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2화
제17편 전투가 끝난 뒤 (2)
샤를 백작의 집무실.
집무실 안에 있는 영주의 의자에는 샤를 백작이 아니라, 백작 부인, 발레아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앞에 서 있는 이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남편이 세운 사람들.
지금은 그녀도 신뢰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제일 먼저 장년의 기사, 우고 선임 기사에게 물었다.
“기사단은 괜찮나요?”
그녀의 말에 우고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겔에게서 아직은 괜찮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사망자가 두 명 나왔고 부상자도 꽤 있었지만, 다행히 부상자는 포션으로 전부 회복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샤를 백작의 기사단 대부분은 미겔 선임 기사와 함께 사냥꾼 마을이 있던 북부 산맥에 가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북부 산맥을 통해 영지로 넘어오려는 봉인지의 마물들을 막아 내고 있었다.
우고 기사의 말에 발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망자 가족에게는 제대로 보상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우고 기사의 대답이 끝나자, 그녀는 다음 사람에게 물었다.
“아직 재정은 괜찮죠?”
그녀의 물음에 벤자민이 대답했다.
“마물들의 준동한다는 소문에 물가가 꽤 올랐습니다. 마물에 피해를 본 영지에서 피난민도 꽤 들어올 듯합니다.”
그의 말에 그녀는 사적으로는 아카데미 선배인 벤자민을 빤히 쳐다보았다.
벤자민은 급하게 말을 이었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사실, 다른 영지 한둘은 1년 이상 먹여 살릴 만큼 재정은 풍족합니다.”
그제야 발레아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벤자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샤를 백작과 달리, 이 여후배는 아름다운 미모와 달리, 엄청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발레아는 다시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따로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셀린의 대주교에서 경매장 주인이자, 셀린 영지의 정보 수장으로 돌아온 레스티가 그녀의 시선에 알아서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수도의 귀족들 사이에서 기사와 병력을 보내지 않은 저희 영지에 대한 불만이 커진 것 같습니다. 여왕님과 그레시아 공작님이 막아 내고 계시고는 있는데, 완전히 가라앉히기는 어려우신 모양입니다.”
레스티의 말에 발레아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고, 이번에는 레스티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런 말을 하는 귀족들의 명단을 뽑아줘요. 아무래도 우리 영지의 일은 우리 영지가 처리하는 게 제일 좋을 듯하니까요.”
“준, 준비해 놓겠습니다.”
발레아는 앞에 선 세 사람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모두 조금만 더 힘내 주세요. 이번 마물 사태는 곧 해결될 테니까요.”
발레아의 말에 세 사람 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모두 마물들이 왜 봉인지를 빠져나오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마물들이 쏟아져나오는 것이 일시적이라는 것도, 그 뒤에는 마물 걱정 없는 세상이 오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 다음 안건은…….”
그녀가 다음 서류를 들춰보려 하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동시에 문밖에서 집사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공녀님이 오셨습니다.”
대공녀가 왔다는 말에 발레아의 표정이 애매하게 변했다.
반가우면서도 뭔가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젓고는 입을 열었다.
“모셔주세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집무실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 대공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고마워요.”
그녀는 문을 열어 준 집사장에게 인사를 하고는 발레아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날 이후 처음 보는 대공녀였다.
대공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지쳐 보였지만, 그 이상으로 밝았다.
대공녀는 발레아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구해왔어요!”
그녀의 말에 발레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요?”
대공녀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아는 급하게 회의를 파한 뒤, 대공녀와 함께 집무실을 나섰다.
두 사람은 말없이 저택의 안쪽 복도를 걸었다.
시녀와 고용인들이 분분히 자리를 비키고, 두 사람은 영주의 방 앞에 멈춰 섰다.
문을 두드리기 전, 발레아가 고개를 돌려 대공녀를 노려보았다.
예의 없는 행동이었지만, 대공녀도 그녀를 마주 볼 뿐이었다.
결국, 발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공녀님만이에요.”
“네?”
발레아의 말에 대공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발레아는 다시 눈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정말, 모른 척하실 건가요?”
