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1화
제16편 전투가 끝난 뒤 (1)
덩그러니 굴러가는 마왕의 목.
정말 죽은 걸까?
나는 검을 든 채로 잘려 나간 마왕의 목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도, 마왕은 녹아내리지 않았다.
대신, 먼 하늘부터 붉은빛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땅의 색도 변해갔다.
그렇게 마물이 살던 세계가 다시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뒤로 누웠다.
쓰러지는 나를 누가 뒤에서 끌어안는 게 느껴졌다.
“발레아…….”
나는 내 아내를 불렀지만, 그녀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빨리 치료를! 서둘러요!”
그녀가 서두를 만했다.
머리가 잘려 나간 마왕보다 내가 나은 것은 당장 죽지 않았다는 정도였으니까.
더는 통증도 느껴지지 않고, 생각을 이어가기가 어려운 게 딱 죽기 직전의 느낌이었다.
설마, 죽는 걸까?
그럼, 마왕과 싸우던 그 시점으로 돌아가는 걸까?
하지만, 마물이 살던 세계는 이미 사라졌는데.
이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발레아가 나를 부축하는 순간, 영역은 모두 사라졌다. 붉은 하늘도 더 보이지 않았다.
구름이 흘러가는 푸른 하늘.
그리고, 메시지가 보였다.
<깃들었던 신의 힘이 사라집니다.>
머릿속에 스며들었던 ‘전쟁신’의 검술과 몸에 체화되어 있던 그의 심법이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죽은 신이 남긴 파편으로 싸운 것이었으니, 이제는 싸움이 끝나 사라지는 것일 터.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 갑자기 치유의 힘이 약해졌습니다.”
“설마, 신들이 떠난 건가요?”
“다시 피가 쏟아져요!”
“포션, 포션을 써요.”
하지만, 내 사랑하는 동료들은 당연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내 옆에 모여든 이들이 급해진 듯했다.
그들은 내 손에 신검을 쥐여주고, 약해진 치유 능력을 내게 퍼붓고, 내 입에 포션을 들이부었다.
그렇게 서둘렀지만, 세상은 조금씩 어두워졌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이렇게 떠드는 것을 보니,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 모양이었다.
다만, 나는 치료가 되지 않는 듯했다.
그래도 지금은 걱정되지 않았다.
신들이 떠났어도, 내 <사자 회귀> 능력은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여기서 죽어도 나는 죽는 게 아니었다.
다만, 지금 죽게 되면 어느 때로 돌아갈지 알 수 없었을 뿐이었다.
설마, 또 마왕과 싸우지는 않겠지?
그런 걱정을 하는 사이.
세상이 어두워졌다.
* * *
봉인지와 맞닿아 있는 제국 요새, 빌헬름 요새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얼마 전부터 갑자기 봉인지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마물들과의 싸움이 결국,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도대체 지원은 언제 오는 거야!”
성벽을 넘어서는 마물의 목을 베며 피투성이의 기사가 소리쳤다.
피투성이인 것은 그 기사만이 아니었다.
다른 기사들도, 모두 마물의 피를 뒤집어쓴 채로 검과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봉인지에서 마물이 쏟아진 지도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마물들이 쏟아져 나오기 전, 황도에서 마물에 대비하라는 연락을 받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 누구도 생각지 못했었다.
더구나, 요새의 지휘관들은 봉인지의 마물보다 정권을 장악한 2 황자의 행보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기에, 요새는 제대로 방비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는 지휘관마저 이렇게 성벽에 올라 검을 휘둘러야 했다.
“여기서 죽는 걸까?”
아직도 계속 몰려드는 마물들을 보며, 지친 기사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죽지 않을 걸세.”
그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같이 싸우던 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잘 아는 목소리였다.
그가 존경하는 이의 목소리.
기사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이 커졌다.
그의 뒤에는 언제 왔는지, 사람들이 와 있었다.
