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7화
제12편 신들의 유언
‘전쟁신의 검’에서 갑자기 빛이 뿜어져 나오고, 탑이 빛을 뿜어내는 순간, 내가 보던 세상이 어두워졌다.
아프지 않으니 죽은 것은 아닐 테고, 설마 기억을 보게 되는 걸까?
다시 밝아지는 세상,
그리고, 눈앞에 흘러가는 장면들.
기억을 보리라는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건 사람의 기억이 아니었다.
전에 보던 마왕의 기억이 아닌, 이 검, 성물의 기억이었다.
역사 이전, 신이 전해 주었다는 성물의 기억은 이 대륙의 역사와 다를 바 없었다.
수많은 기억이 눈앞을 스쳐 갔다.
용사라고 불리는 이가 검을 받고, 마물과 싸우고, 승리하는 기억.
파괴되는 성전 안에서 피난민 소년이 우연히 검을 잡고 마물과 싸워나가다가, 결국 마왕에게 죽는 기억.
마왕을 쓰러뜨리고, 돌아온 용사가 왕의 명령으로 죽게 된 기억까지.
용사로 불리는 이들의 기억이 계속 눈앞을 스쳐 지나간 것이다.
그리고, 제국의 손에 연구되고, 방치되기까지.
나는 이 검이 지내 온 역사를 전부 보게 되었다.
나는 이 세상이 어떻게 흘러왔는지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되었다.
검의 기억으로 본 이 세상의 역사는 마물, 마왕과 떼놓을 수 없었다.
검의 기억이 시작된 수천 년 전부터, 마물이라고 불리는 다른 세상의 생명체들이 일정한 시간마다 이 세상으로 넘어왔다.
일정 시간마다 차원이 가까워져서 넘어오기 쉬워진 것인지, 아니면 그때마다 마물의 왕이 나타나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오염된 마나를 가진 다른 세상의 생명체들은 이 세계로 넘어온 뒤에 왕의 명령에 따라 매번 인류를 멸망시키려 했다.
그때마다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 마물에 대항했다.
서로 싸우던 왕국이 손을 잡고, 증오하던 이들이 힘을 모았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신께 기도했다.
신은 인간의 기도에 응답했다.
신은 인간들을 위해 용사들을 선택했고, 그들에게 신들이 내려 준 성물을 들게 했다.
인간들이 마물과 싸우는 동안, 신이 선택한 용사들은 마왕을 매번 쓰러뜨렸다.
어려움도 있고, 용사들이 죽기도 했지만, 용사들은 신과 인간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렇게 인간들과 용사들은 매번 마물과 마왕을 막아 냈지만, 매번 쉽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마물들의 공격에 인류는 매번 큰 피해를 입었다.
왕국이 망하고, 문명이 무너지고, 인류가 멸망할 뻔하기도 했다.
그렇게 엄청난 피해가 이어지자, 용사 한 명이 다시 나라를 세우며, 한 가지 결심을 했다.
매번 신의 힘을 빌리지 말고, 그 힘을 인간이 구현해서 마물을 막아 내기로.
그리고, 그 용사가 세운 나라는 대제국이 되었고, 용사가 품은 뜻은 제국의 국호가 되었다.
제국은 성물을 연구하고, 사제와 신관을 해부하고, 다른 용사의 관을 파헤쳤다.
그렇게 해서 결국, 제국은 성물의 힘을 가진 물건, 유물을 만들어 냈고, 마지막에 가서는 용사의 힘도 재현해 냈다.
그렇게 만든 첫 용사가 바로 마왕이었다.
문제는 처음 만들어 낸 용사는 제국이 제어하기에는 너무 강했다.
거기다 죽지도 않았고.
제국은 제어할 수 없는 첫 용사를 그동안 연구해온 마물들 세계로 통하는 게이트로 날려 보냈고.
그 뒤의 용사들은 제국이 제어할 수 있도록 능력을 줄여 버렸다.
결국, 양산형 용사들을 만들게 된 것이다.
그 양산형 용사들은 신의 용사들에 비해 많이 약해졌지만,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능력을 유전자에 심어 후대에도 전달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렇게 검이 흘러온 역사가 마지막에 이르자, 다시 세상이 어두워졌다.