최후통첩처럼 들리는 말에 대공녀는 바로 표정을 바꾸었다.
“아뇨. 고마워요.”
발레아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가요.”
발레아는 짧게 문을 두드리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안은 커다란 응접실이 있었다.
영주의 침실에 딸린 응접실.
그 응접실 안쪽에는 한쪽 팔이 잘려 나간 샤를 백작이 앉아 있었다.
* * *
다행히 나는 죽지 않았었다.
세상이 어둡게 보였던 것은 내가 죽은 게 아니라, 기절했기 때문이었다.
크게 다치고, 한쪽 팔이 잘려 나갔지만, 그래도 나는 살아남은 것이다.
기절에서 깨어난 뒤에 나는 언데드를 부려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나도 영지로 돌아왔다.
영지로 돌아온 뒤에, 어머니와 발레아, 두 여성분의 강압에 못 이겨 한참 동안 쉬게 되었다.
오랫동안 싸워왔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일을 맡기고 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더구나, 마왕에게 당한 상처가 잘 회복되지 않아 쉴 수밖에 없기도 했다.
잘린 팔은 물론이고, 다른 상처들도 한참 동안 치료되지 않았다.
신검으로도, ‘전쟁신의 검’으로도, 레스티와 다른 신관들의 힘으로도 내 몸은 치료되지 않았다.
그동안 너무 많이 내 몸을 치유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조금씩 상처가 아물기는 해서, 시간이 지나자 잘린 팔 말고는 어느 정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발레아는 물론 다른 이들은 내 잘린 팔을 보고, 무척이나 슬픈 표정을 지었다.
한쪽 팔이 잘린 기사는 은퇴하는 게 당연한 세상이니, 저런 표정으로 나를 보는 게 당연하긴 했다.
하지만, 나는 괜찮았다.
마왕을 죽이는데, 겨우 팔 하나라니.
가성비가 장난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제 마왕이 죽었으니, 팔 하나로도 모두 상대할 수 있었다.
삶은 불편하겠지만, 나는 충분히 만족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내 생각과는 달랐던 것 같았다.
몸이 회복되어 슬슬 영주 자리로 돌아가려 할 때, 대공녀가 찾아온 것이다.
그녀는 작은 주머니에서 기다란 유물을 꺼냈다.
금속으로 되어 있는 팔 크기의 유물.
아니, 그녀가 꺼낸 유물은 금속 팔이었다.
“운 좋게 구했어요. 망가진 유물이라 비싸지도 않았고요.”
금속 팔을 내게 건네주며 대공녀가 말했다.
하지만, 금속 팔을 받아들고, 마나를 흘려보내니, 이 유물이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 알 수 있었다.
이 금속 팔은 평범한 의수가 아니었다.
마나를 불어넣으면, 진짜 손처럼 느끼고 움직이는 그런 의수였다.
마나가 강할수록 더 강해지고 섬세해지는 의수.
팔이 잘린 기사나 귀족에게는 성물보다 더 대단한 유물이었다.
나는 의수를 들고, 놀란 눈으로 두 여성을 쳐다보았다.
대공녀도 발레아도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빨리 차봐요.”
두 사람을 보니, 무슨 말을 하는 것보다, 우선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잘린 팔에 의수를 밀어 넣었다.
크기가 달라서인지, 의수가 어설프게 채워졌다.
나는 어깨에 걸친 의수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우우웅.
마나가 밀려들자, 금속 의수가 조금씩 변해갔다.
어깨에 조여지고, 다른 쪽 팔과 비슷한 모습으로 변해간 것이다.
그리고, 의수에 밀어 넣은 마나는 마치 신경처럼 의수 전체에 퍼져나갔다.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마치 내 손가락처럼 움직였다.
팔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마나를 좀 더 밀어 넣어보았다.
우우우웅.
손 전체가 은은하게 빛이 났다.
이대로 휘두르면 검기가 쏘아질 것 같았다.
“어때요?”
대공녀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 팔을 돌려주셨군요.”
내 말에 대공녀는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요. 대단한 유물도 아닌데요.”
