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8화
제13편 영역 (1)
싸움의 시작은 우리나 마왕이 아니었다.
우리를 향해 달려오던 마물들이 먼저 언데드들에게 달려든 것이다.
아쉽게도 죽은 지 오래되어서 뼈만 남은 언데드들은 내가 생각한 만큼 힘을 쓰지 못했다.
언데드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몰려오는 마물들에 휩쓸려버린 것이었다.
뼈다귀들이 사방으로 터져나가고, 엔데드들은 마물들의 발에 짓이겨졌다.
마물의 앞을 가로막은 언데드들은 그렇게 한순간에 전멸했지만, 다행히 아직, 그 뒤에도 몸을 일으키는 언데드들은 많았다.
그런데, 지금 몸을 일으키는 언데드들은 전과 달리, 마물로 만들어진 언데드들은 보이지 않았다.
전부 인간, 대전쟁 때 죽은 인간의 뼈들만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 언데드들은 조금 전에 박살 난 언데드와 달랐다.
낡은 창과 방패를 든 언데드들은 서로 몸을 맞대고, 진영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인간의 군대처럼.
마물 왕이 지휘했던 마물 병단과도 다른 모습이었다.
언데드들은 마치 살아생전의 병사들이 다시 무기를 들고, 전진하는 것 같았다.
아니, 살아 있을 때의 병사들이 다시 움직이는 게 맞았다.
‘죽음의 신’의 용사가 이끌던 죽음의 군대는 원래 이런 모습이었으니까.
죽은 이들의 영혼을 강제로 불러들여 육체에 부여해 싸우게 만드는 용사의 능력.
살아서도 적과 싸우고, 죽어서도 싸움을 이어가는,
이것이 진정한 ‘죽음의 군대’였다.
철컥! 철컥!
마물들에게 죽은 뒤, 수백 년간 이 땅에 매여있던 혼령들이 뼈만 남은 몸을 일으켜 마물과 싸우기 시작했다.
크아아앙!
괴성을 지르는 마물의 몸에 창을 내지르고, 전차같이 들이닥치는 돌 거인을 방패와 몸으로 막아 냈다.
언데드 군인 하나가 부서지면, 또 다른 언데드가 일어나서 빈자리를 채우고, 방패가 부서지면 몸으로 막았다.
그렇게 언데드가 단단한 벽을 세우게 되니, 거대한 물결을 이루던 마물 군단이 점점 속도가 줄어들었고, 결국 멈춰 섰다.
그리고, 언데드 군단이 마물들을 막는 동안, 우리는 마왕과 싸우기 시작했다.
처음 능력을 사용한 것은 레스티였다.
“셀린이시여 모두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그가 펼치자, 아름다운 달빛이 우리 몸에 가득 내려앉았다.
셀린의 마지막 사제는 처음으로 우리 모두에게 신의 권능을 내려준 것이다.
그 권능은 힘 증가, 체력 향상, 속도 증강 같은 수치나 종류가 나누어진 버프가 아니었다.
그런 모든 버프가 함께 적용되는 것과 함께 신이 나를 품 안에서 보호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권능. 진정한 신의 지원이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지시를 내리며, 마왕에게 달려갔다.
달려가는 내 옆에는 여왕이 같이 달리고 있었다.
갑옷을 입고 있어서 몰랐는데, 이렇게 같이 움직이니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이름도 남아 있지 않은 신의 성물, 깨어난 ‘기사의 검’의 용사로 선택받은 여왕은 신의 선택을 받은 모든 이들 중에서 제일 많이 변해 있었다.
정신적으로는 어른이겠지만, 아직은 성장기였던 몸이 완연한 어른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기사의 검’을 쓰는 신의 용사이니, 그에 알맞게 육체도 변화된 걸까.
아니면, 그녀의 소망이 이루어진 걸까.
어찌 되었건 지금 그녀의 육체와 마나는 모두 나와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초대 왕보다 더 나아 보일 정도였다.
나와 여왕은 한걸음에 마왕의 앞에 도달했다.
마왕도 가만히 서서 우리가 다가가는 것을 지켜보지는 않았다.
마왕이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켰고, 그 손가락에는 하얀빛이 서렸다.
마왕을 볼 때마다 보았던 저 빛.
거대한 성벽을 부수고, 일대를 날려버리는 무서운 공격이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손가락에서 빛이 폭발했다.
콰아아앙!
세상에 하얀빛이 가득했고, 거대한 폭음과 함께 강대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촤아아악.
시체와 돌들이 날아가고, 마왕 뒤의 호수도 바닥이 보일 정도로 사방으로 흩날렸다.