이제 다시 기억에서 벗어날 모양이었다.
기억에서 본 내용은 정말 대단한 이야기였지만, 아쉽게도 지금 도움이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나올 것 같았는데, 이런 기억뿐이라니.
검의 정령이 한 말은 도대체 뭐였던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세상이 밝아지기를 기다렸지만, 어두워진 세상은 밝아지지 않았다.
대신, 어두워진 세상 안에서 작은 음성, 아니 이미지가 보였다.
작지만, 강대한. 흐릿하지만, 숨이 막힐 정도로 뚜렷한 의미.
그런 이미지가 나를 덮쳐온 것이다.
[인간들은 우리를 배반했지만, 나는, 우리는 인간을 포기하지 않았다.]
어두운 세상을 울리는 음성은 저절로 무릎을 꿇게 만들 정도로 엄숙하고 거룩했다.
[믿는 이가 사라져서 우리의 존재가 사그라들어도 나는.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 음성은 어머니의 품에 안긴 것처럼 포근하고 안락했고.
[때가 되면 성물이 모이고, 용사로 선택될 이들이 다시 서게 될 테니.]
죽음의 평안함과 쉼을 느끼게 했다.
[이 세상의 섭리를 벗어난 이가 마지막 마왕이 되어 인간들의 끝을 고하려 할 때, 섭리를 벗어난 다른 이가 나타날 터이니.]
이어진 음성은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도 해 주었고,
[나, 우리는 그대, 마지막 용사, 용사들에게 나, 우리의 마지막 잔해, 마지막 힘을 주겠노라.]
그 힘과 희생을 알게 해 주었다.
나는 이 이미지, 아니 말들을 누가 보낸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신들이 보낸 것이었다.
아니, 신들이 마지막으로 남겨 놓은 메시지였다.
그리고, 이 메시지, 이미지 안에는 문자로 표현되지 못하는 많은 내용이 들어있었다.
내 생각대로였다.
지금 이 세상에는 신은 없었다.
나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과거 이 세상에는 신이 있었다.
물론 그 신들이 전생에 알고 있던 신들과 같은 신은 아닐지도 몰랐다.
전능한 존재도 아니었고, 나약한 인간의 손에 사라질 수 있는 그런 신이었으니까.
성물을 만들고, 용사를 선택해서 인류를 지켜왔던 신들은 인간이 유물을 만들고, 신의 능력을 강탈하면서 소멸하고 만 것이었다.
셀린의 사제인 레스티가 사제의 힘을 쓰지 못한 것도 그런 이유였을 테고,
죽음의 신도 언데드나 만들어 내는 신이 아니었을 터였다.
봉인되어서 유물처럼 되어버렸던 ‘기사의 검’도 마찬가지였고.
마왕의 손에 들어가 버렸던 ‘전쟁신의 검’은 따로 말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이미지가 사라지고,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을 뒤덮을 강대한 힘도, 포근한 감각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메시지들을 끝으로 신들의 자취는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신들은 사라지기 전에 할 일을 다 끝내놓았다.
내 몸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뼈나, 힘줄 피부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근육이 늘어나거나, 키가 커진 것도 아니었다.
단지, 마나가 달라졌다.
마나의 기운도, 마나의 움직임도 전부 달라졌다.
마치 신성력이라는 게 존재하는 것처럼 내 몸속의 마나는 찬란한 빛을 피워냈다.
그리고, 몸 안에서 일정하게 움직이던 마나가 몸 전체에 퍼져나갔다.
환한 빛이 내 몸 전체에 가득해진 것이다.
그 빛에 세상이 밝아졌다.
화아아악.
반파된 탑과 부활한 마왕.
우리를 감싼 반투명한 방어막.
그리고, 놀란 얼굴로 무기와 자신의 몸을 확인하는 사람들.
그리고, 내 눈앞에 떠 있는 정보창까지.
빽빽하게 창 전체를 채웠던 정보창은 이제 한 줄만 남아 있었다.
<용사 알렉스>
정보창에는 단 한 줄, 만화책이나 동화에서 봤던 그런 문구가 떠 있었다.
