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4화
제9편 재봉인 (2)
손을 올려놓은 반투명한 구에 내 마나와 능력이 흘러 들어갔다.
마나가 흘러 들어가고, 능력이 전해질수록 깨질 듯이 흔들리는 구가 안정을 되찾아갔다.
반구는 점점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지만, 구 안에 휘몰아치고 있는 마나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탑이 마나를 불어넣지 않고 있으니, 마나가 바닥을 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얼마나 마나가 줄어들었는지, 반구 안에 있는 마왕의 모습이 희미하게 비쳐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이 봉인구가 내 마나와 능력으로 원상태로 돌아가면, 탑이 다시 마나를 채워 넣을 테니까.
나는 반구에 손을 얹은 채로 내 마나와 능력이 반구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담담히 지켜보았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난 뒤에 다시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재봉인 작업이 끝났습니다.>
<봉인을 유지하기 위해 마나가 필요합니다. 봉인에 마나가 부여된 것을 확인한 뒤에 연결을 해제하면 봉인이 완성됩니다.>
내 능력도, 마나도 이제 눈앞의 봉인구로 다 넘어갔다.
이제 마지막으로 탑에 지시를 내려 봉인구에 마나를 불어넣게 하고, 손을 떼면 이제 내 할 일은 끝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손을 떼면, 나는 죽게 될 것이었다.
지금도 내 능력과 마나가 담긴 봉인구와 연결되어 있어서 내가 아직 살아있는 것이었으니.
<수고하셨습니다.>
항상 기계처럼 딱딱한 말을 하던 메시지창도 처음으로 수고했다고 말했다.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게 누군지 결국 알아내지 못했지만,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메시지를 보낸 상대에게 감사를 표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내 뒤에도 부탁드릴게요.”
내 말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대답을 듣고자 꺼낸 말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대신 탑에게 지시를 내렸다.
“봉인에 탑의 마나를 불어 넣어!”
내 말이 끝나자, 탑의 에고가 대답했다.
머릿속과 공간을 울리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관리자의 지시를 확인했습니다.]
[봉인이라 불리는 에너지 체에 마나를 부여하겠습니다.]
[탑 폐쇄 확인.]
[폐쇄를 유지할 최소한의 마나를 제외한 모든 마나를 봉인에 부여합니다.]
마치, 오퍼레이터가 우주선 발사 순서를 확인하는 것처럼 탑의 에고가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우우우웅.
점점 밝아지는 바닥의 문양.
바닥만이 아니었다. 벽에도 천장에서도 환한 빛이 새어 나왔다.
이제 곧 저 문양들에서 마나가 쏟아져나와 봉인구를 채울 것이다.
그러면, 나는 손을 떼고 진정한 죽음을 맞이하겠지.
나는 밝아지는 문양을 보며, 그때가 되기를 기다렸다.
[봉인에 마나 부여 시작. 마나진을 재가동합니다.]
마지막으로 들려오는 에고의 말소리.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파직!
마나가 흘러 들어가는 소리 대신 엉뚱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재가동 실패! 재가동 실패! 일부 마나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에고의 음성이 아니더라도 문제가 생긴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바닥의 문양은 그대로 빛을 뿌리고 있었지만,
천장 곳곳에 새겨져 있던 문양에서는 빛 대신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나는 스파크가 튀고 있는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니, 이 순간에 고장이라고? 설마, 너무 오래되어서 고장 난 건가?
전생에 들었던 수십 년간 겨우겨우 움직이다가 껐다 켰더니 바로 망가져 버린 기계들에 관한 이야기가 떠오를 정도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에고의 말을 들으니, 너무 오래돼서 고장 난 것은 아니었다.
[외부에서 일으킨 고의적인 파손입니다. 탑의 외부, 상층에서 만든 파손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오래돼서 망가진 게 아니라, 외부에서 고의로 망가뜨린 것.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외부? 하지만, 탑은 폐쇄되었었잖아!”
