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9화
제14편 영역 (2)
붉은 하늘과 붉은 호수.
눈에 보이는 광경은 마왕의 기억에서 보던 마물의 세상과 다를 바가 없었다.
호수 중앙에 홀로 서 있는 반파된 탑이 뼈로 만들어져 있었다면 이상한 점을 전혀 느끼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이게 무슨…….”
마왕 아니 인간이 만든 첫 용사는 바뀐 세상을 보며 말을 잊지 못했다.
나도 놀랐다.
신들이 만든 탑에게 발레아가 인정을 받은 것을 보고 그녀의 영역으로 마물의 세상을 만들어 달라고 했을 뿐이었다.
그 영역을 만들 때 도움을 주고자 조아나에게 말해, 계약으로 나와 마왕을 계약자로 등록한 것이었고.
그런데 이렇게 달라진 세상이라니.
거기다 변한 세상 이상으로 오염된 마나가 내 피부를 태우고 있었다.
몸속의 마나가 반발을 일으켜서 공기 중의 마나를 막아내고 있었지만, 전부 막아낼 수는 없었다.
몸 주위에 스파크가 튀고 마나가 지나가는 길에 따라 피부가 조금씩 검붉게 변해갔다.
이렇게 수년, 수십 년이 지나면 앞에 서 있는 마왕처럼 온몸에 가득한 흉이 새겨질 수밖에 없을 터였다.
마왕은 나체로 내 앞에 서 있었지만, 온몸에 문신한 것처럼 흉이 져 있는 그는 나체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놀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다니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게이트를 넘은 것도 아니고……. 이 세상에 다른 세상을 구현해 낼 수 있다니. 이건 정말 생각도 못 한 일이군.”
스파크가 튀는 자신의 몸을 보던 마왕이 입을 열었다.
“이 세계를 불러온 것을 보면, 알고 있었나?”
마왕이 무엇을 묻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마왕에게 대답하는 대신 내가 쥐고 있는 검의 정령에게 물었다.
“너는 마물의 세계, 오염된 마나 안에서는 마왕이 부활을 못 한다는 것을 몰랐어?”
[네? 정말인가요? 하지만, 마왕은 그쪽 세상에서는 한 번도 죽은 적이 없었던걸요.]
하긴, 마왕의 회귀 능력을 알지 못했다면 마왕이 그동안 죽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건 내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정령의 대답에 자그마한 의심을 모두 벗어던질 수 있었다.
거기다 정령에게 한 질문은 마왕의 질문에 답이 되었을 터였다.
“큭큭큭. 정말 대단해. 어떻게 이런 걸 알고 있는 거지? 제국 놈들도, 나를 봉인했던 놈도 알지 못했는데.”
의심은 하고 있었지만, 용사들의 기억이 아니었으면 나도 확신하지 못했을 터였다.
“설마, 전에 나와 싸웠을 때 내가 말하기라도 한 건가? 하는 꼴을 보니 나와 처음 싸운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마왕도 내가 마왕을 처음 만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마왕의 공격마다 매번 제대로 수를 읽어 냈었으니까.
처음 마왕을 만났다면 이렇게 여러 번 죽일 수 있을 리 없었다.
마왕은 내 대답을 듣지 않고,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정말 대단한 능력이군. 세계와 마나까지 바꾸고 만들어낼 수 있는 강대한 영역 능력자로 마물들의 세상을 영역으로 구축하고, 계약이라는 것으로 너와 나 두 사람에게는 현실이 되어버리게 만든 것인가.”
마왕은 발레아가 펼친 영역과 조아나가 외친 계약을 듣고 마물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계약이라는 능력이 있긴 했지만, 이런 대단한 능력은 아니었는데. 하긴, 다른 세상을 영역으로 만드는 것은 더 어이없는 일이니까.”
주변을 보며 감탄하던 마왕이 나를 보고 피식 웃었다.
“나를 죽이기 위해 저쪽 세상을 만들어낸 것은 정말 대단했지만, 이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어.”
마왕은 바닥에 가득한 마물 시체를 가리켰다.
“내 부활 능력이 막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이 마나 안에서는 부활도, 치료도 불가능하다는 소리야. 이 오염된 마나 속에서는 부활은커녕 작은 상처 회복도 어렵다는 소리지.”
