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3화
제8편 재봉인 (1)
무게를 잡으며 탑을 향해 걸어갔지만, 탑은 아직 폐쇄된 상태였다.
당연히 탑의 정문은 열리지 않았고, 나는 호수로 뛰어들어야 했다.
아래로, 아래로 헤엄을 쳐서, 호수 바닥에 붙어 있는 작은 문을 통해 탑으로 들어갔다.
나는 관리자 용 통로를 지나, 제어실에 도착했다.
제어실은 전과 달라져 있었다.
반복되는 삶 동안 계속 찾아왔던 탑의 제어실이었지만, 이런 광경은 보지 못했었다.
마치 SF 영화에서 보던 반투명한 창들이 제어실 사방에 떠 있었다.
대부분 붉은색으로 번쩍이고 있었지만, 그동안 텅 비어있던 제어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왜 이렇게 된 것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관리자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탑 에고의 환영 인사에 나는 바로 질문했다.
“부족했던 마나는 다 채운 건가?”
[네, 탑을 다시 개방하면 시설을 전부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어실이 이렇게 바뀐 것은 탑의 마나가 전부 회복되었기 때문이었다.
탑의 마나가 회복되었으면, 이제 내 검을 돌려받아야 했다.
이 탑에 마나를 채워주었던 ‘전쟁신의 검’은 지금도 제단 앞에 깊숙하게 박혀 있었다.
나는 제단 앞으로 가서, 검을 뽑았다.
스르릉.
검은 쉽게 빠져나왔다.
[세상에, 저를 이렇게 버려두다니요! 용사님만 믿었는데, 겨우 온전한 모습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방치되다니요! 거기다, 마나까지 쭉쭉 빨리고…….]
검을 뽑아내니, 곧바로 검 정령의 하소연이 머리를 두드렸다.
하소연이 심해서 뭔가 문제가 있을까 했지만, 역시 신의 성물이었다.
탑의 마나를 다 채웠는데도 마나는 달라지지 않았고, 회복 능력과 정령의 목소리도 변하지 않았다.
나는 정령의 잔소리를 뒤로 흘리면서 탑의 에고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금 탑을 개방한다.”
[탑을 개방하면 봉인에 주입되던 마나가 멈추게 됩니다. 잠시 뒤에 봉인이 풀리게 됩니다.]
탑의 에고는 전과 비슷한 조언을 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어.”
[탑을 개방하겠습니다.]
전과 다르지 않은 음성이었지만, 내 귀에는 왠지 기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르르릉.
전처럼 바닥과 벽이 울리기 시작했다.
폐쇄된 문들이 열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전과 다르게 제어실 곳곳에 떠 있던 반투명한 창의 색이 붉은색에서 각양각색의 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창 안에 처음 보는 글자들이 떠올랐다.
처음 보는 글자들이었지만, 뭐에 쓰는 것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이 탑을 제어하는 시스템을 표시하는 것일 테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제어실의 모습을 보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탑은 고대 제국 이전, 신들이 만든 탑이라고 들었었다.
그런데 이런 오버테크놀로지 시스템이라니.
눈앞에 매번 보이는 메시지도 창도 그렇고.
사실, 신이라는 건, 외계인이나, 초고대 문명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멸망한 초고대 문명의 인공지능이 신 행세를 하고 있다던가, 아니면, 신의 유물은 외계인이 남겨놓은 오파츠일지도…….
그런 엉뚱한 생각들이 잠시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런 생각들이 떠오르는 건, 아마도 더 진행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미, 탑이 개방되었다.
시간은 흐르고 있었고, 이제는 죽어도 되돌아갈 수 없었다.
나는 다시 탑의 에고에게 지시를 내렸다.
“내가 탑 안에 들어간 뒤에 다시 탑을 폐쇄해.”
[……바로 폐쇄하나요?]
내 말에 탑의 에고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거기다 대답에는 놀란 느낌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나는 계속 지시를 내렸다.
“그래, 그리고, 내가 재봉인을 하면 다시 봉인에 마나를 불어넣어.”
[……알겠습니다.]
