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6화
제11편 용사 (2)
발레아를 보고, 나는 울고 싶었다.
그리고, 버럭버럭 소리치고 싶었다.
왜 지금, 그런 능력이 생겨난 것인지,
그리고, 발레아는 왜 여기로 찾아온 것인지.
일이 제대로 진행되어서 마지막 대화를 할 수 있으면 모를까, 마왕이 깨어난 지금은 죽을 장소일 뿐이었다.
죽기 직전인 나는 물론이고, 여기를 찾아온 누구라도.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깐.
나는 허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마왕이 깨어난 이상, 상관없는 일이군.”
다시 생각해 보니, 별 차이가 없었다.
지하에 만들어놓은 도시로도 숨지 못했고, 빙하 안에 만들어놓은 낙원도 피하지 못했다.
마왕이 봉인을 풀고 나온 이상, 대륙에 사는 인간이라면, 늦든 빠르든 마왕에게 모두 죽게 될 뿐이었다.
그래도 발레아가 와서 기회는 있으려나.
잘하면 그녀가 시간을 벌어주는 걸로 삶을 한 번 더 반복할 수 있을지도.
지금 내 몸이 죽어 가는 꼴을 보면, 발레아가 좀 더 시간을 벌어주면 안전하게 죽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봉인이 풀려나는 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터.
답이 없는 짧은 회귀이고, 영원한 루프에 빠지게 되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이어지던 생각은 내 뺨을 쓰다듬는 손길에 멈추게 되었다.
발레아가 몸을 숙여, 내 뺨을 쓰다듬었다.
조금 전보다도 더 화나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눈물은 아직 멈추지 않고 있었다.
“아뇨. 그렇게 자꾸 혼자 뭘 할 생각은 그만 해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맞습니다. 셀린의 성기사에게는 여신이 함께하십니다.]
발레아의 말에 이어 머릿속을 울리는 말.
[성기사 알렉스에게 전송.]
그리고, 전송이라는 말과 함께 내 어깨에 손이 올라왔다.
화아아악.
잘린 팔이 다시 자라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흐릿했던 시야가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설마, 터져 나간 머리도 되살아나는 걸까?
분명 ‘전쟁신의 검’으로도 ‘신검’으로도 절대 치료되지 않는 상처였다.
그런데 이렇게 치료되다니.
물론, 아주 조금씩 진행되는 회복이었지만, 회복된다는 자체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내 어깨를 짚고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레스티, 우리 영지의 경매장 주인이자 내 정보망을 담당하는 용병 ‘신검 추적자’.
그리고, 셀린 교단의 마지막 사제, 레스티아도가 왕관을 쓴 채로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싸워왔길래, 여신의 성물로도 이렇게 치유가 안 되는 겁니까?”
셀린 여신의 성물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건데, 이렇게 효과가 없다니.
레스티가 인상을 쓰며 투덜거렸다.
레스티의 머리에 씌워져 있는 왕관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성스러운 빛, 치유의 빛이었다.
“어떻게 여기를…….”
“저도 백작 부인과 같으니까요. 갑자기 백작님께 전송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백작님과 백작 부인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날아온 거죠.”
강화된 전송 능력은 발레아에게만 적용된 것이 아니었다.
“설마, 셀린의 성물을 가진 레스티도 전송이 가능하다면…….”
내가 혼잣말이 끝나기도 전에 머릿속으로 다른 음성이 들려왔다.
이번에도 잘 아는 목소리였다.
[전송, 샤를 백작에게.]
대공녀 프리다의 목소리였다.
이어서, 살아 있는 듯한 나무 지팡이를 들고, 대공녀가 나타났다.
대공녀는 엉망인 나를 보고 입술을 깨물더니,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물들이 많군요. 전부 마왕이 끌어들인 건가요?”
그녀는 지팡이를 힘껏 바닥에 내려찍었다.
그녀답지 않은 과격한 모습.
우우우웅.
지팡이를 내려찍은 바닥에서부터 마나가 퍼져나가고, 반투명한 반구가 우리를 에워쌌다.
대공녀가 성물인 지팡이로 펼친 방어막이었다.
한 겹, 두 겹, 세 겹.
대공녀가 펼친 방어막은 계속 중첩되었다.
투명한 방어막 위로 겹겹이 방어막이 겹쳐진 것이다.
한순간에 한눈에 봐도 열 겹은 넘어 보이는 단단한 방어막이 순식간에 우리를 둘러쳤다.
마물 왕급이 나서도 쉽게 부수지 못할 것 같은 단단한 방어막이었다.