그럴 거로 생각했었다.
이 세상의 모든 능력은 마나로 이루어지는 것.
마나를 이용한 부활이 불가능하면, 상처치유도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왕은 나를 가리켰다.
“더 웃긴 점도 많지만, 너에게는 더 치명적인 문제가 있지. 지금쯤 떠 있을걸? 그 쓰레기 같은 문구 말이야.”
<다른 세상에 진입했습니다. 과거 저장시점이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시점에 ‘저장시점’이 설정됩니다.>
“그 문구를 보고 얼마나 황당하던지. 다른 세상으로 날려 보내졌을 때도 ‘사자 회귀’만 쓰면 다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단 말이지.”
회한이 깃든 얼굴로 중얼거리던 마왕은 나를 보고 씩 웃었다.
“이제 너도 마찬가지야. 이 안에서 영원히 죽고 살아나면서 나를 죽일 방법을 찾아봐.”
마왕은 자신이 있어 보였다.
아무리 내가 시간을 반복해도 분명 자신이 이기리라는 자신이.
“아니면 그전에 이 영역을 펼친 능력자가 힘이 떨어져서 죽을 테니까.”
역시, 마왕도 알고 있었다.
이 안에서 시간을 반복한다고 해도 밖의 시간마저 반복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이 세상은 발레아의 영역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세상이었다.
이 속에서 시간이 반복된다고 해도, 밖의 시간은 그냥 흐를 가능성이 컸다.
그 증거가 아직 눈앞에 보이는 저 메시지 창이었다.
과거 저장 시점과 강제로 분리되어버린.
문제는 시간이 지나 마나가 부족해져도 발레아가 임의로 영역을 거둬들일 수 없었다.
이미 조아나가 영역을 기준으로 계약을 발동시켰으니까.
이 마물 세상을 사라지게 하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계약을 파기시키는 것.
그건 계약 당사자가 죽는 것이었다.
당사자들은 나와 마왕. 그리고 영역을 만든 발레아였다.
결국, 시간 싸움이었다.
마왕이 자신 있어 한 게 당연했다.
발레아의 마나가 떨어지기 전에 나는 마왕을 죽여야 했고, 마왕은 그동안 버티기만 하면 됐다.
“그리고, 이 쓰레기 같은 곳의 마나는 몸 안으로 끌어들일 방법이 없어. 몸 안에 있는 마나 만으로 살아남을 방법도 없고, 내가 오염된 마나를 써먹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데. 너도 이제 그 지옥 같은 경험을 해봐.”
말과 함께 마왕이 땅을 박찼다.
역시나, 기습이었다.
온몸에 피어오르는 스파크를 밀어내며 쏘아져 오는 마왕.
거대한 번개가 밀려오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마왕의 말대로라면 함부로 이곳에서는 마나를 쓸 수 없었다.
모든 귀족, 모든 기사가 쓰는 마나는 결국, 외부의 마나를 쓰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외부의 마나를 직접 사용하는 귀족들과 달리 기사들은 몸속의 마나를 사용했지만, 그 기사들도 몸속에 있는 마나가 소모되면 마나 심법으로 외부의 마나를 끌어들여서 다시 채웠다.
그건 마물도 마찬가지였다.
오염된 마나가 넘실거리는 봉인지를 정복하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었고, 다른 곳에서 인류가 버텨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오염되지 않은 마나로 마물들의 세상을 정복해서 마물의 왕이 되다니.
어쨌거나 첫 영웅, 마왕은 대단한 능력자였다.
지금도 무슨 방법인지 모르겠지만, 마왕은 오염된 마나를 끌어들여 자신의 마나를 채우고 있었다.
나는 저런 방법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따로 마나를 채울 방법이 있었으니까.
[마나를 끝까지 주지 않으면 그곳에서 죽어버릴 줄 알았어요. 알아서 오염된 마나를 쓸 방법을 알아낼 줄은 생각도 못 했다니까요. 거기다, 그걸 마음에 품고 돌아와서는 내 몸을 박살 내서 강제로 마나를 빼낼 줄이야. 정말 속도 좁다니까요.]
정령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검에 마나를 주입했다.