오래전에 봤다면 어이없어서 혀를 찼을 만한 문구였지만, 지금은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저 문구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주변을 둘러보니 예상대로 시간은 거의 흐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기와 탑이 번쩍했을 정도의 시간만 흘렀을 테지.
다만, 그 짧은 시간에도 마왕은 충분히 공격할 수 있었을 텐데, 마왕은 그 자리에 서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왕이 입을 열었다.
“그 빛은……. 설마, 신들에게 용사로 간택 받은 건가?”
마왕은 우리보다 더 용사에 대해 잘 아는 듯했다.
나도 친우들도 그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마왕을 살피면서, 변한 몸과 능력을 확인하기 바빴으니까.
마왕도 대답을 듣기 원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스스로 답을 내고, 신들에게 분노했다.
“하, 내가 신들에게까지 마왕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소리인가?”
허탈한 듯한, 억울한 듯한 목소리.
마왕의 과거를 아는 나로서는 저런 말을 하는 것이 이해되긴 했다.
용사로 만들어진 뒤에 버려져서 살아남았더니 마왕이 되어 버린 것일 테니.
하지만, 아무리 이해가 되어도, 그가 인류를 몰살시키려고 하는 마왕인 것은 변하지 않았다.
대전쟁 때 한 번 몰살시킬 뻔하고, 반복되는 삶에서는 수십 번 이상 멸망시켰으니까.
자기가 억울하다고 인류를 멸망시키려 하다니.
신들이 마왕으로 인정할 만했다.
마왕이 투덜거리는 동안, 나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놀란 눈으로 자신을 살피는 동료들은 모두 전과 달라져 있었다.
모습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달라진 것처럼 모두의 기세와 마나가 전부 달라졌다.
레스티는 이제 후광이 흘러나오는 진정한 신의 사제처럼 보였고,
지팡이를 든 대공녀는 무척이나 아름다워졌다. 마치 성스러운 대지의 여신처럼 보일 정도였다.
젊은 여왕은 카리스마가 가득한 황제로 보일 지경이었고,
교단의 대주교, 조아나는 젊은 대주교가 아니라, 거룩한 신의 사도로 보였다.
그런데, 저 관은 성물이 아닐 텐데.
설마, 교단을 만든 용사가 신이 된 걸까?
사람이 아닌 해골은…….
전하고 달라진 게 없었다.
달라졌다면 더 이상했을 것 같지만,
마지막으로 발레아는 벌써 영역을 만들어놓았다.
탑을 중심으로 하는 거대한 영역을.
탑의 마나가 그녀의 영역을 지탱하고 있었다.
모두 엄청나게 강해진 것이 느껴졌다.
신의 용사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신의 선택으로 이렇게 강해지다니.
그것도 성물에 남아 있는 소멸한 신의 마지막 힘만으로 이렇게 강해진 것이다.
거기다, 나도 마나가 달라진 순간, 온전히 회복을 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부활한 마왕도 충분히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다음에 또 부활한 마왕도 잘하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마왕은 계속해서 부활해버리겠지만.
마왕도 우리가 강해진 것을 느낀 것 같았다.
“큭큭, 그래봤자 소용없어. 나는 죽지 않는 존재다. 너희들이 신에게 용사로 인정을 받았다고 해도 바뀌는 것은 없다.”
하지만, 부활할 수 있는 마왕은 걱정하지 않았다.
죽여도 다시 살아나고, 더 강해질 테니까.
마왕의 말대로였다.
신의 용사가 되었다고, 영원히 마왕을 죽일 수는 없었다.
전보다 훨씬 강해졌지만, 마왕도, 귀족도 어차피 신의 용사에서 만들어진 능력자들이었다.
결국, 신의 용사도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내 표정은 전과 달라져 있었다.
강해진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전쟁신의 검’의 기억에서 과거 용사의 기억을 보았었다.
마왕과 싸우던 용사들의 기억을.
마왕과 싸우던 용사 중에는 지금의 마왕처럼 죽지 않는 용사도 있었다.
내 앞의 마왕이 과거 용사들의 능력을 모은 것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검의 기억에서 그 용사가 죽는 장면을 보았었다.
계속 부활하는 용사가 진짜로 죽는 장면을.
그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눈앞의 마왕도 잡을 수 있었다.
나는 검을 움켜쥐고, 앞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