귀족으로 보이는 이와 어두워 보이는 여성, 그리고, 노인과 그도 잘 아는 기사. 투레 백작이 서 있었다.
“그리고, 지원도 와 있네. 바로 여기에.”
“설마…….”
“끌끌, 설마는 무슨. 이 숫자만 와놓고 지원이라고 하면 뻔한 거잖아.”
기사의 말에 노인이 혀를 찼고.
어두워 보이는 여성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가 손에 마나를 피워올렸고.
크아아앙.
성벽을 오르던 마물 전부가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성벽에서 떨어진 마물 중에는 죽은 마물은 없었지만, 황당하게도 다친 마물이 속출했다.
그리고, 귀족의 손에서 만들어진 거대한 불덩어리는 마물이 모여있는 성벽 앞 공터를 불지옥으로 만들었다.
마물들이 혼란에 빠지자, 이번에는 노인이 움직였다.
노인은 훌쩍 성벽을 뛰어내렸고, 땅에 내려선 뒤에는 마물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마물들은 노인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옆의 마물이 죽고, 자신이 죽으면서도 왜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
“세상에……. 전부 검호분들이시군요.”
기사가 존경하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투레 백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존경이라니.
투레 백작은 그 시선을 마주보기 어려웠다.
“다들 훌륭한 검호들이지. 나를 빼고.”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기사의 말에 투레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마물 왕을 죽이기 위한 출전에서 지키고 있던 황제를 죽인 죄인이었다.
정작 죽이려 했던 마물 왕은 다른 사람이 잡아 버렸고, 그는 하늘에서 쏟아진 검기에 황제를 잃고 말았다.
검기를 쏟아내는 하늘을 나는 마물이라니.
손쓸 수 없었던 상황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는 황제를 죽게 만든 죄인일 수밖에 없었다.
죄를 청하고자, 황도로 돌아가니, 죽었다는 2 황자가 황도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2 황자는 죄를 청하는 그에게 검호들과 함께 이곳 요새로 가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미리 검호들을 모아 놓은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덕분에 요새를 구할 수 있을 듯했다.
노 기사의 표정을 본 젊은 기사는 말을 잇지 못했고, 대신 다른 기사가 그에게 물었다.
“혹시 마물들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아십니까? 봉인지에 묶여 있던 마물들이 모두 풀려나오는 것 같습니다만…….”
기사의 물음에 투레 백작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봉인지에 마물들을 묶어놓았던 마왕이 죽었기 때문이라고 하셨긴 했는데…….”
“정말입니까! 마왕이 죽었다고요?”
백작의 말에 모두 놀랐다.
“확실한 것은 아니네.”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들은 자신은 물론이고, 말을 꺼낸 2 황자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으니까.
‘도대체 황자님은 그 이야기를 누구에게서 들으신 거지?’
요새에 도착할 때까지도 믿을 수 없었던 말이었지만, 지금 봉인지에서 중구난방으로 쏟아져나오는 마물들을 보니,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투레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대전쟁 때 용사들이 힘을 모았어도 죽이지 못한 마왕이었다.
지금에 와서 누가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투레 백작은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버리고, 성벽에서 뛰어내렸다.
자신은 황제를 보호하지 못한 죄인.
용서를 받기 위해서도 최선을 다해야 했다.
투레 백작의 검이 마물들의 몸을 갈랐다.
* * *
같은 시각.
카를로스 왕국의 황성 주 회의실에는 대륙 전도가 펼쳐진 채로 여왕과 귀족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지도에는 마물이 그려진 말판들이 여러 곳에 놓여 있었다.
봉인지는 물론, 북부 산맥과 다른 나라들에도.
귀족들은 그 말판들을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들과 다르게 질문을 하는 여왕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마물들의 위치는 그대로인가요?”
여왕의 물음에 장교가 일어나 지도를 가리켰다.