손에서 빠져나간 마나가 검날에 머물며 빛을 뿌렸고 검에서 다시 마나가 흘러나와 내 몸에 마나를 채웠다.
무한하게 마나를 뿜어내는 이 검이 있다면, 이 안에서도 나는 충분히 마왕과 싸울 수 있었다.
쿠앙!
마왕의 손과 검이 충돌했다.
충격파가 핏빛 호수를 가르고 마물 사체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큭.
입에서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왕의 공격에 내 몸이 쭉 밀려났으니까.
몇 번이나 되살아난 마왕은 전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나도 신의 힘을 받았지만, 마왕은 그보다 더 강해져 있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왕을 마지막으로 죽였을 때는 동료들과 함께 싸우고도 겨우 이겼으니까.
지금의 마왕은 나 혼자서는 가당치 않을 상대였다.
‘손아귀가 찢어졌나.’
검을 쥔 손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전 같았으면 바로 멎었을 상처.
마왕의 말대로 이곳에서는 치료가 안 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각오한 일이었다.
더구나 신의 힘을 얻기 전에는 치료도 잘되지 않았었고.
따지고 보면 지금은 과거 마왕을 만났을 때와 별 차이 없었다.
나는 다시 마왕에게 달려갔다.
쾅! 쾅! 쾅!
나는 마왕에게 검을 휘둘렀다.
그동안 쌓아온 수많은 기술과 경험. 그리고 마왕과 싸워온 기억을 잊지 않은 채로 계속 마왕에게 공격했다.
‘전쟁신의 검’은 단단했고, 검은 내게 계속 마나를 공급해주었다.
신이 내려준 힘, 달라진 육체는 그동안 힘들어했던 기술들을 제대로 쓰게 해주었다.
검을 휘두르고 단검을 던지고 신검을 꺼내 내부 충격을 주었다.
마왕이 펼친 거대한 검기를 피해 던져놓은 단검으로 내 몸을 전송시켰다.
한참을 싸우다 정신을 차리니 내 몸이 피투성이가 된 것을 알 수 있었다.
귀 한쪽이 날아가고 반대편 손가락도 반이 잘렸다.
옆구리는 크게 갈라져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고 자잘한 상처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무아지경에서 빠져나와 그런가,
몸이 엄청 아팠다.
전과 달랐다.
치료가 안 되니 고통은 계속 이어졌다.
상처 난 몸도, 오염된 마나에 공격당하는 피부도.
“전하고 다르지? 네가 아는 고통이 아닐 거야. 오염된 마나 속에서 당한 상처는 몇 배나 더 고통스러우니까.”
마왕은 비웃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마왕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나 정도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여러 군데 상처가 나 있었다.
피륙에 머문 상처였지만, 마왕은 나와 달리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왕이 또 스위치를 켠 모양이네요. 마물의 세계에 있을 때 몸이 타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마왕은 통증에 관련된 신경을 전부 막아버렸었어요.]
생각해보면 마왕을 죽이거나 상처를 입혔을 때 나만큼 고통스러워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
왜 그런가 했더니 마왕은 필요에 따라 고통을 차단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왕이나 나 같은 사람이라면 꼭 필요한 것이겠지만, 나는 마왕과 달리 한 번도 고통을 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반쯤 맛이 가서 무한히 회귀를 반복했던 때까지.
그 고통들은 내가 감당해야 할 고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을 잊지 않고, 인간성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
지금도 그 생각은 변치 않았다.
나와 다른 결정을 내린 마왕을 보니 내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래도 역시 실력이 좋군. 아무래도 팔다리를 자르고 여유롭게 시간을 버는 것은 어렵겠어.”
마왕의 말에 나는 눈을 찡그렸다.
마왕은 제대로 안 싸울 모양이었다.
그러면 곤란했다.
실력이 밀리더라도 여기서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나는 슬슬 물러나는 마왕을 향해 입을 열었다.
“고자가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저러니 여자들이 놀리지.”
내가 가운데를 내려다보며 하는 말에 마왕이 우뚝 멈추었다.
“……뭐라고?”
마왕이 주먹을 움켜쥐고 이를 갈았다.
역시, 마왕도 남자였다.
거기다, 마나 충돌로 문제가 생긴 것처럼 보이는 마왕에게는 매번 잘 통하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