마왕도 주춤하고 물러설 정도의 강력한 충격파였다.
하지만, 나는 그 폭발 안에서도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내 쪽으로는 그 충격파가 강하게 밀려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충격파가 문제는 아니었지만, 성벽을 무너뜨린 마왕의 공격은 내게 전혀 피해를 주지 못했다.
대공녀가 내게 걸어준 방어막이 마왕의 공격을 막아 냈기 때문이었다.
전보다 강해진 공격에 방어막도 바로 사라져 버렸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나는 솟아오르는 먼지를 뚫고, 마왕의 바로 앞까지 나아갔다.
나는 검을 뒤로 늘인 채로 몸을 낮췄고, 놀란 마왕의 눈을 보며 검을 휘둘렀다.
서걱.
손가락을 내밀던 팔이 검에 잘려 나갔다.
마왕의 팔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첫 공격에 팔 하나. 좋은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마왕의 표정이 변했다.
마왕은 잔인하게 미소를 지었고, 어느새 다가온 반대편 손이 내 머리를 잡고 있었다.
“잡았다.”
내가 대공녀의 방어막을 믿고 공격한 것처럼, 마왕도 함정을 만들어 놓았었다.
팔 하나를 희생하는 함정.
마왕답지 않은 연기까지 펼친 훌륭한 함정이었다.
순식간에 회복할 수 있고, 고통을 무시할 수 있는 나와 마왕만이 할 수 있는 함정. 생각보다 마왕은 나와 닮은 점이 많았다.
“방심했군.”
마왕의 말과 함께 머릿속으로 마왕의 마나가 쏟아져 들어왔다.
신의 힘을 받은 나보다 더 강대한 마나.
그 마나는 머리를 보호하고 있는 내 마나를 뚫고,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마왕은 나를 세뇌할 모양이었다.
나는 마왕의 마나가 머릿속에 밀려드는 상황에서도 입을 열었다.
“방심하지 않았어.”
내 말에 마왕의 눈이 커졌다.
자신의 마나가 머릿속을 채웠는데 말을 하고 있으니, 놀랄 만도 했다.
하지만,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세뇌되지 않을 테니까.
사실, 연기를 보면 마왕과 나는 비슷한 점이 꽤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게 있었다.
마왕에게 없는 그것.
나에게는 동료가 있었다.
서걱.
내 머리에 올려진 마왕의 남은 팔이 다시 잘려 나갔다.
내가 자른 게 아니었다.
내 옆을 지나가는 여왕이, 은은하게 빛나는 ‘기사의 검’이 마왕의 팔을 자른 것이었다.
팔이 잘려 나가는 순간, 나는 다시 마왕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마왕의 가슴에서 피가 튀어 올랐다.
나는 힐긋 옆을 쳐다보았다.
마왕의 팔을 자른 여왕은 벌써 멀찌감치 물러서 있었다.
자신의 실력을 확실하게 인지한 ‘기사의 검’의 주인다웠다.
그녀가 있는데 내가 세뇌를 당할 리가 없었다.
여왕은 항상 올곧은 정신을 지켜 주는 ‘기사의 검’을 든 신의 용사였다.
그런 여왕이 옆에 있는데 정신 공격에 당할 리가 없었다.
양팔이 잘리고, 가슴이 벌어져서 피가 쏟아지는 마왕.
저대로 묶어둘 수 있다면 편했을 텐데.
하지만, 마왕은 나와 달리 자살할 수 있었다.
“내가 당한 건가. 정말 재미있군.”
마왕은 나를 보며 일그러진 미소를 지은 뒤, 자신의 몸을 터트려 버렸다.
퍼퍽.
쏟아지는 살점과 피.
그것들은 모두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내 지시에 잘 따라주고 있었다.
대공녀는 우리 각자에게 방어막을 씌워주고 있었고, 레스티는 계속 신의 은총을 내려주려 했고, 조아나도 잘 먹히지는 않았지만, 마왕의 마나를 묶어두려 했다.
나는 모두를 바라보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전보다 빨리, 마왕이 부활했기 때문이었다.
“이 신의 노예들이!”
부활한 마왕은 분노에 찬 고함을 지르며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우리도 달려드는 마왕을 상대로 계속 싸워나갔다.
신의 도움을 받고 최선을 다해, 마왕의 공격을 막고, 마왕을 죽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신의 용사가 된 만큼 처음에는 쉽게 마왕을 쓰러뜨렸지만, 마왕을 죽이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점점 더 어려워졌다.