그렇게 방어막을 치고, 대공녀는 다시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가 나를 보고 뭐라 하려는 순간,
쿵.
내 옆에 관 하나가 넘어졌다.
세워진 채로 갑자기 나타난 관이었다.
“앗, 넘어졌다.”
그리고, 관이 쓰러지자, 놀란 음성이 들려왔다.
조아나의 목소리였다.
넘어진 관 옆에는 조직의 대주교이자, 셀린의 신도인 조아나가 보였다.
“시신이 상하지는 않았겠죠? 성소에서 급하게 빼내느라, 어쩔 수 없었어요.”
저 관에 들어있는 시신은 미이라가 된 채로 수백 년간 교단의 유물, 아니 성물로 이어져 내려온 용사의 시체였다.
세워져 있던 관이 바닥에 쓰러졌다고 쉽게 상할 리가 없었다.
단지, 거꾸로 엎어졌으니, 안의 미이라도 뒤집혀 버렸다는 게 문제이긴 한데…….
미이라가 된 용사가 이해심이 많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 하하. 쿨럭.”
호들갑을 떤 조아나 덕분에 나는 겨우 웃을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입에서 죽은 피가 튀어나왔지만, 이 정도 피야 문제될 게 없었다.
내장이 갈가리 찢겼으니, 몸 안에 피가 고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아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조아나도 어쩔 줄을 몰라 하는 표정이었고, 레스티 마저 한숨을 내쉬었다.
셀린의 신도이자 스파이이긴 하지만, 그래도 대륙을 장악한 교단의 대주교인데 이런 취급이라니.
나는 손을 저어 괜찮다는 표시를 하고,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옆에 와있던 발레아가 나를 부축했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 혼자 있었는데, 지금은 내 옆에 사람들이 있었다.
발레아와 레스티, 대공녀와 조아나.
그리고, 여왕, 아이샤까지.
“그레시아 공작과 기사단장에게 뒷일을 맡기느라 늦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내 앞에 어린 여왕이 서 있었다.
갑옷을 입고, ‘기사의 검’을 든 어린 여왕이.
아니, 이제는 어린 여왕이라고 말할 수 없을 듯했다.
여왕은 작지 않았다.
키도, 얼굴도, 눈 속에 보이는 강한 의지까지.
그녀는 스스로의 의지로 이곳에 와 있었다.
하지만, 여왕이 왕국을 버려두고 여길 오다니…….
그걸 보고,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왕국은…….”
굼뜬 내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여왕이 입을 열었다.
“내 기사가 나와 왕국을 지켜온 것처럼 나도 이제 내 기사를 지킬 시간이 왔을 뿐이에요.
아무리 봐도 마왕과 싸우기에는 지금이 제일 좋은 것 같은데, 기껏 능력을 각성시켜 놓고, 여왕이라고 싸우지 못하게 할 건가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여왕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지면, 마왕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건, 이미 수없이 반복한 삶으로 확인했었다.
기껏 기사의 검을 쓸 수 있게 해놓고, 싸우지 못하게 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고.
다만, 공작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보내 준 게 의아했을 뿐이었다.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반대할 시간을 안 주었으니까.”
아무래도 여왕은 모두에게 제대로 말도 안 하고 달려온 것 같았다.
하기야, 다른 귀족들이나 기사들이 알았으면, 절대 못 가게 막았을 테니.
아니, 막아도 소용없었으려나.
대공녀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그녀도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여왕과 대공녀, 그리고, 다른 이들까지.
이들은 전부 내가 유물을 건네준 사람들이었다.
내가 마왕을 봉인한 뒤에 뒷일을 맡기려 했던 이들.
그런 이유로 성물과 유물을 나누어주고, 추가로 각성까지 해 주었는데, 결국, 이런 사태를 만든 모양이었다.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이들을 나도 둘러보았다.
여왕과 대공녀, 레스티와 조아나, 발레아까지.
그들을 보니.
나는 기쁘고 슬펐다.
화가 나고 안심이 되었다.
그들을 보게 되어 기뻤고, 그들이 죽을까 봐 슬펐다.
내 말을 듣지 않은 게 화가 났고, 내 옆에 있어 주는 것이 안심되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모두에게 감사했다.
결국 마왕이 깨어났으니, 내 모든 계획은 실패했다.
새로운 계획도 없었고,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
나를 돕기 위해 소중한 이들이 달려왔어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나를 찾아온 이들이 있으니, 실패한 인생치고는 꽤 잘 살아온 인생이었다.