마왕이 아니면 파괴되지 않는 탑이었다. 나조차도 흠집도 내기 쉽지 않은 탑.
그런 탑을 외부에서 공격해서 문양을 망가뜨리다니.
수백 년간 탑에 구멍을 뚫었다면 모를까,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잠깐, 수백 년간 구멍을 뚫어?”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저 천장 위에는 탑의 옥상이 있었다.
그 옥상은 얼마 전에 내가 죽인 마물 왕이 자리 잡고 있었던 곳.
그 마물 왕은 수백 년 전, 마왕이 봉인된 뒤부터 계속 탑의 옥상에 머무르고 있었다.
‘설마, 단지 마왕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니었어?’
생각해 보니, 그 머리 좋은 마물 왕이 마왕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리가 없었다.
머리가 좋은 만큼 마왕이 봉인을 빠져나오도록 뭐라도 했을 터였다.
그게, 봉인을 해제하지는 못했지만, 다시 마나를 주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는 성공한 것일지도…….
아니, 지금은 이유를 따져볼 때가 아니었다.
나는 반구에 손을 올린 채로 탑의 에고에게 소리쳤다.
“봉인에 마나가 채워지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마나가 소실되는 중입니다. 곧 봉인이 해제됩니다.]
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들려왔지만, 나는 반구를 보느라 대답을 듣지 못했다.
반구 안의 마나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내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휘몰아치던 마나는 이제 거의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반구 안에 있는 마왕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대답을 듣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내 눈에 결과가 보이고 있었으니까.
이제 곧 봉인이 깨지고 마왕이 눈을 움직이기 시작할 터였다.
더구나, 봉인 능력은 마왕이 움직일 시간을 더 당겨버렸다.
<봉인 유지에 실패했습니다. 능력과 마나를 회수합니다.>
봉인구로 흘러 들어갔던 능력과 마나가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능력과 마나가 되돌아오면서 봉인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반투명한 겉면에 금이 가고, 모습이 흐트러졌다.
순식간에 능력이 돌아왔다.
<능력과 마나의 회수가 끝났습니다.>
어이가 없었다.
덕분에 어이없이 죽지는 않게 되었지만, 여태껏 세워놓았던 계획은 전부 엉망이 되어버렸다.
나는 머리카락이라도 쥐어뜯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도 없었다.
봉인이 깨진 것이다.
콰직.
봉인구가 산산이 부서지고, 마왕이 뒷모습을 드러냈다.
해골이 된 선조가 있는 방향을 보는 마왕.
마왕의 모습 위로 메시지가 빠르게 지나갔다.
<봉인이 해제되었습니다. 새로운 ‘저장 시점’을 설정하시겠습니까?>
그나마 다행이었다. 봉인을 해제할 때도 저장 시점이 만들어지다니.
하지만, 메시지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현재, 사용자의 저장 시점이 없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자동으로 저장 시점이 설정되었습니다.>
맙소사.
이 시점이 저장 시점이 되어 버릴 줄이야.
물론, 봉인을 배울 때, 저장 시점이 사라졌으니, 지금이 새로운 저장 시점이 되는 게 당연하긴 했다.
거기다, 적어도 기회가 생긴 것은 맞았다.
단지, 지금 저장 시점이 만들어지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뻔히 보이는 게 문제였다.
‘설마, 루프에 영원히 갇히게 되는 건 아니겠지?’
마왕과 싸우고 죽고, 또 싸우고 죽고.
나는 이 탑에서 마왕과 영원히 싸우게 되는 미래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반복되는 삶 속에서 정신이 마모되던 경험은 한 번으로 족했다.
더구나, 이번에는 그때와 비교가 안 되었다.
마왕과의 싸움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
그럴 수는 없었다. 뭔가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때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마왕이 입을 열었다.
나를 처음 보게 될 때, 항상 꺼냈던 말.