에고의 음성에는 실망했다는 뉘앙스가 가득 담겨 있었다.
역시, 이 탑의 에고도 유물의 에고와 달리 감정 표현이 가능한 모양이었다.
다만, 그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내 선조 때와 같이, 해야 할 일만 잘해주면 되는 일이었다.
이제 이곳에서 할 준비는 끝났다.
이제 왔던 통로로 돌아가 헤엄을 쳐서 지상으로 나가야 했다.
거기서, 다시 탑을 올라야 하고.
탑이 개방되었으니, 시간이 많지 않았다. 서둘러야 했다.
나는 검을 들고, 마지막으로 제어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내가 제어실을 빠져나가기 전에, 다시 에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봉인이 있는 최상층으로 가실 생각이라면, 직행이 가능한 수직 승강기가 있습니다.]
에고의 말과 함께 전에 위로 가는 계단이 나타난 것처럼 벽 일부가 움직여 수직 통로를 드러냈다.
바닥에 원형 금속판이 자리한 수직으로 뚫린 원형 통로.
줄이 없는 ‘엘리베이터’였다.
마나가 채워지니 이런 것도 가능한 건가.
빠르고,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다른 길로 갈 이유가 없었다.
나는 열린 문을 통해 수직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금속판 위에 서니, 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부우웅.
이번에는 예상이 틀렸다.
줄이 없는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일종의 무중력 통로인 모양이었다.
나는 바람을 타고 계속 위로 올라갔다.
탁.
나는 금방 탑의 최상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를 위로 올려보내던 바람은 최상층의 열린 벽 앞에서 멈춰 섰고, 나는 둥둥 뜬 채로 열린 벽을 건너 최상층 홀에 내려섰다.
그리고, 탑 전체에 에고의 음성이 울렸다.
[현 시간부터 탑을 폐쇄합니다. 한번 폐쇄하면 개방이 어려우니, 관리자는 열을 세는 동안 생각이 바뀌면 바로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에고는 숫자를 셌다.
십, 구, 팔, 칠…….
혹시나, 내가 말을 바꾸기를 바라는지, 에고의 음성이 길게 늘어졌다.
하지만, 나는 명령을 번복하지 않았다.
내 앞에 있는 봉인구를 보고 다른 명령을 내릴 수는 없었다.
[……일, 탑을 폐쇄합니다.]
초읽기가 끝나고, 폐쇄한다는 에고의 말과 함께 다시 바닥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환했던 홀도 어두워지고, 활짝 열렸던 문과 벽이 다시 닫혔다.
그리고, 마왕이 갇혀 있는 마나구 주변에 있는 문양들이 다시 빛을 머금었다.
탑의 마나를 다시 주입할 준비가 된 것이다.
나는 천천히 마나가 소용돌이치고 있는 반구로 다가갔다.
반복되는 삶 동안 계속 보아왔던 반구였다.
그리고, 그 아래, 해골이 있었다.
해골 아래에는 메시지가 담긴 단검이 있을 테고.
나는 잠시 해골을 쳐다보다가,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선조의 해골과 나란히 누워 있기는 싫어서였다.
안이 보이지 않는 마나구 옆을 나는 천천히 걸었다.
격렬하게 흐르는 마나를 가두고 있는 반구.
그렇지만, 이 반구는 금방 깨질 것 같았다.
그래도 보기와 달리, 마나구가 깨지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탑을 개방한 뒤에 이곳으로 바로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슬쩍 반구에 손을 올려 보았다.
<봉인에 접속했습니다. 봉인이 극도로 약해져 있습니다. 재봉인 하시겠습니까?>
전과 메시지가 달라져 있었다.
전에는 정보를 획득 중이라는 메시지가 나왔었는데.
물론, 이미 봉인에 대한 정보를 얻고, ‘사자 회귀’도 성장해서 재봉인이 가능해졌으니, 메시지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예’라고 대답하면 바로 재봉인이 될 터였다.
그 뒤에 탑이 마나를 투입해서 봉인을 유지하겠지.
그리고 오랫동안, 적어도 수백 년간 봉인이 유지될 테고.