“현재, 마물들은 이피로스 왕국의 국경을 넘어 동부 영지들을 유린하고 있습니다. 곧 이피로스 왕국의 수도도 마물들이 보이기 시작할 듯합니다.”
“벌써 이피로스의 수도까지 왔다고?”
“도대체 얼마나 쏟아져 나왔길래…….”
“이건 웨이브 수준이 아니잖습니까.”
장교의 말에 귀족들이 놀라 소란을 일으켰지만, 여왕은 평범한 어조로 계속 질문을 이어갔다.
“수도 근처까지 왔다라……. 이 정도면 이피로스 왕실에서 지원 요청이 왔을 텐데요.”
여왕의 물음에 장교가 고개를 숙였다.
“여왕님의 말씀대로 몇 시간 전에 전서구 편으로 지원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쯧쯧, 이제야 지원 요청을 하다니.”
“어차피 다른 나라잖습니까. 그냥 무시하는 게 어떨는지.”
“그래도 요청이 왔을 때 생색을 내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만.”
몇몇 귀족들이 귓속말을 나누는 게 여왕의 귀에 들려왔다.
분명, 유물이나, 마나로 방음벽을 세운 뒤에 나눈 귓속말이었지만, 여왕의 귀에는 잘만 들렸다.
그날의 싸움 이후에 생긴 능력이었다.
물론, 싸움이 끝나고, 몸에 깃들었던 신의 힘은 사라졌다.
이제는 하늘을 가를 것 같은 검술과 심법도 느껴지지 않았고, 몸에 가득했던 마나도 원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기사의 검’과 하나 되었던 경험은 아직 남아 있었다.
여왕은 왕가의 보물인 ‘기사의 검’을 제대로 쓸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이 능력이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능력.
군대를 강화하는 ‘기사의 검’의 다른 능력에 비하면 별것 아닌 능력이었지만, 지금같이 정치를 할 때는 정말 도움이 되는 능력이었다.
‘그래봤자, 정말 듣고 싶은 사람의 생각은 들을 수 없는걸.’
머릿속을 스쳐 가는 생각에 여왕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질문을 이어갔다.
“북부 산맥은 괜찮나요?”
“다행히 여왕님께서 미리 준비해주신 덕분에, 소로카 요새와 북부 산맥에 맞닿아 있는 영지들이 지금까지는 잘 막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여왕은 지시를 내렸다.
“좋아요. 이피로스 왕실의 요청이 왔으니 준비해 놓은 병력을 움직이죠.”
여왕의 말에 조금 전에 속삭였던 귀족 중 한 명이 말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하지만, 그는 서슬 퍼런 여왕의 말에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마물들이 왕국 안으로 들어오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내가 모든 반발을 무릅쓰고 병력을 키운 것은 우리 왕국과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마물과의 싸움은 왕국 밖에서 끝낼 겁니다.”
“알겠습니다.”
다른 귀족들도 여왕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그 뒤로 이동할 병력을 확인하고 배치하는 사이, 한 귀족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다른 영지들은 전부 병력을 보냈는데, 샤를 백작의 영지는 아직 대답이 없습니다.”
그의 말에 소란스러웠던 회의실이 고요해졌다.
모두 빠르게 눈을 움직였고, 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꺼낸 귀족을 바라보았다.
그 귀족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계속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여왕님의 권위가 닿지 않는 듯하니, 직접 꾸짖으심이 어떠하신지…….”
귀족의 말에 여왕은 그녀답지 않게 피식 웃었다.
환하게 웃으며 귀족에게 말했다.
“좋아요. 당신이 직접 샤를 영지를 찾아가 병력을 내놓으라고 해요. 당신이 그 말을 꺼냈다고 백작 부인에게 직접 말하고. 물론 나는 반대했어요.”
여왕은 죽은 자를 보는 것처럼 귀족을 본 뒤에 다시 회의를 진행했다.
그 귀족은 멍하니 서서 여왕의 말을 되뇄다. 그는 도대체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