수많은 죽음 끝에 찾아온 마지막 죽음은 그래도 외롭지는 않을 터.
나는 그렇게 나를 찾아온 이들을 반갑게 맞이할 수 있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싸워봐야겠죠?”
이렇게 모두 달려와 주었는데, 추한 꼴을 보일 수는 없었다.
내상이 다 낫지 않고, 팔도 완전히 복구되지 않았지만, 나는 ‘전쟁신의 검’을 빼 들었다.
우리를 감싼 방어막 앞에 피가 모여드는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왕이 부활하고 있었다.
수많은 삶 동안, 처음 보는 두 번째 부활이었다.
분명, 첫 부활로 강해진 만큼, 이번에는 더 강해졌을 게 분명했다.
핏물이 모여들고, 그 핏물이 다시 뭉쳐 뼈가 되고, 근육이 되고, 피부를 이루었다.
핏물에서 다시 마왕이 되는 것은 눈 깜짝할 사이였다.
나조차도 방해하기 어려운 시간.
죽었던 마왕이 부활했다.
“두 번이나 나를 죽이다니. 이런 적은 처음인데, 이번 회귀자는 정말 대단하군.”
부활한 마왕은 목을 꺾으며 중얼거렸다.
새로 나타난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하는 말.
보이지 않을 리가 없으니, 나 말고 다른 이들은 관심이 없는 걸까?
하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한창 재미있었는데, 잡스러운 것들이 추가되었군. 이건 매너가 아닌데……. 아무래도 귀찮은 것들부터 치워놓아야겠어.”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귀찮아할 뿐이었다.
그리고, 부활한 마왕의 손이 까닥였다.
크아아아앙!
마왕의 손이 움직이자, 가만히 있던 마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수를 에워싸고 있는 수천, 수만의 마물이 동시에 포효하고, 우리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땅이 울리고, 마나가 출렁였다.
갑자기 움직이는 마물들을 보고, 사람들이 무기를 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발레아는 영역을 펼칠 준비를 했고, 레스티는 내게 손을 떼고 전체 버프를 시전할 준비를 했다.
공주는 ‘기사의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고, 조아나는 관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나는 마왕을 노려보았다.
마왕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비웃음이었다.
나는 마왕의 표정을 보고 알게 되었다.
그동안 마물들이 다가오지 않고, 주변을 지키고 있었던 것은 내가 도망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재미를 추구하는 마왕의 유희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내 주위에 사람들이 늘어나자, 마왕은 마물들을 움직인 것이었다.
전보다 더 절망적으로 변한 상황.
하지만, 마왕의 비웃음에도 나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달라질 것은 없었다.
이제, 이길 확률이 얼마나 늘고 줄어든다는 것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기적을 바랄 뿐이었다.
나는,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부터 도움이 시작되었다.
드드드드득.
천천히 다가오는 마물들 앞으로 수많은 인영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대전쟁 때 이곳에서 죽었던 수많은 사람과 마물들.
그들이 몸을 일으켰다.
해골들과 뼈만 남은 마물들이 몸을 일으킨 것이다.
“해골? 언데드?”
“알렉스가 일으킨 건가요?”
발레아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지금 일어나는 수백 수천의 언데드는 모두 수백 년 전에 죽었던 자들.
나는 저들을 일으킬 능력이 없었다.
이런 게 가능한 것은 죽음의 사제 정도.
아니 죽음의 사제도 이런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이건, 죽음의 사제가 성물을 가졌을 때나 가능하려나.
우우우웅.
그 순간, 내 가슴에서 큐브, 죽음의 성물이 빠져나와 뒤쪽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지면에서 솟아오른 손에 큐브가 잡혔다.
뼈만 남은 손.
그리고, 그 손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해골, 죽음의 사제였다.
[죽.음.의 사.제.가 주.인.님.의 부름에 찾.아.왔.습.니.다.]
지하 도시에 있던 죽음의 사제마저도 스스로 나를 향해 전송해 온 것이었다.
그리고,
죽음의 사제, 해골이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
화악.
내 검이 빛나기 시작했다.
아니, 내 검만이 아니었다.
해골이 든 검은 큐브도,
대공녀가 들고 있는 나무 지팡이도,
여왕이 든 ‘기사의 검’과 레스티의 왕관까지.
모든 성물이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음성이 들려왔다.
[마왕을 대적하기 위해 신의 성물을 든 용사들과 마나의 왕이 모였습니다.]
전과 달리 성스럽게 느껴지는 정령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지금, 성전을 선포합니다.]
정령의 말과 함께 반파된 탑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