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3화
제18편 전투가 끝난 뒤 (3)
봉인지에서 쏟아져 나오는 마물로 대륙은 여전히 혼란했지만, 제국의 수도, 차르마니아는 평화롭고 활기찼다.
전 황제가 죽고, 2 황자가 정권을 잡은 뒤, 수도가 안정을 되찾았기 때문이었다.
땅속에서 튀어나오던 마물들도 더 이상 수도 위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세 마물 왕이 죽은 뒤, 봉인지 서쪽 요새들이 마물들을 잘 막아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국의 황성 테라스에서 도시의 활기찬 모습을 2 황자가 지켜보고 있었다.
활기찬 도시와 달리, 2 황자는 지루한 얼굴로 도시를 지켜보며 와인을 마실 뿐이었다.
그 모습이 답답했는지, 앞에 앉아 있던 여성, 대주교 조아나가 입을 열었다.
“이제 황위에 오르실 때가 되지 않았나요?”
조아나도 궁금했지만, 이 질문은 그녀가 원해서 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2 황자를 만난다고 하니, 귀족들이 찾아와 그녀에게 물어보기를 부탁한 질문이었다.
다들 힘이 있는 귀족들일 뿐만 아니라, 교단의 큰 손들이라, 대주교인 그녀도 차마 거절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아직 마물들의 난동이 끝난 게 아니니…….”
2 황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조아나만이 아니라, 매번 듣는 질문이었고, 그가 항상 하는 대답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여기서 멈추었지만, 조아나는 멈추지 않았다.
“마물의 난동이 끝난 뒤에는 황위에 오르실 생각이 있으신 건가요?”
젊은 황자는 젊은 대주교를 빤히 쳐다보았다.
다른 귀족과 달리, 이 여자 대주교는 그가 감옥에서 나왔을 때부터 그를 보았었다.
그가 가장 힘이 없었을 때부터, 그를 도와주었던 세 사람 가운데 한 명.
그가 왜 정권을 장악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어차피 마왕이 죽어서 쏟아져 나온 마물들일 뿐이니까요. 샤를 백작님이 나서주셨으니, 금방 정리될 테죠.”
황자는 대주교의 말에 다시 와인을 잔에 부으며 한 사람을 떠올렸다.
자신을 감옥에서 꺼내주고, 이 수도를 장악하게 해 준 남자.
그리고, 마물 왕을 죽이고, 황제도 죽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기사.
‘샤를 백작…….’
그는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반쯤 넋이 나가 있는 자신에게 검호들을 모아놓으라는 요청(?)을 했었다.
대단한 요청이라 들어주었더니, 마물이 쏟아져 나왔다는 소리가 들려왔고, 모아놓은 검호들을 보내 요새를 지킬 수 있었다.
그렇게 겨우 요새를 지키는 사이, 그가 봉인지 마물들을 정리해나가고 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그는 기사단을 이끌고 마물들이 있는 곳으로 공간 이동을 해서 마물들을 쓸어버렸다.
이피로스 왕국을 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제국의 요새들도 구해 주었다.
조금 전에 아직 마물들의 난동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사실, 이제 마물에 대한 걱정은 더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모험가들이 봉인지 탐사를 재개할 정도니까.
그런데, 그가 한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교단의 대주교, 조아나가 알려 준 이야기는 이제까지의 활약과는 비교도 안 되었다.
마왕을 죽였다니.
믿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봉인지에서 마물들이 쏟아져 나온 것도 마왕이 죽었기 때문이라는 말에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더구나 그 말을 한 것이 교단의 대주교였으니.
“하……. 형님은 도대체 뭘 했던 거였지.”
마왕을 막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가족을 죽여가며 황제가 된 형을 생각하니 웃음도 안 나올 지경이었다.
그런 형에게 복수하겠다고, 정권을 잡은 자신도 웃기는 인생이었다.
제대로 된 복수도 못 하고, 이런 자리에 앉게 되니, 솔직히 다 내팽개치고 떠나고 싶었다.
이 자리에 앉아 보니, 알 수 있었다.
제국의 황제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었다.
제국을 뒤에서 조종해왔다는 조직의 힘은 너무나 거대했다.
전 황제인 형님이 죽고, 자신이 정권을 차지하면서 정리한다고 정리했지만,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결국, 조직은 이 제국의 근간이었다.
