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4화
제19편 상속
제국 남부 영지의 너른 벌판.
한적한 오솔길을 나그네가 걷고 있었다.
로브를 둘러쓰고, 바닥을 보며 걷고 있는 여행객.
해진 로브와 구부러진 등에 가득 지고 있는 봇짐을 보면 나그네는 평범한 여행객처럼 보였다.
하지만, 걸음을 걸을 때마다 땅을 짚고 있는 철봉이 평범한 여행객처럼 느껴지지 않게 했다.
나그네는 천천히 걸어와, 길옆 바위에 걸터앉아 있는 내게 작게 고개를 숙이고, 내 앞을 지나가려 했다.
나는 그가 지나가기 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만나러 왔는데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현자, 아니 용사를 기다렸습니다.”
내 말에 여행객, 아니 현자로 불리는 용사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놀란 여행객처럼 연기하던 그는 내 얼굴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설마, 샤를 백작…….”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꾸부정하던 몸을 세우고,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설마, 이렇게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당신밖에 없으니까.”
“그렇습니까? 백작과 백작의 기사들이 봉인지를 정리하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나만 하는 것이 아니니까.”
봉인지 정리는 제국도 카를로스 왕국도 같이 손을 더하고 있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몇 개월이 지나가기 전에 봉인지라는 이름은 사라질 터였다.
“그렇다면, 정말 마왕은 죽은 거군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죽인 겁니까?”
“동료들과 같이 죽였다.”
혼자서 한 일이 아니었다. 쉽게 한 일도 아니었고.
나는 오랜 시간, 여러 번의 삶을 반복한 뒤에야 마왕을 죽일 수 있었다.
내 말에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왕을 다시 봉인한 것도 아니고, 죽였다라……. 그게 가능한 거였군요.”
그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믿지 못하겠다는 느낌이 아니라, 어딘가 실감이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마왕을 죽였으니, 이제 마물만 정리하면 대륙은 마물의 위협을 받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되었으니, 이제 조직도 더는 남아 있을 필요가 없지.”
그건 내 앞에 서 있는 현자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수백 년간 마왕에 대비하기 위해 노력한 이 용사에게 칭찬이나 감사를 표하겠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제국의 대가문 혈족들이 실종되고, 조직과 연락도 끊어졌다고 들었는데, 2 황자가 아니라 당신이 한 것이었습니까?”
현자는 그 소식을 듣고,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오랜만에 제국 수도로 향하는 길이었다.
나는 현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대의 용사는 무서운 사람이군요.”
글쎄. 그동안 당한 것을 생각하면 평범한 반격에 불과했다.
물론, 태반이 없어진 삶에서 벌어진 일들이라, 당하는 쪽은 좀 뜬금없을 테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더구나 다 죽인 것도 아니었다.
권력이 제일 중요한 사람이라면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일지도 모르지만, 어찌 되었건 사는 데는 지장 없을 터였다.
“저도 죽이실 생각입니까?”
현자의 말에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 ‘현자’를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직을 만든 것도 그였고, 그가 만든 일들 때문에 나도 카를로스 왕국도 많이 고생했었다.
조직이 한 일을 제외해도 그가 각성시킨 사람들에 의해 벌어진 일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카를로스 왕국의 내전도 결국, 그가 왕족들의 능력을 일깨웠기 때문이었다.
이것만 보면 살려 둘 이유가 없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는 단지 용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마왕이 봉인을 깨고 나왔을 때를 대비해 달라는 그 말.
그 하나를 위해 그는 수백 년간을 살아 온 것이었다.
나는 그 와중에 피해를 당한 것일 뿐.
더구나, 그는 발레아의 능력을 깨워 준 사람이었다.
사실, 다른 것보다 이게 내가 제일 고심하게 된 이유였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그의 말을 들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는 멍하니 봉인지가 있을 동쪽을 바라보았다.
“마왕이 죽었다면, 더는 내가 노력할 필요는 없겠죠.”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손가락에서 반지 하나를 빼냈다.
“참 오랜 시간이었습니다. 그래도 약속을 지킬 수 있었군요.”