하지만, 나는 봉인이 유지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마왕을 재봉인 한 뒤에 나는 죽게 될 테니까.
그 죽음은 회귀가 가능한 그런 죽음이 아니었다.
‘저장 시점’이 없어서가 아니라, 회귀 능력 자체를 쓸 수 없기 때문이었다.
봉인에 대한 정보를 얻은 뒤, 나는 봉인과 내 능력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되었다.
내 앞에 있는 마나구는 반대편에 누워있는 선조의 ‘사자 회귀’ 능력 그 자체였다.
사실, 마왕의 봉인은 마왕을 특정한 장소에 가둔 봉인이 아니었다.
마왕이 갇혀 있는 곳은 장소가 아니라 시간이었다.
‘사자 회귀’로 반복되는 시간.
그 시간을 이용해서 마왕을 멈춰 세운 것이었다.
저 반구 안은 시간이 멈춰 서 있었다. 아니, 시간이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
수백 년의 시간이 한순간이자 영원으로 느껴질 정도로.
마왕이 봉인을 빠져나온 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봉인이 시간을 얼리는 것인 것처럼, 내가 가진 능력은 ‘차원 이동’ 같은 평행 세계로 이동하는 능력이 아니었다.
‘사자 회귀’는 진실로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었다.
이 능력은 시간의 신이 내려준 능력일지도 몰랐다.
내 팔에 채워져 있는 팔찌는 ‘시간의 신’의 성물일 수도 있고.
이제는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이겠지만.
레스티가 셀린 여신의 사제인 것처럼 나도 ‘시간의 신’의 신관일지도 몰랐다.
물론, 그런 신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사자 회귀 능력을 봉인구에 주입하면, 나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회귀했던 시간이 나를 덮쳐올 테니까.
선조가 그랬던 것처럼 재봉인을 한 뒤에 나는 늙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봉인구에 손을 올린 채로 멍하니 생각을 이어갔다.
‘시간의 신’이라는 가상의 신에서부터, 대전쟁 때 용사의 일들.
그리고, 내가 여태껏 살아온 일들과 소중한 사람들까지.
그래도 마지막 삶은 무척이나 즐거웠지만,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내 뒤에 남게 된 이들에게 미안했다.
나름, 선물을 남겨놓았지만, 부족한 게 많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남겨준 것으로, 수백 년 뒤에 다시 마왕이 깨어나게 될 때 과연 그때는 마왕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
부족한 게 많아 보였지만, 그건 그때를 사는 사람들이 해결할 문제였다.
그리고, 그때를 떠올리자니, 예감이 나쁘지 않았다.
내 예감은 잘 맞는 편이니, 그걸 믿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건 주지 못했구나.”
사람들에게 남긴 것들을 떠올리다가 나는 혀를 차고 말았다.
건네주지 못한 물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환 큐브.”
말이 끝나는 순간 반대편 손 위에 검은 큐브가 나타났다.
다른 성물들은 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 성물은 결국 아무에게도 주지 못했다.
“이걸 누구에게 주겠어. 그나마 줄 만한 사람은 다 내 손에 죽었으니…….”
성능 면으로 보면, 다른 성물보다 더 쓸모가 많았지만,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없었다.
괜히 줬다가 욕이나 먹고, 내 명예나 박살 날 테니까.
나는 한숨을 내쉬고, 큐브를 품 안에 집어넣었다.
나중에 여기까지 온 용사가 내 시체에서 찾아내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큐브를 유물 주머니에 넣는 순간, 나는 내 능력 하나가 성장한 것이 느껴졌다.
조금 전에 쓴 능력이 소환이었으니, 소환 능력이 성장한 것일 터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토록 성장하지 않던 소환 능력이 지금 와서 성장하다니…….
너무 늦은 레벨업이었다.
나는 무슨 능력인지 정보창을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시간만 끄는 짓이었다.
시간을 끌수록 미련만 커질 뿐.
<재봉인 하시겠습니까?>
나는 눈앞에 뜬 메시지를 보며 예라고 대답했다.
마나가, 내 능력이 손을 통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마왕의 재봉인을 시작했다.