오래된 귀족, 제국의 권문세가는 전부 조직의 일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자신에게는 조직도 형과 더불어 복수의 대상이긴 했었지만, 조직은 차마 복수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마왕이 죽었다면, 이제 조직도 필요 없을 텐데…….”
황자의 말에 조아나가 물었다.
“마왕이 죽었다는 말을 들어도 조직을 해체하지는 않겠죠?”
“그럴 리가……. 마지막 굴레가 사라졌으니, 더 심해지겠지.”
황자는 고개를 저었다.
마왕을 대비한다는 조직의 목표는 조직을 수백 년간 버티게 만든 힘이자, 조직을 얽어매는 굴레였다.
그 굴레가 사라지면 조직은 평범한 세력이 될 뿐이었다.
제국을 뒤흔드는 거대한 세력이.
그때, 황자의 옆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직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황자는 놀라 옆을 쳐다보았다.
바로 전에까지 비어있던 테라스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샤를 백작, 알렉스였다.
* * *
나는 마을 앞에 서서 주변 경치를 감상했다.
너른 밀밭과 과수원, 그리고, 과수원 저 멀리에는 곡식을 저장하는 탑이 보였다.
아름다운 광경이고,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나는 탑에서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지난 일을 떠올렸다.
대공녀가 유물 의수를 전해준 뒤에 나는 쉰 이상으로 열심히 뛰어다녔다.
제국 황실 지하에 있는 금고에 몰래 잠입해서 유물을 빼돌려 내 기사단원들에게 건네주었다.
그 유물들은 내 소환 매개체였다.
마왕을 쓰러뜨린 뒤에 엄청나게 레벨이 올랐다.
이제 파티가 아니라, 기사단 전체를 소환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 뒤에 나는 기사단과 함께 마물들을 쓰러뜨렸다.
하늘을 나는 마물을 타고 마물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간 뒤에 기사단을 소환 한 것이다.
마물과 싸우는 것은 혼자서도 충분했지만, 사람들을 구하고, 보호하려면 기사단원들이 필요했다.
그렇게 이피로스 왕국을 구하고, 봉인지 옆 공국 도시를 탈환한 뒤에, 제국의 요새도 도와주었다.
금고 유물을 몰래 빼낸 대가라면 대가였다.
그 뒤에 봉인지에 들어가 최대한 마물들을 정리하고, 2 황자를 만났다.
그는 내가 조직을 정리해준다는 말을 듣고 딴소리를 했다.
“알고 있나? 이 제국은 마왕과 싸운 용사가 세운 제국이라는 것을.”
전에도 그러더니.
그는 내게 제국을 맡기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자리를 떠맡고 싶지 않았다.
마왕도 죽였고, 마물들도 정리해서 이제야 좀 쉬게 되었는데, 정치판에 뛰어들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나는 내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아니 그 아이가 자랄 때까지, 내 영지에서 좋은 영주이자, 좋은 아버지가 될 생각이었다.
“용사가 세운 나라가 제국만 있는 게 아닙니다. 우선, 저희 카를로스 왕국도 용사 카를로스가 세운 왕국입니다.”
아쉽게도 황자는 내 말에 설득이 되지 않았다.
거기다 어이없게도 조아나가 내 이야기를 듣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여왕님이 들으시면 좋아하실 말이네요.”
다들 뭔 생각을 하는 건지.
나는 냉큼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몇 가지 일을 처리하고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내가 온 곳은 작은 마을과 풍성한 곡식이 자라는 평야가 있는 아름다운 분지.
낙원이었다.
멀리 내가 전송되었던 탑을 보고, 나는 몸을 돌렸다.
나는 저 탑으로 전송되었지만, 사람들이 이 낙원으로 넘어오는 곳은 저 탑이 아니라, 마을 중앙에 있는 성이었다.
나는 마을 중앙에 난 길을 걸어 성으로 향했다.
전에는 이 길 양옆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텅 빈 거리를 걸어, 성 앞으로 나아갔다.
성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나는 열린 성문을 지나, 성 안으로 들어갔다.
전에 보았던 성의 중앙 홀이 나를 반겼다.
화려한 장식도 그대로였고, 홀 끝에 있는 커다란 깃발, 현자의 깃발도 잘 있었다.
나는 문 앞에 서서 사람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홀 중앙에 문양이 만들어지고, 이어서 여러 개의 빛이 솟구쳤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도착한 것이다.
노인과 중년, 그리고 아이들.