나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상황이 아니었다.
빨리 정신을 차리고, 싸울 준비를 해야 했으니까.
어찌 되었건 간에 시간을 벌어놓아야 했다.
나에게는 상황을 파악하고, 방법을 찾을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마왕은 그런 시간을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마왕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너한테 물은 거다. 세 번째 회귀자.”
마왕의 말에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회귀자인 것을 알아차리다니.
분명, 마왕은 반복되는 삶 동안 한 번도 내가 회귀자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마왕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스파크가 튀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수하 하나는 죽기 전에 제대로 일 처리를 해놓았군.”
마왕의 말로 알게 되었다.
마물 왕이 문양을 망가뜨린 것은 마왕의 지시로 한 일이었다는 것을.
마왕이 검의 파편을 전송시키면서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린 것이다.
“봉인 자체를 망가뜨리는 것은 역시 무리였군. 그래도 재가동을 막긴 했으니까. 이렇게 되면, 몇백 년은 족히 지났을 것 같은데…….”
마왕은 여유롭게 떠들어댔지만, 나는 그의 말을 막지도, 뭔가 다른 준비도 하지 못했다.
마왕이 떠드는 동안 충격을 이겨내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악이었다.
내가 회귀자라는 것을 마왕이 알아차리다니.
탑에서 마왕과 영원히 싸우는 것보다 더 나쁜 상황이었다.
당장, 도망쳐야 하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바로 떠올랐지만, 마왕이 한 발 더 먼저 움직였다.
“우선, 도망치지 못하게 막고.”
쿵.
마왕이 발을 구르자, 마왕의 마나가 발밑에서 퍼져나갔다.
마나는 폐쇄된 탑을 뚫고, 사방으로 계속 퍼져나갔다.
전에 보았던 마왕의 결계였다.
공간 이동으로 도망치지 못하게 막던 결계.
이로써 내 전송 능력은 봉인되어버렸다.
“죽이지 않고 사로잡는 것은 꽤 귀찮은데……. 어쩔 수 없지. 또 당할 수는 없으니까.”
역시, 마왕 자신이 첫 번째 회귀자라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
회귀자라는 것을 들킨 이상 마왕은 내 약점을 다 알게 되었으니까.
‘젠장, 결국, 페널티를 각오하고 자살하는 수밖에 없나.’
마왕에게 잡혀 죽지 못하고 평생을 갇혀 지내는 것도, 세뇌를 당해 마왕을 따르게 되는 것도, 전부 감당할 수 없었다.
“자살은 생각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두 번째 자살부터 회귀 능력이 봉인되어버리니까.”
마왕은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라고 말을 덧붙였다.
마왕의 말은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마왕은 말을 하면서 본인이 경험한 것 같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살도 불가능했다.
거짓말이 아니면, 끝일 테니까.
“자, 그럼, 이 짜증 나는 탑부터 부수고 이야기를 해볼까.”
마왕의 손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저 빛이 무엇인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시작부터 공성 무기를 꺼내다니.
나는 급하게 몸을 날렸다.
콰아아앙!
탑 한쪽이 터져나갔다.
터진 벽을 통해 나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마왕도 나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우리는 탑의 전방, 섬 위에 내려섰다.
나는 손에 든 검을 치켜들었다.
탑에서 뛰어내리면서 꺼내든 검.
‘전쟁신의 검’이었다.
내 검을 보고, 마왕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내 검을 가지고 있었군.”
마왕은 전에도 했었던 말을 또다시 꺼냈다.
그때는 대답했었지만,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검에 되돌려받은 마나를 모았다.
상황은 최악이었지만, 도망갈 방법이 다 막힌 것은 아니었다.
마왕을 죽이면, 결계가 풀릴지도 몰랐다.
도망간다고 해도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검을 들고, 마왕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마왕.
나는 달아나기 위해, 실낱같은 희망을 위해, 마왕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