반지를 뺀 순간, 그는 늙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만족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현자는 중년이 되었다가, 노인이 되었고.
그리고, 숨이 멈추었다.
마왕이 죽은 것은 그동안 그가 해 온 일과 크게 상관이 없었던 것 같았지만, 차마 그에게 그 말을 하지는 못했다.
이미 한 번 죽여도 봤었기에, 이번에는 곱게 보내주기로 한 것이었다.
* * *
봉인지의 동쪽 끝.
바다와 맞닿은 밀림에 때아닌 재난이 벌어졌다.
나무들이 뿌리까지 뽑혀서 나뒹굴고, 쏟아지는 화염에 화재가 일었다.
그렇게 불타는 밀림에서 거대한 마물이 보였다.
불타는 나무들 위로 불쑥 튀어나온 거대한 마물.
날개만 없을 뿐이지, 용처럼 보이는 거대한 마물이었다.
이 용처럼 보이는 마물은 마물왕이었다.
다른 마물왕과 달리, 자신의 영역과 둥지를 지키는 것에만 신경을 쓰는 마물왕.
이 마물왕은 다른 마물왕처럼 봉인지를 빠져나가 인간들을 공격하지 않고, 이렇게 봉인지 끝에 눌러앉아 수백 년간 둥지를 지키고 있었을 뿐이었다.
얼마 전 마왕과의 계약이 끊어진 것이 느껴져 마물들이 봉인지를 빠져나가기 시작했을 때도 마물왕은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봉인지에서 움직이지 않았던 마물왕들은 이 마물왕 말고도 더 있었다.
그리고, 그 마물왕들은 차례로 인간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감히 봉인지로 밀고 들어와 마물들을 쓸어버린 인간들.
마물들은 물론, 마물왕들까지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이제는 날개 없는 용 차례였다.
이 용을 닮은 마물왕은 마지막 남은 마물왕이었다.
크아아앙!
마물왕은 괴성을 지르며 입에서 화염을 뿜어댔다.
한눈에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모습이었다.
다만, 보기와 달리 마물왕은 겁에 질려 난동을 부리는 중이었다.
발가락들이 잘려 나가고, 옆구리가 벌어져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쏟아지던 화염도 반으로 갈라져 버렸다.
갈라진 화염 사이로 나무 꼭대기에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마나 방출’로 화염을 잘라낸 뒤에 용을 닮은 마물왕을 쳐다보았다.
“날개는 없지만 드래곤과 닮았는데, 드래곤 하트나 여의주 같은 것은 없으려나.”
전생에 봤던 판타지 소설에서는 그런 게 잘 나오던데.
이 세상의 마물들은 내단 같은 것도 없었다.
시체도 그렇게 쓸모 있지 않고.
열심히 마물을 잡고 있지만, 아쉬울 따름이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마물왕을 향해 몸을 날렸다.
마물왕은 나를 향해 다시 화염을 쏟아부으려 했지만, 이 공격은 좀 전에도 여러 번 본 공격이었다.
소설에서 나오는 드래곤의 브레스와 같은 화염.
하지만, 그 정도로 절대적인 위력은 없었다.
아니, 평범한 사람들은 다르게 느끼려나?
어차피 상관없었다. 앞으로 이 마물왕은 아무도 보지 못할 테니까.
나는 화염을 머금은 마물의 입에 대검을 쑤셔 넣었다.
검날보다 수배나 큰 검기가 마물의 입천장을 뚫고, 뇌까지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 입에 머금었던 화염이 마나를 따라 마물왕의 뇌로 밀려 들어갔다. 마물왕의 뇌가 화염에 구워졌다.
쿵.
뇌가 구워진 마물왕이 나무들을 박살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생각보다 약하네. 아니면 내가 너무 강해진 걸까?”
나는 쓰러진 마물왕 위에 내려섰다.
마물도 내 기사들도 보이지 않았고, 주변에는 마물왕이 쏘아낸 화염만 가득했다.
하지만, 엄청나게 강화된 내 감각에 멀리 도망치는 마물과 그 마물들을 잡는 중인 내 기사들이 느껴졌다.
“이게 마지막인가.”
마왕이 쓰러지고 9개월.