귀족 가문의 일가족이었다.
나는 그들이 공간 이동 후유증을 벗어나기를 기다렸다.
“어서 오십시오.”
내 인사에 노인이 가족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먼저 집에 가 있어라.”
노인의 말에 가족들이 먼저 성을 빠져나갔다.
남은 노인이 내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지? 갑자기 전체 소환이라니. 마물들도 정리되고 있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인가!”
“먼저 오신 장로님들이 설명해 주실 겁니다. 장로님들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 말에 노인, 전 재상인 리하르트 폰 로마이어 백작이 눈을 찡그렸다.
“처음 보는데? 자네는 누구지.”
그가 의아해하는 게 당연했다.
이곳 낙원은 엄선된 이만 올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전에 보셨을 텐데요. 저는 당신을 장로님들에게 안내해줄 사람입니다.”
의아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노려보던 그는 곧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는 카를로스 왕국의 사절이었을 텐데! 황제 폐하께 상을 받았던!”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지.
아니, 그의 입장으로 보면 그리 오래된 이야기는 아니려나?
“이름은 모르시는군요. 알렉스 디 샤를 백작이라고 합니다. 카를로스 왕국의 사절이고, 2 황자를 도와준 용병이자, 조직의 적대자이지요.”
“뭐라고! 네놈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는 분노한 얼굴로 내게 소리쳤다.
그러면서도 그는 슬그머니, 바닥에 마나를 흘려 넣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바닥의 진은 제가 막아놓았습니다. 아시겠지만, 백작님이 제일 마지막입니다. 다른 분들은 먼저 와 있으시죠.”
“그들은 어떻게 되었지?”
“다른 분들의 가족분들은 백작님의 가족분들처럼 전부 집에 잘 계십니다.”
지금 내 ‘마나 감응력’에는 집에 숨어서 떨고 있는 사람들이 느껴졌다.
“가족들? 설마, 다른 장로들은…….”
“낙원으로 소집하는 것은 세 분 장로님의 결정이 있어야 해서, 그분들은 이곳에 오지 못하셨습니다. 나머지 분들은 전부 이곳에 미리 와서 백작님을 기다리고 계시고요.”
백작은 그제야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전부 죽인 건가.”
“네.”
“왜 그런 거지?”
“여러 번 이야기하는 것이 귀찮긴 한데……. 그래도 마지막이니 말해드리는 게 예의겠죠.”
나는 장로들에게 여러 번 말한 내용을 다시 이야기했다.
“그동안 적대자로 조직과 싸운 것은 자기방어 차원이었습니다만, 이번에 조직의 장로님들을 죽이는 것은 더는 조직이 쓸모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뭐라고?”
“마왕이 죽었습니다. 아니, 내가 봉인에서 풀려난 마왕을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조직은 필요 없어졌습니다.”
그 말과 함께 나는 숨겨놓았던 마나를 풀어놓았다.
마나가 가득 풀려나가, 홀 반대편의 깃발이 펄럭였다.
“말도 안 되는…….”
백작은 나를 보며 입술을 떨었다.
믿을 수 없겠지만, 내 마나를 느끼면 믿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실제로는 이 정도 마나로는 마왕을 쓰러뜨릴 수 없지만, 평범한(?) 귀족인 그는 내 마나를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다음은 별다를 게 없었다.
처음 말대로 백작도 다른 장로들의 곁으로 갔을 뿐이니까.
나는 성에 남아 있는 공간 이동진을 지우고, 성문을 닫았다.
이제 이 낙원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물론, 분지 밖 수백 킬로의 빙하지대를 걸어서 건널 수 있다면야 충분히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겠지만, 귀족도, 기사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마을을 둘러보았다.
창문 밖으로 훔쳐보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급하게 몸을 피했고,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사실, 가족들을 이곳에 남기는 것은 옳은 일은 아니었다.
연좌제라니.
전생을 기억하는 내가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들은 조직의 일원이자, 제국과 왕국들의 귀족들이었다.
장로와 책임자들을 죽여봤자, 자식들과 가족이 이어갈 뿐이었다.
그래서 가족들을 이곳에 남긴 것이었다.
그들이 죽을 만한 죄를 지은 것이 아니었으니, 이곳에서 평안한 삶을 살아가면 될 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조직에 관한 것은 하나만 남았다.
이제 현자를 만날 때였다.
“전송.”
낙원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