마왕은 점점 더 강해졌고, 우리는 점점 지쳐갔기 때문이었다.
“신의 용사가 아니라, 죽은 신들의 용사였군. 파편 쪼가리를 가지고 용사 행세를 하다니. 결국, 네놈들도 짝퉁 용사 놈들과 다를 바가 없어.”
마왕은 죽어 가면서 계속 우리를 비웃었다.
그리고, 결국, 죽이기 어려워지게 되는 시점이 찾아왔다.
마왕이 죽은 뒤에도 마왕의 마나가 탑을 넘어 하늘 가득 넘실거렸다.
마물을 막던 언데드들은 이제 모두 흙으로 돌아갔다.
언데드들을 통솔하던 해골의 눈은 빛을 잃고, 바닥에 흩어졌고, 마물들은 우리를 포위한 채로 으르렁거렸다.
방어막을 펼치던 대공녀는 더 이상 방어막을 만들 수 없게 되었고, 여왕도 레스티도 바닥에 쓰러졌다.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이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반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부활한 마왕은 더 강해져 있었다.
마왕이 우리를 보고 입을 벌리고 웃었다.
“크하하하, 그래도 신이 내려준 용사는 맞는 모양이야. 벌써 몇 번을 죽는 건지.”
지치고 쓰러진 우리를 보고, 마왕이 비웃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도 누워 있는 동료들의 표정도 아직 어두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마왕의 저 말은 정말 마왕답지 않았다.
분명, 마왕은 부활할 때마다 성격이 점점 더 이상해지고 있었다.
다른 이유가 있을 리가 없었다.
마왕은 부활에 대한 내성이 부족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부활한 경험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복되는 삶 속에서 내가 여러 번 마왕을 죽이긴 했지만, 그건 이미 없어진 일이었다.
지금 마왕은 여기서 부활하기 전에 딱 두 번 부활해봤다고 내게 말했었다.
둘 다 수백 년 전, 대전쟁 때 이곳, 이 대륙에서 부활이었다.
물론, 제국의 손에 실험을 당했을 때도 부활한 적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마왕은 마물들의 세상에서 부활해본 적이 있었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마물들의 세상에 도착했을 때는 ‘사자 회귀’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나중에는 마물들을 모두 휘어잡았으니, 부활 능력을 쓸 일이 없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활 능력이 있는데 ‘사자 회귀’ 능력을 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부활 능력이라고 말하지만, 마왕은 진정한 죽음에서 부활하는 것은 아니었다.
육체가 파괴된 뒤에 복귀된 것이었을 뿐, 핏물이 되어 사라진 뒤에도 마왕의 능력과 마나가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죽어서 과거로 가기 전에 마왕은 먼저 부활을 해야 했었다.
하지만, 저쪽 세상에 있을 때, 마왕은 부활 대신 죽어서 회귀를 했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건, 마물들의 세상에서는 부활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검의 기억에서 본 용사도 같은 이유로 부활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세계를 오염시켜서 마물의 세계처럼 만들어가는 마왕을 만나 그 용사는 진정으로 죽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나와 내 동료들은 그 마왕처럼 이 세상을 오염시킬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진실로 보여질 정도로 흉내는 낼 수 있었다.
[많이 기다렸죠. 준비가 끝났어요.]
지친 발레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싸우는 동안 발레아는 계속 준비를 해왔던 것이다.
발레아에 이어 조아나의 음성이 들려왔다.
[시작할까요?]
멀찌감치 물러서 있던 조아나가 관에 손을 올리고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해.”
화아아악.
탑을 중심으로 거대한 영역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호수를 넘어 마왕과 우리를 포함한 거대한 영역.
이어서, 영역 안의 하늘이 변해가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이상한 하늘.
바닥도, 호수도 전부 변해갔다.
마지막으로 공기 속에 있는 마나 마저 달라지기 시작했다.
살을 태우는 듯한 마나.
그 마나는 마물들의 마나와 똑같이 느껴졌다.
발레아의 영역은 이 자리에 마물들의 세상을 구현한 것이었다.
그리고, 조아나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 교단의 대주교가 마나를 걸고 이 자리에서 계약합니다. 이 마물의 영역은 마왕과 샤를 백작에게 진실된 세상이라는 것을!”
그 순간, 발레아가 펼친 영역이 세상을 뒤덮었다.
마물들이 사라지고, 동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봉인지의 숲과 풀도 보이지 않고, 세상은 모두 처음 보는 붉은 세상으로 변해버렸다.
마왕과 내게는 이 순간, 이 세상은 마물들이 사는 세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