과 같은 부드러운 말투지만, 말의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는 플로라도 소피아 황녀도 표정이 달라지지 않았다.
두 사람 다 발레아 황비의 본 모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비는 그렇게 나간 사람들의 평을 내뱉고, 바로 소피아 황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람, 너답지 않게 긴장이라니.”
황비의 말에 소피아 황녀의 얼굴에서 장난스러운 분위기가 사라져버렸다.
그보다 더 차분하고 지적인 얼굴로 변한 황녀.
그녀는 이마를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별수 없는걸요. 각성인데요. 긴장할 수밖에요.”
확 바뀐 얼굴이었지만, 이번에도 방 안에 있던 두 사람은 놀라지 않았다.
이게 황녀의 본모습이란 것을 두 사람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발레아 황비는 서늘한 눈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뭐가 되었건 상관없을 텐데. 설마, 다음 대 황제 자리를 준비하려는 건 아니겠지?”
황비의 말에 딸은 고개를 저었다.
“아버님이 계시는데 황제라니요. 황제 같은 건 생각도 안 하는걸요.”
딸의 대답에 황비는 눈을 풀고 부드럽게 물었다.
“그런데, 웬 긴장이냐.”
“어떻게 하든 아버지께 도움이 될 능력을 얻어야 하니까요. 이상한 능력을 얻었다가 아버지를 실망하시게 할 수는 없어요!”
딸의 말에 황비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슬금슬금 마나 마저 흘러나오는 눈.
응접실 안에 황비의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렉스에게 도움이 되는 능력이라니. 그런 능력은 얻지 않아도 돼. 알렉스에게는 내가 있으니까.”
하지만, 황비의 서늘한 목소리에도 황녀의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수도 밖으로 나가시게 되면 어머니는 수도를 지키셔야 하잖아요. 그럼 제가 아버지를 모셔야 하니까. 제가 도움이 되는 능력을 갖춰야죠. 어머니와 같은 능력도 좋을 것 같네요.”
황녀의 말을 끝으로 모녀는 지긋이 서로를 바라보았고, 옆에 있던 플로라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를 꼭 닮은 딸이라니……. 이건 전부 알렉스 님이 잘못한 거야.’
플로라가 속으로 제삼자를 욕하는 것을 끝으로 모녀의 대담이 끝났다.
잠시 뒤, 소피아 황태녀는 각성을 위해 방을 나섰다.
각성식장.
제국의 역대 왕이 묻힌 영웅묘실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황궁을 가로지른 소피아는 긴장한 얼굴로 묘실 안으로 들어갔다.
묘실 안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먼저 그녀의 어머니인 발레아 황비.
그 옆에 프리다 황비와 아이샤 황후, 두 동생도 보였다.
그리고, 황제의 두 친위 기사 우고 기사단장과 검호 미겔 경도 보였고,
조아나 대주교와 추기경인 엘레나 고모도 보였다.
그렇게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지만, 그녀의 눈에 가득 찬 사람은 묘실 중앙에 서 있는 남자였다.
그녀의 아버지이자, 마왕을 죽인 용사, 그리고 제국을 이어받고 새로운 황가를 세운 신 제국의 황제.
알렉스 디 샤를이 그녀를 보며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