그럴 리가 없었다.
저 피곤한 모습을 보니 쉽게 구하고, 쉽게 수리한 유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대공녀는 내 감사를 받지 않았다.
대신, 대공녀는 발레아를 가리켰다.
“이미 샤를 백작 부인이 값을 치러주셨어요.”
발레아도 대공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값을 치르는 것은 대공녀님이 마지막이에요.”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나중에 발레아에게 따로 물어보기로 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나가 흐르니, 의수는 내 피부와 비슷한 색으로 변해있었다.
멀리서는 의수인지 알 수도 없을 정도였다.
나는 주먹을 꽉 쥐어보았다.
힘이 느껴졌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충분히 쉬었다.
이제 뒷마무리를 할 시간이었다.
* * *
이피로스 왕국 수도는 전화에 휩싸여 있었다.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성벽 위에는 마물들이 병사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성문도 반파되어 마물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마물을 피해 달아나고 있었지만, 도망치는 사람보다 마물에게 죽는 사람이 훨씬 많아 보였다.
막스 왕자, 아니 새로운 이프로스의 왕은 왕궁의 테라스에 서서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지친 목소리로 왕이 물었다.
“카를로스 왕국의 지원은 아직인가.”
“오늘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하지만 수도까지 오려면 적어도 이틀은 걸릴 것입니다.”
“하하하, 아버지를 폐위시키고, 형제를 밀어내고 얻은 자리가 결국 이렇게 될 줄이야. 이렇게 되면 죽은 제국 황제와 다를 바가 없잖은가.”
왕의 허탈한 웃음에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물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서 수도를 탈출하셔야 합니다.”
“여길 떠나서 어디로 가지?”
“카를로스 왕국에서 지원이 오고 있으니, 우선 그들과 합류를 하심이…….”
“나라도 잃고, 백성도 잃은 왕이 되라는 소리인가?”
이번에도 왕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밀려오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마물들이었다.
같은 인간이라면 협상을 하던지, 아니면 싸워서 되찾을 수도 있겠지만,
마물이 점령한 곳에 살아남은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왕국이었다. 핑곗거리는 충분했다.
“왕께서 국가이십니다. 왕가를 보전하셔야 합니다.”
신하의 말에 젊은 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야지. 어쨌거나 살아야지.”
그의 말에 신하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급하게 떠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성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포위를 당하고 말았다.
성벽을 넘은 수백 마리의 마물들이 길에서 왕의 마차를 포위한 것이다.
“폐하를 지켜라!”
“길을 뚫어!”
기사단장과 기사들이 소리를 치고.
“도망쳐!”
“난 살 거야!”
왕과 같이 움직이던 귀족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려 했다.
젊은 왕은 마차 안에서 허탈한 얼굴로 사람들이 달아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내가 그동안 쌓은 게 이런 모래성이었나…….”
도망치던 귀족들이 먼저 마물에게 먹혔고, 마물을 막던 기사들이 차례로 죽임을 당했다.
젊은 왕은 죽어가는 기사들을 보고 한 사람을 떠올렸다.
자신이 왕이 될 생각을 하게 만든 기사.
만날 때마다 성장해서, 왕이 된 뒤에도 올려다보게 만드는 기사.
“그가 있었으면 분명 달라졌겠지…….”
왕은 마차로 달려드는 마물을 보며 마지막으로 그 기사를 떠올렸고.
쿵.
그 기사는 마물을 박살 내며 왕 앞에 내려섰다.
“조금 늦었습니다.”
기사가 왕에게 말하는 사이, 하늘에는 죽은 마물이 맴돌고 있었다.
빛나는 검을 들고 젊은 왕 앞에 선 기사, 알렉스는 몰려드는 마물들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소환.”
그의 말과 함께 사방에 빛이 솟아올랐다.
소환된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발레아와 대공녀, 그리고, 우고 기사와 미겔.
샤를 백작의 모든 기사가 소환되었다.
전부 유물을 가진 기사들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기사들에 마물들이 혼란에 빠진 사이, 나는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서둘러! 모두 정리한다!”
내 지시와 함께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