마왕을 쓰러뜨리고 몇 주 뒤부터 쉬지 않고 달려온 시간이었다.
드디어 마지막 마물왕을 쓰러뜨렸다.
지금 도망치는 마물들처럼 아직 자잘한 마물들은 많이 남아 있었지만, 그 마물들은 평범한 기사나 귀족들이 충분히 잡을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나설 필요가 없었다.
다행히 시간이 맞았다.
내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남은 마물왕을 모두 쓰러뜨린 것이다.
태어나는 자식에게는 마물이 없는 세상을 보여 주고 싶었는데, 다행히 늦지 않았다.
나는 불타고 있는 밀림. 봉인지를 둘러보았다.
아직 마물들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 마물들도 얼마 안 있어 모두 인간의 손에 죽게 될 터였다.
그러면 오염된 마나도, 이 밀림도 자취를 감출 테고, 그 뒤에는 인간의 손에 개발이 될 터였다.
고대 제국의 수도가 있던 곳이었다. 사람들이 그냥 둘 리가 없었다.
“제국이 차지할까? 아니면 새로운 나라가 만들어질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고민할 이유도 없고.
마물이 사라진 뒤에 세계정세가 어떻게 바뀌게 될지도 여왕이나 2 황자가 고민할 일이지, 내가 고민할 일은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와 달리, 정치적 욕심이 없었으니까.
서자로 태어나 백작이 되었으면 충분했다.
두 영지를 하나로 묶은 내 영지도 만족스러웠고.
영지를 지킬 힘도 있으니 이제 가족에게 충실할 시간이었다.
“먼저 가겠다. 마물들을 정리하고 뒤따라오도록.”
[알겠습니다.]
머릿속으로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발레아를 떠올리면서 작게 속삭였다.
“전송.”
* * *
나는 창문 밖을 보며 시간을 계산했다.
여섯 시간째.
너무 늦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응애!
멀리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집무실 문을 박차고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영주님의 권위를 위해 좀 더 기다리심이…….”
문밖에서 기다리던 집사장이 나를 따라오며 뭐라 했지만, 듣지도 않았다.
문 앞에서 기다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영주로서 내가 할 일은 다 한 것이었다.
어차피 나를 욕할 사람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내 앞에 서서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나는 빠르게 복도를 걸어가 발레아의 방 앞에 섰다.
시녀들이 고개를 숙였고, 때마침 안에서 시녀장이 나왔다.
시녀장은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부인께서도 공녀님도 무사하십니다.”
내 전속 시녀에서 발레아의 시녀장이 된 플로아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들어가도 되나.”
두 사람이 무사한 것은 집무실에 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아이와 산모를 빨리 보고 싶을 뿐이었다.
“네. 들어가셔도 됩니다.”
나는 소독 대신 온몸에 마나를 두른 뒤에 문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에는 발레아가 아이를 낳는 것을 도와준 사람들이 있었다.
나이 든 여성들.
그중에 한 명은 잘 아는 사람이었다. 내 첫 부하. 후안의 어머니였다.
플로아의 시어머니이기도 한 노인은 아직도 정정해 보였다.
나는 그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내 말에 노인과 여성들이 놀라, 마주 고개를 숙였다.
나는 감격해하는 노인을 보고, 침실로 들어갔다.
침실 안에는 아기를 보고 미소를 짓고 있는 발레아와, 작은 아이가 있었다.
내 아이, 내 딸이었다.
나는 아기에게 다가가다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졌다.
“왜 그래요?”
놀란 발레아가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표정을 수습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아이에게 다가가 내 아이를 바라보았다.
갓 태어난 아이가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평범하지 않은 아이.
그리고, 내 앞에는 메시지 창이 떠 있었다.
<새로운 ‘사자 회귀’ 능력자가 태어났습니다.
능력 충돌로 인해 가지고 있는 ‘사자 회귀’ 능력을 삭제하겠습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메시지 창이 점점 사라졌다.
동시에 나는 내 능력 하나가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었던 ‘사자 회귀’ 능력이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사라져 가는 메시지 창에서 시선을 거두고,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꺄르르르.
아기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나도 같이 웃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